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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ny Sim Feb 14. 2020

서부 아프리카 생존기 1화:
헤어짐에 대하는 자세

네이버 블로그로도 글을 남기지만 첫 시작이 정보와 기록 위주였던 터라, 그곳에선 마음을 툭 까놓는다거나 혹은 반말로 글을 쓰는데 난데없는 부끄러움과 알 수 없던 체면치레가 있었다. 컴퓨터로 글을 읽는다는 재미를 알고부터 네이버 블로그로는 성에 차지 않아 넘어온 브런치에서 몇몇 글들을 접하며 나도 뭔가 끄적여 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글을 남겨본다. 



2020년 1월 31일 밤 9시 반. 올해 첫 이별을 했다. 서부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 온 지 5개월 차에 접어들었고, 옆집에 살던 직장동료이자, 천사 같았던 청년이 떠나갔다. 수많은 이유를 뒤로하고 그저 옆집에 살고 있다는 "존재"만으로도 이 삭막한 아프리카에서 엄청난 위안을 얻었었다. 그런 그가 떠난다고 하니 처음엔 마음이 바뀌겠지 하다가, 혹은 이건 꿈 일 꺼야 하다가, 1월 31일은 오지 않아 하다가 결국 그날이 왔다. 어느 노래 가사에 떠나는 사람이 더 힘든 법이라는 건 전혀 공감치 못했고, 남아있는 대부분의 직장 동료들 모두 씁쓸해했다. 

그가 떠난 지 6일 차. 남기고 간 옷들을 받아서는 처음에 전부 기부하겠다고 했다. 회사 현지인 직원들에게 나눠줄까 싶었지만, 누구에게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남았다. 이 사람을 줘야 하면 또 다른 사람에게도 줘야 할 것만 같았고, 난 도라에몽이 아니라 그저 옆집 청년이 남기고 간 20장 남짓의 옷가지가 다였기 때문에 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해냈던 건 "장사"였다. 공장 직원들만 해도 1000명. 그가 남기고 간 옷들 중 정말 낡고 해진 것만 제하고 장당 500 세파(한화 1000원)에 팔아볼 요량이었다. 나의 다분한 관종끼를 가지고 한국에서 가져왔던 압축 비닐을 깔고, 남기고 간 옷들을 좌판처럼 깔았다. 

장사 이틀 차, 회사 대리님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셨다.


좌판을 깔자마자 Cinq cent(쌩쌍, 500)을 외치며 팔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큰 관심은 받았는데, 처음 해보는 장사에, 또 몰리는 손님에 정신이 없었다. 옷 두어 벌 정도는 누군가가 스리슬쩍 가져간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돈을 덜 받기도 했다. 아. 그리고 내가 애정 하던 슈퍼스타 핑크색도 누군가의 손에 팔려갔다. 나는 옆집 청년이 생일 선물로 준 새 신발이 있어서 더는 필요치 않았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더 예쁘게 신어줬으면. 

옆집 신발장수 언니에게 신발을 싸게 넘겼다. 훗날 회계부 현지 직원 아메드가 자기는 똑같은 신발을 만세파에 샀다고 했다. 


생각보다 현지 직원들의 점심시간은 짧다는 걸 알고 나서 어제보다는 조금 일찍 공장 밖으로 나섰다. 다음 날 청년이 남기고 간 두 켤레의 신발도 세탁하여 1000 세파(한화 2000원)에 팔았고, 어제 플라스틱 봉지는 없냐던 나의 첫 구매자들의 불평(?)에 이 날은 쟁여둔 봉지도 가지고 갔다. 가죽 가방 하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1000 세파에 팔고 싶었지만 500 세파조차 없던 현지인 직원들도 많아 결국 800 세파에서, 마지막 500 세파에 가죽 가방을 넘기고, 남아있던 세장의 셔츠도 어느 고운 현지인 할머니께 500 세파에 넘겨 완판을 했다. 


No money, no give!  No credit, no give! 이렇게 프랑스어로 짧게 이야기했다. 자꾸 꺄도(선물)로 달라던 직원들, 크레딧으로 달라던 직원들, 월급 받으면 주겠다는 직원들이 너무 많았다.

시끄럽던 회사 사이렌 소리는 점심이 끝나는 걸 알리는 종이었다. 5개월 만에 알아챘다. 


직업이 회계사이지만, 내 돈 관리는 전혀 안 되는 엉터리 회계사인지라 얼마를 벌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죄다 구매하는 손님들이 큰 지폐들만 내놓아서 내 잔돈을 탈탈 털어 주었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던 돈과 혼합되어 실제 얼마를 벌었는지는 가늠이 안된다. (정신이 너무 없었다. 여기저기서 이해 못하는 불어를 듣느라, 매의 눈으로 훔쳐가는 이 없나 집중하느라.) 



대략 15000 세파(한화 3만 원) 정도는 벌었으리라. 첫 영업의 대가로 번 돈은 청년의 이름으로 공을 사서 현지 유치원에 기부를 할 생각이다. 원래 내 것이 아니었던 것임으로 나의 이름이 아니라 떠나간 이의 이름으로. 나야 늘 그를 기억하고, 추억할테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그 사람을 기억해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두고 싶었다. 


지금도 청년이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짧다면 짧은 만남이었고, 뼛속까지 친해진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 사이는 아니었지만, 지난 몇 년, 혹은 내 삶 전체를 돌아봤을 때 만났던 사람들 중 인간적으로 꽤나 괜찮은 사람이었다. 나와는 성향도, 외모도, 취미도,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였지만, 우리에게는 "코트디부아르, 아프리카"라는 공통점 하나로도 충분히 좋은 인연이었다.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며, 

2020년의 첫 이별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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