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수련

2019년 1월 1주의 즐거움

by 썸머

여행과 출장을 겸하여 파리에 다녀왔다. 이미 두 번의 여행을 통해 주요 관광 코스는 다 밟아본 터라, 이번에는 조금 다른 공간들을 기대하며 갔다. 그러나 그 유명한 오랑주리 미술관의 그 유명한 모네 그림에서 이번 파리 여행의 보석 같은 순간을 맞이해버렸다면, 이번 여행도 너무 진부했던 걸려나.


오랑주리 미술관이 위치한 튈르리 정원의 겨울 정경은 황량했다. 반듯반듯하게 가지치기가 된 프랑스식 정원은 여름에는 빛을 발하지만 겨울에는 좀 볼품 없어지는 것 같다. 새파랗거나 노을진 겨울 하늘로 날렵하게 솟은 앙상한 나뭇가지는 내가 매우 좋아하는 겨울의 풍경이다. 그런데 겨울의 프랑스 정원 나무는 그 날렵함이 주는 매력은 없고 뼈대만 남은 건물을 보는 느낌이다.


정원을 지나 들어선 오랑주리 미술관은 오렌지 나무를 위한 온실이었다는 본래의 용도처럼 따스했다. 구입한 표도 예뻤다. 표를 수집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산뜻한 입장을 선사하는 것은 없다. (요즘 영화관에서 표 대용으로 발권해주는 영수증은 최악이다.) 인상주의 작품이 그려진 표를 소중하게 지갑에 챙겨두고 전시실에 들어섰다. 그러고 펼쳐진 황홀한 광경.


IMG_6820.JPG 폰카의 파노라마 기능을 사용하기 좋은 곳이다.


그저 예쁜 것을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간 곳이었는데 기대보다 훨씬 큰 감동을 받았다. 잠깐 벅차올라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가까이서 보아도, 멀리서 보아도 아름답다. 가까이 서서 들여다보면 형체를 알 수 없이 오롯이 색채의 나열로만 보이는데, 그 색이란 언어로 명명하는 것이 건방지게 느껴질 정도로 오묘하고 다채롭다. 한 발짝씩 뒤로 멀어질수록 보이지 않던 꽃잎이 나타나고, 수풀이 나타나고, 개구리로 보이는 것이 나타난다. 더 뒤로 물러서면 물의 일렁임과 깊이, 반사되어 부서지는 빛, 공기와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공간감이 나타난다. 그림의 한 모퉁이만 보고 있어도 보아야 할 것이 한가득이다. 종일 보고 있어도 즐거웠을 것이다.


모네는 죽기 전 삼십여년 동안 지베르니에 정착해 수련만 그렸다. 백내장을 앓고 있었기에 무언가를 볼 수 있는 모든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그 모든 순간은 즉각적으로 붓질로 옮겨져서 수백 여장의 서로 다른 수련을 만들어냈다. 그의 필채는 그가 보았던 세상의 색과 공기와 빛을 담고 있다. 다음 프랑스 여행 때는 그 세상을 직접 보러 지베르니에 간다면 또 진부한 관광 코스가 되어버릴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계란장과 감자조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