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을 앞두고 대기업에서 퇴사하다

마흔에 자아 찾기 (1)

by 이오

나는 11년 동안 직장 생활을 했고, 6개월 전 직장 생활을 완전히 끝냈다. 대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고 두 군데의 중견기업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대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마무리했다.


나는 첫 회사에서부터 직장인으로서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학생에서 벗어나 직장인이 되어 매달 월급을 받는 게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아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지만 잠시 뿐이었다. 나의 5년 뒤의 모습은 ‘저 주임님’과 같을 것이고, 10년 뒤의 모습은 ‘저 선임님’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에 숨이 막혔다. 일주일에 5일을 일하고 2일을 쉬고, 1년에 길어야 일주일 남짓의 휴가를 한 번 쓸 수 있는 삶을 무한히 반복하기에는 직장 생활 외에 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당시에 블로그로 돈 버는 법에 대한 책을 사서 봤던 기억이 있다. 그때 친해진 언니는 내가 우유를 파는 카페를 운영할 거라는 이야기를 했던 게 기억난다고 한다. 이미 그때부터 직장 밖에서 돈을 벌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나는 1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했다. 직장인의 삶이 불만족스러웠지만 그래도 나에게 맞는 자리가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직을 여러 번 했다.


유독 내 주위엔 첫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회사에 불만은 많아 보여도 연봉이나 복지에 만족하면서 어쨌든 잘 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별종이었다. 지금은 '능력이 있으니까 이직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예전에는 이직하는 사람을 조직 생활을 잘 못하고 힘든 상황을 잘 버티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나 자신도 스스로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진취적인 사람인 척했지만, 주위 사람들처럼 한 직장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내세울 만한 취미도 특기도 없는 나는 소속이 나를 표현할 유일한 길이었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기업에 다닌다는 건 굳이 나를 부연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나라는 사람을 보증해 주었다. 회사의 이름 뒤에 숨어있는 건 너무나 편안했다. 내가 회사에서 나오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계속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걸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회사 밖에서 멋진 사업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해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난 잘하는 게 없었고 회사 이름을 지우면 난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퇴사는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저 학교에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회사에서는 일을 열심히 하는 남들 눈엔 모범생, 실제로는 바보로 살아왔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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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퇴사를 하게 된 과정을 돌이켜보면 그저 운명의 흐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팀에 가게 되었고, 항상 그랬듯 열심히 했다. 나에게 챌린징 한 포지션이었지만 열심히 하다 보면 적응할 거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업무를 맡아 버거웠을 때마다 시간이 흐르면 상황이 안정되었고, 결국 자리를 잡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한 번아웃이 왔다. 태어나서 처음 우울증, 공황 같은 증세를 겪으며 도저히 회사생활을 지속할 수 없었다.


건강을 잃기 전에 일을 그만두는 게 맞다고 항상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 상황이 되니 결정이 쉽지 않았다. 중간에 일을 쉬었던 사람에게 다시 기회가 올까? 퇴사한 걸 후회하면 어떡하지? 출퇴근할 곳 없이 집에만 있다가 우울증이 안 나으면 어떡하지? 등 걱정이 끝이 없었다. 무섭고 불안했다. 당시 나는 부정적인 생각에 잠식되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일지 생각해 보려고 애를 썼다.


퇴사가 현실이 되는 게 무서워서 ‘하루만 더 다녀보자’, ‘이번 주말만 넘겨보자’하는 생각으로 몇 주를 보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공황 증세로 두 번이나 중간에 내렸다가 겨우 출근했던 날 회사에 퇴사를 하겠다고 말했다. 회사에서는 휴직을 권했지만 휴직 권고 기간이 명시된 의사의 소견서가 필요했고, 내가 다니던 병원에서는 소견서 발급이 불가하다고 했다. 정신질환이라는 게 소견서를 받기가 쉽지 않았다. 소견서를 잘 써주는 병원을 찾아가 검사를 받아볼 의욕도 에너지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정신이 불안한 상태로 11년의 직장 생활을 허무하게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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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은 그 사람의 삶에 필요하기에 겪는다”라는 말이 있다. 퇴사한 지 6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운명이 나를 도왔다고 생각한다. 우울증은 퇴사하자마자 깨끗이 나았고 바뀐 생활에 잘 적응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몸과 마음이 건강한 상태로 살고 있다. 바쁜 세상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다가 잠시 멈춰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커리어가 단절되었고 수입이 없지만 더 이상 불안하지 않다. 더 늦기 전에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마흔을 앞둔 나이, 누군가는 자아를 찾기에 늦은 나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자아는 평생을 거쳐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길을 찾아 더 빛나는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