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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Aug 21. 2020

삶의 답 찾기 ―구원

미얀마,그리고 <대일본국 법화경 험기>

1996년 여름이던가. 

오사카 간사이(關西) 공항에서 미얀마 가는 비행기를 탔다. 아무도 아는 이 없고, 물론 미얀마어도 몰랐다. 


박사과정 3년차. 햇볕 아래 한가로이 걷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지냈지만, 답이 무엇인지 모를 답답함 때문에 탈출하고 싶었던 것 같다.      


동경대 인도철학과 지인이 손에 쥐어준 낯선 이름 한 조각이 미얀마에서의 나의 의지처 전부였다. 

그 이름의 주인공 언니가 나를 공항에서 맞이해 주고 그의 기거처인 한 절에서 묵게 해주었다. 


당시 아직 총기를 든 군인들이 거리를 활보하던 때였다. 미야마인과 인도인들 틈에서 피부색이 다른 내게 시선이 쏠리는 것을 느끼고, 양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당시의 수도였던 양곤과 바간, 만달레이를 돌아다녔던

기억이 아련하다.      


어느 절에서 만난 한국 스님이 여자 혼자 다니는 것이 위험하다고 내 목에 염주를 하나 걸어주고 가셨다. 

염주를 건 것을 보니 수행자라고 미얀마의 택시아저씨가 공짜로 타라 했다. 

나를 태우고 가며, 자기는 오전 중에는 벌고, 오후가 되면 절에 가서 번 돈의 반을 보시하고 휴식을 취한다고 신나게 말해 주었다.      

실제 미얀마의 온갖 절 한가운데 광장의 큰 보시함에는 돈이 넘쳐났다. 멀리서보면 무슨 휴지조각들 굴러 다니듯이 마냥 돈이 넘쳐났다. 그런데 주위의 서민들 집은 더할 나위 없이 누추하기만 했다. 

난생 처음 보는 이러한 이경(異景)들 앞에, 당시의 젊은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또 자본주의 나라에 유학 가서 깔끔하고 경제적으로 에누리 없는 환경조건 속에서 살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분투하던 나는, 자기 집은 하염없이 초라하기만 한데 돈이 넘쳐나는 절에 와서 보시를 하고, 그 마당 한켵에서 낮잠을 자며, 저리 널널한 얼굴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 후로 어연 25년이 지났다. 지금의 미얀마 거리에서는 어떠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을지, 어떤 변화 속에 있을지 나는 또 상상조차 어렵다. 

하지만 이 지구 위 어딘가의 사람들은 반드시 내가 생각한대로 살고 있지 않을 수도 있으며, 내가 살고 있는 방식은 단지 수많은 삶의 방식 중의 하나일 뿐, 반드시 옳은 것만도, 맞는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살게 된 것 같다. 


책상머리에 앉아 일본의 <대일본국 법화경 험기(大日本国法華経験記)>(11세기 중반 성립, 사문(沙門) 진원(鎮源)편찬). 이하 <험기(験記)>로 생략)를 끄적이다 보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눈이 머물렀다(상권 제13화).

     

승려 일예(壱睿)가 구마노(熊野)에 참배 가는 길에 시시가세 산(宍背山)에 머무르게 되었다. 한밤중이 되었는데 법화경 읽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매우 고귀하고 듣고 있자니 골수에 사무쳤다. 혹 누군가 머무르고 있는 것인가 생각되었다.……

아침에 되어 보니 해골이 하나 있었다. 몸은 전부 연결되어 있고 아직 흩틀어지지 않았다. 푸른 이끼가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을 보니 오랜 세월이 흐른 것이었다. 

해골을 들어다 보자니, 입 안에 혀가 있었다. 붉고 선명하여 썩지 않은 채였다.……

영(靈)이 말하길 “나는 천태산 동탑의 주승(主僧)이었습니다. 이름을 원선(円善)이라 합니다. 수행 때 여기에서 죽었습니다. 살아생전에 법화경 육만 부를 전독(轉讀)하려는 소원이 있었는데, 반을 읽었습니다. 그 나머지를 읽기 위해 여기서 지내고 있으며 이제 나머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단지 올해는 이곳에 있고, 그 뒤는 도솔(兜率)의 내원(內院)에 태어나고자 합니다.”

……     


읽으며 내 눈에서 왜 눈물이 흘렀는지 나도 모르겠다.      


<험기>는 법화경 지경자(持経者)에 대한 설화를 집대성한 책이라 할 수 있는데, 그와 같은 지경자에게 있어 중요한 행업(行業)이란, 매일 끊임 없이 법화경을 독송하는 일이었다. 

그 목적은 과거와 미래의 자신의 죄업이 소멸되기 바라며, 이로써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처럼 죽어 해골이 되어도, 그 혀가 썩지 못하고 독송을 멈추지 않았다고 전하는 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이다. 몸부림치던 이들의 생을 생각해 보며 가슴이 아파왔다.       


일본의 헤이안 시대에는 이같은 <험기>이외로도 <일본왕생극락기(日本往生極樂記)>, <속본조왕생전(続本朝往生伝)>, <습유왕생전(拾遺往生伝)>, <후습유왕생전(後拾遺往生伝)>, <삼외왕생전(三外往生伝)>, <본조신수왕생전(本朝新修往生伝)> 등, 수많은 <왕생전(往生伝)>이 저술되었다.


일본 사상사 속에서 하나의 고봉(高峰)으로 평가되는 가마쿠라(鎌倉) 불교도, 중국 전래의 선종(禅宗)계통을 제외하고는, <왕생전>에 보이는 정토(浄土) 신앙과 <험기>에 보이는 법화 신앙의 2계통으로 성립되었다. 


이러한 저술서의 출현은 근세 에도시대에까지 계속 된다. 

그 내용은 산중에 은거하며 험난한 수행도 마다않던 출가자들, 또 때로는 승려의 형식주의적 위선을 던져 버리고 처대육식(妻帯肉食)의 재가(在家)적 삶을 살면서 염불에 전념하며, 자신이 그리는 궁극적인 이상의 경지를 찾던 이들의 모습의 전한다. 

시대의 권력자도, 살생을 업으로 삼던 무사도, 그 자신 죽음의 문턱 앞에 섰을 때의 무력함과 두려움을  '극락왕생' 의 믿음에 매달리며 생을 마감했다. 

      


일본이라는 열도에 삶의 터전을 정하고부터 시작된 수많은 자연 재해와 정변, 칼부림의 권력 싸움을 반복해 온 긴 전란의 역사.

이 속에서 갖가지 생사의 환란을 넘기며,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며 살았던 열도 사람들에게 비춰진 삶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일본 역사상 이렇듯 많은 <왕생전>이 저술된 의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역시 인간 스스로가 찾아내고 싶었던 삶의 구원, 궁극적인 답 찾기가 아니었을까. 

나는 그리 생각된다.          


인도의 성자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는 “스승님, 인생의 고통 짐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묻는 제자에게,      


“그 고통 짐이라는 마음만 없으면 된다”

라는 답을 준다(데이비드 갓맨 편집, 정창영 옮김 <있는 그대로>).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손에서 책을 뗄 수가 없었다. 혹시 이 속에 내가 찾던 답이 있는 것은 아닐까. 가슴 한복판이 작게 요동쳤다.  


애정을 들여 읽다가 이내 의문이 왔다. 

그 고통 짐이라는 마음은 도대체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아무리 찾아도 그에 대한 답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해결을 할 수 없었다.      


자기를 돌아보며 마음을 없애는 명상을 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던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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