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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Dec 27. 2018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인육을 먹은 까닭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누가 더 쎈지 겨루는 소년만화가 아니었다. 

<창천항로>, <화봉요원>, 그리고 <용랑전>(?) 등 <삼국지>를 다시 그려낸 작품들의 공통점은 웬만한 유명한 등장 인물들을 죄다 유능하게 그렸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화봉요원>의 여포로, 여기에서는 무공 뿐만 아니라 지략마저도 제갈량을 뺨친다. 저 여포를 속이기 위해서 조조와 모사들은 온갖 계략을 짜낸다. 적벽대전의 화공 역시 서로 속고 속이는 끝에 이루어졌다. 마치 소년만화의 공식을 따르는 듯 하다. <드래곤 볼>에서 피콜로를 쓰러뜨리니, 사이어인이 나오고, 사이어인은 알고보면 프리더의 졸개에 지나지 않았으며, 프리더는 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도식 말이다. 이렇게 <삼국지연의>가 소년 만화로 재탄생되면서 한 가지 문제점이 발생했다. 바로 각 등장 인물들의 개성이 말살되었다는 점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원문을 일독하니 역시 2차 창작은 원본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한 멸망의 효시를 쏘아올린 황건적의 난은, 당시 사회 모순의 격화 인해 발생했다. “창천蒼天이 죽었으니, 황천黃天이 일어날 것이다.” 황건적의 두령, 장각의 이 선언을 많은 백성들이 공감했다는 사실은 후한 정부에게 더이상 산적한 사회 문제를 해결할 기대를 가지지 않았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지연의> 초중반에서는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후한 정부에 충성을 다하다가 죽는 모습이 많이 나온다. 이는 후한 시대에 가장 중시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명예였음을 반영한다. 예컨대 원소가 비록 명문가의 후예이기는 하지만, 소싯적에 낙양에 은거하면서 협행을 실천하여 명성을 얻지 않았다면 정치적 영향력이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비 역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의병을 일으킨다. 어차피 황건적 진압군에 징병되어 병사 A로 죽을 바에야 차라리 장비의 사재를 털어 의병이 되어 공적을 세운다면 벼슬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을 것이다. 황건적의 난이 끝나고, 유비는 안희현위安喜縣尉를 제수받는다. 현위는 현의 군사를 총괄하는 직책으로 우리로 치면 비정규직이 군수가 된 것과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하비승下邳丞, 즉 하비현령의 부관이었던 손견도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데 참여하여 별군사마別郡司馬로 승진한다. 어쩌면 나관중이 <삼국지연의>의 1장을 유비의 도원결의를 서술하고, 바로 2장에 손견이 유비를 구원하는 장면을 묘사한 까닭도 역시 저 두 사람의 공통점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존의 문벌 세력들이 난세를 틈타 출세하는 비천한 출신들을 고깝게 볼 리가 없다. 하다못해 서쪽 끝 서량에서 이민족을 방어하는 문지기 노릇 하던 동탁도 유비를 무시하는데 말이다.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유비가 훗날 평원상이 되었는데, 그 동네 사람들이 유비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러워 해서 암살 시도까지 했었다. 이에 나관중은 신흥 세력인 유비와 손견에 맞서는 옛 문벌의 대표로 원술을 등장시킨다.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열일곱 제후들이 모이고, 손견이 선봉이 되어 낙양으로 진격한다. 손견은 처음에는 거듭 전공을 세우지만, 그가 장차 큰 세력으로 발돋움할 것을 두려워한 원술이 군량 보급을 중지해서 결국 화웅에게 패배한다. 물론 이는 정사 <삼국지>에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원술이 동탁토벌전에서 유비를 무시했다는 일화는 창작이다. 여러 제후들의 장수가 화웅에게 계속 단칼에 살해당하면서 위기감이 고조된다. 이에 마지막으로 왕년의 지명수배자였던 관우는 덥힌 술이 식기도 전에 화웅의 목을 베겠다고 하며 나간다. 이에 원술은 “현령의 소졸이 어떻게 여기에서 무위를 높이 드러낼 수 있느냐”라며 화를 낸다. 권세만 있지만 무능한 이들이 연전연패하는 순간 혜성처럼 무명소졸이 난국을 타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을 먹는 전형적인 서사이다. 그러나 독자의 감정을 고양시키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훗날 원술이 서주를 지배하고 있던 유비를 공격하면서 그의 출신을 거론한 것을 보면 나관중이 <삼국지연의> 에서 원술이라는 인물을 활용한 맥락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다. 


