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하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가 되어 5

핑야오고성 : 옛 상업 도시의 영화가 보존된 곳

by 화목란 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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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요(핑야오)[平遙] 고성은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산서山西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핑야오 고성의 모든 지역이 관광지로 개발된 것이 아니며, 외각은 평범한 주거지에 불과하다. 그래서 핑야오 고성 안으로 들어갈 때 입장료를 낼 필요가 없고, 아래 지도의 빨간 점으로 표시된 박물관이나 옛 표국들에서만 관람료를 내면 된다. 만약에 성 외각이나 성 밖에 숙소를 예약하면 핑야오 고성 안 깊숙히 문화재들을 관람하기 위해 꽤 긴 거리를 걸어와야 한다. 물론 작은 셔틀버스(?) 같은 것이 운행하기는 하는데, 그거 탈려고 아굼박질하며 줄을 서느니 차라리 성 중심지에 있는 숙소에서 머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성 중심에서 약간 남쪽에있는 핑야오현아[平遙縣衙] 바로 옆에 있는 유스호스텔에서 머물렀다. 여기도 관광객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기는 하지만, 번화가 중심은 아닌지라 저녁에는 조용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유스호스텔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핑야오에 있는 다른 문화재들을 구경하러 갈 때 탈 버스를 수배해주기도 한다. 물론 싼 게 비지떡이라고 도미토리에서 숙박할 경우 한 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다는 것이 단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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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먼저 숙소 옆에 있는 핑야오 현아를 구경하러 갔다. 핑야오 현아는 핑야오 고성에서 가장 큰 문화재이다. 핑야오 여행 동선을 짤 때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봄망아지처럼 체력이 남아 돌 때 가장 넓은 곳을 관람해야지, 저녁 가까이 되어 턱에 숨이 차기 시작할 때 둘러본다면 저번에 내가 개봉부 처마에서 쿨쿨 잤던 것과 같은 일이 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침에 가야 사람도 적다. 핑야오 현아에 비하여 핑야오 고성 안에 있는 표국이나 다른 상인들 저택은 이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다. 아래 사진처럼 넓은 뜰은 오직 여기에서만 볼 수 있다. 청대 관리의 권력이 어느 정도 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참 아침 식사는 어디가나 바가지에 맛이 그저그러니 아무거나 먹으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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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야오 고성 현아에서 가장 볼 만 한 곳은 형조刑曹와 그 옆에 붙어있는 감옥이다. 형조는 청대 지방 사법 제도와 고문 기구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변해 있었다. 능지처참이나 거열형 등을 어떻게 거행했는지에 대한 설명과 그림들, 혹은 흐린 사진들이 빛 바랜 액자 속에 끼워져 있었다. 그렇게 처벌받거나 고문받은 죄수들이 같형 있었던 감옥은 한 낮에도 상당히 어두웠다. 그래도 북중국의 겨울이 매섭기 때문일까 온돌이 각 감방에 하나씩 설치되어 있었다. 죄인의 팔다리를 부숴버리는 것을 아무렇게 생각하지도 않은 관리들이 죄수들이 얼어죽지 않도록 설비를 갖추어두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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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 구석탱이에는 하급 관원들이 경극을 구경했을 법한 무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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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 입구 근처에 서있는 종루를 올라가면 근처 전경이 다 훤히 보인다. 아직 아침이라 사람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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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야오 고성은 산서 상인들, 특히 표국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치안이 좋고, 교통이 발달한 지금이야 화물을 운반할 때 물품에 손상이 가지 않은 상태로 제 시간에 배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옛날에는 화물을 운송하는 이들은 도적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특히 금과 은처럼 귀중품들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이에 무술의 고수들이 모여 표국이라고 불리는 귀중품들을 운반하는 회사를 세웠다. 비록 무협지에서 표국은 거의 항상 악당들에게 당하는 엑스트라로만 묘사되지만, 현실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무림의 고수들이 모인 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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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 있는 다른 표국에도 함 들어가 봤다. 뒤에 한 30평 남짓 되는 작은 공터가 있는데, 표사들이 무술을 연습했던 연무장처럼 보였다. 바닥에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니 팔괘장을 연습한 곳이 아닐까 추측된다. 옆에 벽돌로 포장되어 있지 않은 곳에는 석제 아령이 있다. 중국 무술도 근력 훈련을 중요시했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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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물 운송은 목숨을 걸고 일을 하는 위험한 직업이기 때문에 여러 규칙이 필요했다. 신장 개업한 점포나, 주인이 자주 바뀌는 점포, 창기들이 있는 점포는 좋지 못하다고 한다. 또한 무기와 옷가지, 그리고 마차를 곁에서 떼어놓지 말라고는 규칙도 있다. 신발을 수선해도 되고, 이발을 해도 되는데, 세수는 하지 말라는 규칙도 있었다. 건조한 기후에서 거친 바람을 맞으며 다녀야 하기 때문에 피부 보호를 위해 필요한 규칙이었을 것이다. 사실 북중국에서는 화물을 운반하는 표사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잘 씻지 않았을 것이다. 십 년 전 서안에서 중국어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때에도 남녀노소, 심지어 아리따운 아가씨도 머리에 하얗게 눈이 쌓인 채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었다. 사실 북중국에서 오래 여행하다 보면 이게 당연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특히 매일 샤워하다가 결국 피부가 상해서 간지러워 벅벅 피가 나올 정도로 긁어 보게 되면 말이다. 바디로션이고 뭐고 덕지덕지 발라도 소용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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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들린 곳은 지금으로 치면 은행이라고 할 수 있는 옛 전장錢莊이다. 