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 스토리] 영업글
(스포일러 주의?) 죽은 남자를 덮은 흰 침대보가 그대로 불쑥 솟아올라 생긴 이 귀신은 어찌 신통방통한 능력 하나도 없는지 느릿느릿 길을 되돌아 걸어가 자신이 그녀와 살던 집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혼자 남은 그녀가 슬픔을 견디는 것도 지켜보고, 괜찮아지는 것도 떠나는 것도 지켜보고, 여러 사람들이 그 집을 거쳐가고 마천루가 들어섰다가 사라지고 다시 수렵의 시대가 흘러가는 것도 지켜보고, 그렇게 가늠도 안 되는 시간이 동그랗게 흘러 다시 자신이 죽은 날로 되돌아올 때까지도 그 자리에 있는다. 그녀가 다시 한번 그 집을 떠나면서 벽틈에 숨겨놓은 메모를 꺼내보는 순간, 아, 그때서야(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풀썩 침대보가 땅으로 떨어지며 그도 떠난다. 이 고요하고 기묘한 영화는 죽어도 변치 않는 것이 있으리라는 낭만적 상상과 죽어도 날 잊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하는 잔혹한 소망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굳지 않은 시멘트에 발자국 찍기, 후미진 골목 벽에 낙서하기, 편지를 넣은 유리병을 바다에 내던지기, 분수나 연못에 동전 던지기, 또는 영화 속 인물처럼 이사하는 날 떠나는 집에 작은 메모를 숨겨놓기(담에 해봐야지). 때로는 장난스럽게, 때로는 간절하게 남겨진 흔적들은 시간이 흐르면 포크레인이 깨부숴서든 지각변동이 깨부숴서든 어떻게든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침대보를 뒤집어쓴 영혼인 그는 그런 물리적 힘이 어찌하지 못하는 흔적이다. 그는 그곳에 지독히도 오랜시간 머물고, 집요하게도 그녀의 메모를 꺼내보려 한다. 만겁의 시간이 윤회하고 마침내 다시 그녀가 찾아올 때까지, 그의 영혼은 기억을 고스란히 안은 채, 시간을 모조리 감당한 채, 자리를 지킨다. 그러니 얼마나 낭만적이고 잔혹한 이야기인가.
귀신 이야기 하나. 대부분의 학교가 괴담 하나쯤 갖고 있듯,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도 괴담이 있었다. 여자 귀신이 3층 복도를 떠돈다는 것이다. 나도 보았다. 그 괴담을 알게 되기 전의 일이었다. 야간자습시간에 졸릴 때면 종종 3층 복도로 올라가 창가에 서서 또는 어슬렁 걸어다니며 공부를 하곤 했다. 무섭게 들리지만, 조용하고 아늑해서 나 말고도 몇명쯤 있던 곳이었다. 어느날은 복도 한 쪽 끝에 나 혼자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뒤 복도 다른 쪽 끝에서 원피스를 입은 여자애가 공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 학교는 교복이 없는 곳이어서 원피스 입은 여자애를 보는 것이 드물지만(대부분 추리닝을 입었다) 이상하지는 않은 일이었다. 내가 그 애를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각기 다른 날에 그 애를 그곳에서 본 동급생들은 많았지만, 아무도 그 애를 알지 못했다. 후에 괴담을 알게 된 후 ‘어쩌면 그 애가..’ 했고, 무서웠고, 곧 잊었다. 그 애를 다시 떠올린 건 졸업하던 날이었다. 우리 학교는 오래 전 지하철 참사로 죽은 선배의 이름으로 졸업식마다 주어지는 장학금이 있었는데, 장학금 수여식을 보며 다시 그 애를 떠올렸다. 그 애가, 아니 그 언니가 이 언닌가보다 하고. 그 언니, 그곳에 계속 있을까.
귀신 이야기 둘. 벌써 칠팔년 전쯤인데, 사주를 보았을 때 일이다. 철학관 아저씨는 내게 귀신이 붙어있다 했다. 할머니와 엄마가 유산한 아이들이 집안의 장녀로 태어난 내게 붙어 있다는 거다. 그러니 나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그 애들 몫까지 같이 받지만, 대신 그 애들이 내게 붙어 살려 애쓰는 덕에 내가 굶거나 아주 힘든 일 없이 산다고 했다. 께름칙했다. 엄마는 할머니 때 유산은 부지기수였고, 그럴듯한 말을 해보려는 사주쟁이의 꾀라고 했다. 그런데 아주 가끔 스트레스를 받아 뒷골이 뻐근할 때면 그 귀신들을 떠올리며 원망하게 되고, 나쁜 일을 용케 피하게 됐을 때도 그 귀신을 슬그머니 떠올려보게 된다.
그러니 무언가가 있을 거다. 이런 낭만적이고 잔혹한 상상을 하게 된다. 나의 일부를 담은 채, 내가 경험하고도 잊어버리고 만 시간과 공간을 나 대신 간직한 채 있는 무언가. 그 무언가가 침대보를 뒤집어 쓴 모양새일지, 침대보가 꼬질꼬질해질 만큼 긴 시간 존재해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것은 내가 어떤 시공간에 두고 온 나, 내 전생이 남긴 나의 영혼, 잊은, 그래서 상기시키려고 애쓰는 기억, 물리적이지 않은 형태의 나. 벽에 어디서 반사되어온 것일지 모를 무지개빛이 어른거릴 때, 고요한 집안 어딘가에서 조그만 소리가 들릴 때, 가만 있는데 몸 어딘가가 간질거릴 때, 침대보를 뒤집어쓴 그(들)/나를 상상하게 될 것 같다.
영화가 끝나고 첫장면으로 돌아갔다.
When I was little, we used to move all the time,
I'd write these notes,
and I would fold them up really small...
and I would hide them in different places,
so that if I ever wanted to go back,
there'd be a piece of me there waiting.
- Did you ever go back?
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