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자아 찾기 (15)
내가 가장 오래 다녔던 회사에서 나의 업무는 기업에 대해 평가하는 보고서를 쓰는 것이었다. 스스로 ‘글쓰기’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나의 업무는 보고서를 써서 의뢰기관에 납품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는 ‘글을 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좋은 문장을 쓰고자 노력했고, 보고서를 완성할 때까지 고쳐쓰기를 반복했다. 가끔은 몇 달에 걸쳐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를 쓰기도 했는데 다 쓰고 난 보고서가 내가 만든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당시 나에게 요구되는 역량 중 하나였던 ‘글쓰기’를 특별히 어렵게 느꼈던 적은 없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읽기 쉬운 글을 쓴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글쓰기는 그저 취미생활일 뿐인데도 그때보다 훨씬 어렵게 느껴진다. 왜일까?
나는 그 이유가 ‘나의 이야기’를 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나의 업무는 기업에 대해 설명하고 평가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나의 생각이나 감정, 경험과는 무관한 일이다. 이미 만들어진 평가 기준에 의한 객관적인 판단을 서술할 뿐이다. 나는 글을 쓰기 이전에 나의 생각과 감정을 꺼내 보이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고, 그래서 지금은 글쓰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몇 달 전, 나이키 창업자의 자서전 『슈독』(필 나이트 지음)을 읽었다. 나이키라는 거대 기업의 탄생 과정이 마치 소설과 같이 서술되었다. 기업가가 이렇게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놀라워하며 검색을 해보다가 고스트라이터(우리말로는 ‘대필작가’)가 쓴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공한 기업가, 정치인, 연예인, 운동선수들이 바쁜 와중에 직접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집필하는 건 불가능한 게 당연하다는 걸 알면서도 고스트라이터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때부터 고스트라이터라는 직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스트라이터는 다른 사람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사람이 되어 글을 쓰며 내가 성장하는 경험을 하는 멋진 직업이었다.
한 사람을 온전히 상대하는 일은 내가 성장하는 좋은 기회다. 글을 쓰느라 어떤 사람의 인생을 내 안에 체화시키면서 나의 삶만으로 알 수 없었던 것을 알게 된다. 밀도 있는 간접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저런 생을 가까이에서 경험한다는 건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일이다. 대필 경력이 쌓이면서 여러모로 스스로 조금씩 나아진다고 느끼는데 이는 단순히 나이를 먹어 성숙해지는 것과 다른 결의 성장이다.
- 『직업으로서의 대필작가』, 이재영 지음
퇴사 후 곧바로 시작한 부동산 경매는 그저 빠르게 수익을 내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퇴사 후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거라도 하면 백수가 아닌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낙찰로부터 이어진 일련의 일들을 처리하며 퇴사 후 두 번째 일은 ‘돈을 벌기 위한 일’이 아닌 진짜 ‘나의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가장 하고 싶었던 글쓰기를 시작했다. ‘글쓰기가 어떻게 돈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여러 책에서 ‘질문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순간에도 잠재의식이 끊임없이 답을 찾으려 노력한다’고 했는데, 나의 잠재의식이 답을 찾았는지 내 머릿속에 아이디어를 던져주었고 나는 지체 없이 그걸 행동에 옮겼다.
본인의 일에서 충분한 콘텐츠를 가지고 있는 지인에게 함께 책을 써보자고 제안했고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다. 책을 출간해 본 경험이 없는 나에게는 어마어마한 도전이다. 앞으로 몇 달간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일 예정이다. 책의 내용이 ‘나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조금은 글쓰기가 수월하길 바라며, 어떤 여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두렵고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