입구부터 뭔가 삐까뻔쩍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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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 뒤에는 지하금고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돈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옛날이라면 횃불이 빛을 밝히고 있을 법한 곳에서 형광등이 빛나고 있다. 지하금고에는 지상의 움집과 똑같은 구조로 만든 경비원이 상주하는 곳도 있었으며, 곳곳에 설치된 화려한 장식물은 전장의 주인이 이곳을 수시로 직접 챙겼을 것이라고 짐작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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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들처럼 규모가 어마무시한 금고가 있는가 하면, 영세업체의 금고는 말그래도 토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금고가 바로 입구 근처에 있다. 아마도 이 전장의 주인은 도둑들이 이렇게 접근하기 쉬운 곳에 설마 금고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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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야오 고성 어딘가에 있는 상인의 집이다. 산서 상인들은 중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장사능력을 갖춘 것으로 유명하다. 산서지방의 찬 기후와 척박한 땅에서는 설사 농사를 지을 수는 있어도 강남지역이나 동남아처럼 풍부한 작물을 획득하기는 어렵다. 아래의 사진에 찍힌 항아리가 보여주듯이 부유한 상인이라도 빗물을 미리 받아두어야 할 정도로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부존된 많은 광물 자원들을 활용해서 일찍이 수공업을 발달시킬 수 있었으며, 일부 산서 상인은 명을 향해 진공하는 후금에게 물자를 공급해주면서 상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만주가 중국을 통일하고 청왕조를 세우면서 중원과 몽골 사이의 교역이 급증하였는데, 산서성은 하남, 섬서, 하북에서 몽골로 이어진 교통로들의 교차로 격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물류 산업이 발달하였으며, 더욱이 미 청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산서 상인들에게 이는 막대한 부를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혹자는 당시 산서상인의 번영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메디치 가문의 그것에 버금간다고 했다. 하지만 핑야오 고성에 있는 상인의 저택들은 화려하기는 했지만 강남의 정원과 저택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정말로 산서상인이 세계경제사에서 손꼽힐 정도로 부유했을까? 이러한 의심은 다음날 둘러본 왕가네 저택[王家大院]에서 티끌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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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야오고성 동쪽에는 성황묘城隍廟가 있다. 핑야오현아가 널찍널찍한 느낌을 준다면, 성황묘는 높고 화려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성황묘에서 가장 특이했던 것은 경극 무대가 두 군데나 있다는 점이다. 축제 때 경극을 관람하러 도성안의 백성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무대 하나로는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으니까 하나를 증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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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묘 맞은 편에 있는 문묘文廟는 현아에 버금갈 정도로 크며, 성황묘만큼 화려하다. 지금도 노량진 등 수험생들이 밀집해서 거주하는 동네에 오락시설이 바글바글한 것처럼, 옛날 핑야오 고성에도 유가의 성인들과 과거 합격자들의 발자취를 간직한 문묘와 축제 장소로 활용된 성황묘가 얼굴을 맞대고 있다니, 예나 지금이나 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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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 한 구석에는 핑야오 출신의 과거 합격자들과 관련된 비석들과, 그들이 공부했었던 책상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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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를 둘러보자 해가 어느덧 뉘엿뉘엿 서산에 걸리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걸어 다리가 부어오르기 시작한 다리를 질질 끌며 핑야오고성의 전경을 구경하러 성벽에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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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핑야오 고성 안의 건축물들의 높이가 서로 다른 것을 발견했다. 성 외곽의 허름한 집들은 1층짜리에 불과했지만, 넓은 대로 근처에 있는 번화한 건물들은 2층 혹은 3층짜리도 있었다.


산서지방을 여행하면서 한국과 자연조건이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국토의 70%가 척박한 산지인데다가 반도인 덕분에 대륙과 해양 사이의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북쪽에는 풍부한 지하지원이 있기 때문에, 농업보다는 상공업이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려 말부터 본격적으로 수입된 성리학과 중농주의 때문에 이러한 자연 조건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성리학과 중농주의는 당시 중국에서 가장 발전된 정치, 경제 이론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지금의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이론과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당대를 선도하는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지역의 조건들과 맞지 않는다면 큰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유학때문에 조선의 경제 발전이 더뎌졌다고 지적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현재 한국에서 유행하는 서구의 최신 주류 경제학이나 정치 이론 등도 꼼꼼하게 다시 따져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적어도 저 이론들이 탄생한 배경과 발전된 맥락을 정확하게 이해한 뒤 그것들이 한국의 고유한 조건들에 부합하는지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사실 어떤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다양한 원인들을 탐구하는 학자로서 나는 만유 인력이나 상대성 이론처럼 수 많은 사건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설명하려는 거대 이론을 세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다만 그 이론을 가리켜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경향성과 확률이라고만 하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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