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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차 Jun 13. 2022

사랑은 자꾸만 나를 어린아이로 만든다(3)

인육

진짜 X 같은데, 연애는 인육을 먹는 과정이더라.



헤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한 지인의 말이었다. 어떤 일도 한 번에 잘 되는 일은 없다. 연애 역시 마찬가지다. 한 번에 연애를 잘해나가는 사람은 드물다. 경험을 통해 나와 맞는 방식과 맞는 사람을 찾아가는 과정이 필수로 동반된다. 그러나 여타 다른 영역과는 달리 연애는 사람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다. 상대의 살을 취하고 내 살을 내어주어야 깨닫는 것들이 존재한다. 누군가에겐 비약이 심한 말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나 나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원래 이 글을 계획했던 건, 지난 연애를 돌이켜보며 나를 알고자 쓴 목적이 강했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고 이런 감정을 느끼고 이런 연애관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나를 알아야 내가 바라는 연애가 가능할 것 같아서였다. 슬프게도 1편을 쓸 때 위기가 찾아왔고, 2편을 쓸 땐 이별을 맞이한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쓰기로 했다. 내 연애와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아니까.







한 단어로 정의 내리기 어렵지만, 이별입니다. 그와 한 연애와 보낸 시간이 하나의 단어로 정리된다는 게 어렵다 느꼈다. 이별은 단순히 결과만을 말하는 단어니까. 내게 필요한 건, 지도에 찍은 종착지가 아닌 그동안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는 게 필요했다. 이 과정을 짚을 수 있었던 건 보호막을 치듯 내 주위에 있어준 지인들 덕택이었다.




내가 바쁜 사람만 만나는 건, 어쩌면 나를 봐주지 않는 상대의 모습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란 생각이 들더라. 




H와 술잔을 기울이며 한 말이었다. 물론 나는 자신의 영역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을 좋아한다. 내가 배울 점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가정사와 몇 번의 연애 끝에 이런 결론이 나왔다. 나를 봐주지 않는 데에서 오는 슬픔을 어쩔 수 없는 사유로 무력화시키고 싶어서였다고. 





나는 이혼 직전까지 간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아빠는 외출이 잦았고, 엄마는 일과 개인적 볼일로 집에 늦게 들어오는 편이었다. 어린 나는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기다림은 자연스레 습성이 되었다. 그리고 점차 생각의 기틀이 되었다. 바쁘시니까 나를 못 챙기는 거야. 바쁘시니까 나를 볼 수 없는 거야. 바쁘시니까 나를 할머니 댁에 두고 가신 거야. 나는 부모에게서 응당 받아야 할 관심과 양해, 이해 섞인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고 이해해야 했다. 






누군가 바쁜 일이 있을 때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차이가 있다. 전자는 기다리는 상대가 한번 더 상황을 이해하게 되고 상대에게서 들은 말로 기다림이 유지가 된다. 하지만 후자는 다르다. 기다리는 대상이 상대방의 상황을 '먼저' 생각해야 하고 스스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선 상대방의 이후를 기약하는 말, 미안한 음성이 없다. 상대와 기다리는 대상이 서로 감정을 얘기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없다. 기다려야 한다는 결과만 있을 뿐이다. 





연인 간에 필요한 역지사지? 좋다. 하지만 한쪽만 이해하는 관계만큼 쉽게 무너지는 사이가 또 있을까. 나를 이해하고 너를 이해하는 말들이 있었다면, 피를 흘리고 살을 주지 않고도 행복한 연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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