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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Aug 10. 2022

4화 : 강대국의 조건, 순조로운 왕위 계승

장의가 어렵사리 성사시킨 연횡 동맹이 붕괴하자, 진나라는 다시 동방제후국들의 공적이 되었다. 하지만 비록 동방제후국이 서로 합종 동맹을 맺어 진나라를 공격했지만, 아무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를 틈타 진나라는 감무甘茂를 보내 함곡관函谷關과 낙양 사이에 있는 한나라의 의양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런데 감무는 의양은 군사 요충지이기 때문에 함락에 많은 시간과 큰 노력이 들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이번에 의양을 함락을 하지 못하면 다른 대신들이 자신의 험담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진무왕은 감무에게 의양 공략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하더라도 소환해서 견책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감무가 의양을 공략한 지 5개월이 지났다. 저리자樗里子와 공손석公孫奭이 군사 행동이 길어지는 것을 비난했다. 진무왕은 감무를 소환했다. 감무는 진무왕에게 그들이 맹세한 자리가 저기에 있다고 말했다. 진무왕은 감무에게 대군을 주어 의양을 공략하게 했으며, 결국 함락하였다.


진무왕은 힘쓰는 놀이를 좋아하였고, 장사들에게 높은 벼슬을 주었다. 어느날 장사 맹열과 가마솥 들기 놀이를 하다가 온 몸의 기맥이 끊어져서 사망하였다. 진무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진나라 귀족들은 연燕나라에 인질로 간 배다른 동생 직稷을 진소양왕秦昭襄王으로 추대하였다. 


진소양왕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의 어머니 선태후宣太后의 일족이 권력을 장악했다. 이에 다른 대신들과 공자들이 내란을 기도했지만 모두 숙청당했다. 심지어 진혜왕의 아내인 혜문후惠文后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내부의 혼란을 진압한 진나라는 초나라에게 상용上庸의 땅을 돌려주어 동맹을 맺은 뒤 황하를 건너 위나라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나라, 한나라, 위나라는 합종 동맹을 배신한 초나라를 침공했다. 이에 진나라는 초나라에 구원군을 보내 제, 한, 위나라의 연합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머지않아 진나라와 초나라의 동맹도 파기되었다. 초나라의 태자가 진나라의 대신과 다투다가 살해하고 본국으로 도망가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진나라는 제, 한, 위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했다. 초나라는 대패했다. 


당시 진나라는 초나라를 계속 몰아붙여서 성 8개를 빼앗았다. 진소양왕은 초나라에 편지를 보내 다시 혼인 동맹을 맺자고 하면서, 이를 위해 진소양왕과 초회왕이 무관武關에서 회담을 가지자고 제안하였다. 비록 소수昭睢가 진나라는 신뢰할 수 없다면서 반대했지만, 초회왕은 기어코 무관으로 갔다. 하지만 진나라는 무관에 복병을 준비했고, 초회왕은 사로잡혀 진나라 수도 함양에 끌려갔다. 진나라는 동맹을 맺고 싶으면 무군巫郡과 검중黔中을 먼저 할양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초회왕은 이를 거부했고, 진나라를 떠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초나라의 대신들은 초회왕이 진나라에 억류되었을 뿐 아니라, 태자도 제나라에 인질로 간 작금의 난국에 대해서 토론하면서, 만에 하나 진나라와 제나라가 연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몇몇 대신들은 초나라에 있는 초회왕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를 초왕으로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다시 소수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리고 소수는 직접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초회왕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태자가 본국으로 돌아와 초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제민왕齊湣王은 신하들을 불러서 이에 대해 의논했다. 어떤 이는 태자를 돌려보내는 대신 회수 이북의 땅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제나라의 상은 태자를 초나라에 돌려보내야 하며, 그렇게 않으면 제나라가 불의하다는 악명이 천하에 나돌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태자를 초나라에 돌려보내지 않아서, 초나라가 자체적으로 왕을 옹립한다면, 제나라에 있는 초나라의 태자를 따로 초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했다. 이에 제민왕은 초나라의 태자를 그냥 돌려보내기로 했다.


새로 왕을 옹립한 초나라는 이 사실은 진나라에 알렸다. 진나라는 이에 분노해서 초나라로 쳐들어가 5만의 병사를 참살하고 16개의 성을 확보했다. 


그런데 초회왕이 마침 진나라에서 탈출하였다. 이를 알아챈 진나라는 초나라로 가는 길을 막았다. 이에 초회왕은 샛길을 통해 조나라로 향했다. 그러나 조나라는 초회왕을 받아주지 않았다. 초회왕은 어쩔 수 없이 위나라로 발길을 돌렸으나 추격해온 진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혔다. 일 년 후 초회왕은 진나라에서 병사했다. 초나라 사람들은 모두 초회왕을 가련하게 여겼으며 다른 제후왕들은 진나라가 정직하지 못함을 성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나라의 귀족들이 초회왕의 태자를 초왕으로 옹립하지 못했다면, 아래에서 다룰 조무령왕의 이야기처럼, 초나라는 내란에 빠져 진나라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더 큰 위험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조무령왕은 본디 초회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능한 군주였다.


우선 비의肥義와 함께 북방 유목민족의 복장과 기마술을 받아들여 군대를 강화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조나라 귀족들은 오랑캐의 습속을 받아들이는 꼴이라면서 반대했다. 하지만 조무령왕은 제나라 군대와 함께 조나라를 침공한 중산中山국에 대해서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면 북방 유목민족의 풍습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나라 귀족들을 설득했다. 조나라는 결국 중산국을 정벌하고, 서쪽으로는 다른 북방민족까지 공략하였다. 


조무령왕은 막내 아들인 공자하公子何를 너무나도 귀여워한 나머지 그에게 나라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스스로는 주부主父라고 칭하며 대代 지방으로 가서 북방 유목민족들을 계속 공략하였으며, 오늘날 감숙성 끝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중산국을 멸망하여 숙원을 풀었다. 


뿐만 아니라 조무령왕은 내몽골에서 섬서성 북부를 통해 진나라의 수도 함양까지 몰래 들어와서 그곳의 형세와 진나라 왕의 사람됨까지 파악하고 돌아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조무령왕 말년에 후계자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조무령왕은 비록 막내아들 공자하公子何를 후계자로 삼았지만, 원래 태자였던 장자인 공자장公子章을 딱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는 공자장이 공자하에게 신하의 예를 올리면서 고개를 조아리자, 조무령왕은 공자장을 불쌍하게 여겨 그를 왕으로 임명하려고 했었으나,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장은 대代 지역에 봉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 


한편, 조무령왕의 다른 아들인 공자성公子成과 신하 이열李兑은 공자장이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그가 일으킬 변고에 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조무령왕이 사구涉丘로 순시를 떠난 틈을 노려, 공자장은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을 순조롭게 장악하는가 했지만, 곧 공자성과 이열이 네 군데의 읍에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공자장은 구사일생으로 탈출해서 조무령왕이 있는 사구로 갔다.


공자성과 이열은 사구를 포위했다. 그 와중에 공자장은 죽었지만, 공자성은 사구의 포위를 풀지 않았다. 만약에 포위를 풀었다가는 반역죄로 주살당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사구에 식량이 떨어졌다. 조무령왕은 사구에서 탈출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새들이 물고 다니는 곡식 낱알을 주워먹다가 3개월 후 굶어죽었다. 


요컨대, 조무령왕은 장자상속이라는 공인된 왕위계승법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다른 왕위계승권자들이 각자 병력을 양성하는 것을 방임했기 때문에, 결국 사구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반면에 진나라는 선태후의 일족이 권력을 확보하자마자 왕위계승권자들을 모두 숙청해서 조나라처럼 내란에 빠질 위험을 미연에 차단했다. 그리고 보다 강성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내란의 후유증에 빠진 조나라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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