<삼국지연의> 1장과 2장에서 의리와 명예의 화신으로 유비와 손견이 등장했다면, 3장과 4장에서는 바로 여포가 의부 정원을 배신하고, 조조가 아버지의 친우 여백사를 살해한다. 명확히 대비되는 포석이다. 한낱 이름 없는 선비들도 후한 조정에게 충성을 맹세하다 동탁에게 갈려죽지만, 반면에 삼국지 세계관에서 가장 뛰어난 무력을 지닌 여포는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가리지 않는다. 여포는 초선을 차지하기 위해 동탁을 살해한다. 훗날 정처없는 떠돌이 신세로 유비에게 의탁해서 소패에 잠시 머물지만, 뒷통수를 때리고 서주를 차지한다. 유비와 연합을 맺은 조조가 서주로 진격해오자, 여포의 제일가는 모사인 진궁은 조조군을 소관蕭關에서 저지하려고 했다. 그런데 진등이 여포에게 본진을 서주에서 하비로 옮기도록 권유하고, 거짓정보를 흘려 여포와 진궁부대가 서로 싸우게 만든 뒤, 조조군을 이끌고 서주의 각 성을 점령하게 도왔다. 하루 사이에 여포는 조조와 유비군에 포위되고, 결국 구사일생으로 하비로 탈출한다. 조조와 여포의 승부는 여기서 갈렸다. 만약에 진등이 여포를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조조가 과연 저리 쉬이 여포군을 공략할 수 있었을까. 하물며 북쪽에서는 원소가 남쪽에서는 원술이 호시탐탐 허도를 노리는 참인데 말이다. 하비에서 고립된 여포에게 진궁은 조조군의 군량선을 끊자는 계책을 내놓았지만, 마누라 엄씨와 초선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원술과의 혼인 동맹도 결렬되면서, 결국휘하 장수 위속, 송헌, 후성에게 포박당해 조조에게 건네지게 된다. 요컨대, 배신으로 흥한 자, 배신으로 망했다. 나관중에게는 당대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는 장수도 실은 범인에 불과했다. 반면에 <삼국지연의>에서는 설사 무능하더라도 의리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조연들이 참 많이 나온다. 이는 동아시아 문화에서 일종의 클리셰가 되었으며, 이는 저 유명한 홍콩 영화 <영웅본색> 의 주제로도 활용된다. 


나관중판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 등장 이전에 계략을 펼쳐 전투를 수행한 인물은 조조일 것이다. 저 유명한 조조의 모사들, 순욱, 순유, 곽가 등은 대개 조조가 세운 계략을 검토하는 일에만 그치거나, 보조하는 역할에만 그쳤다. 조조 이외의 장수들끼리 전투를 벌이는 장면은 대략, “A와 B가 싸웠다. A가 B를 압도했다. B가 퇴각했다.”라는 식의 건조한 설명 밖에 없다. 심지어 조조가 직접 참전한 전투도 종종 저렇게 그려졌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창천항로>에서 조조가 황건적 잔당들을 흡수해서 청주병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이 꽤 처절하게 묘사되었다. 그런데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이에 대해 딸랑 한 줄 밖에 서술하지 않았다. 기실 조조의 중원 제패는 지난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조조는 동의 여포, 서의 마등, 북의 원소, 남의 원술, 유표에게 포위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조조가 여포를 쓰러뜨렸지만, 서주를 다시 유비가 차지했기 때문에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유비가 헌제와 동승의 조조 암살 모의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발각된다. 이에 조조는 유비를 공략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유비는 원소에게 구원을 청한다. 원소의 모사 전풍말대로 조조의 본거지인 허도가 비었기 때문에 원소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원소는 자신의 다섯째 아들이 중병에 걸려 외부 일에 신경 쓸 수 없다는 핑계로 전풍의 간언을 물리친다. 훗날 원소가 관도에서 조조와 대치했을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원소의 모사 허유가 조조가 군량을 독촉하는 편지를 중간에서 가로채서 조조의 전 병력이 관도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에 허유는 원소에게 텅 빈 허도를 기습하고, 한 편으로는 조조의 군량이 다 소모되었을 때를 기다려 진군해서 협공하자는 계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원소는 그의 또다른 모사 심배에게서 허유가 예전에 뇌물을 받았다는 적이 있었다는 편지를 받고는 허유를 호통쳐서 쫓아낸다. <삼국지> 전체에 걸쳐 간언을 가납하지 않아서 낭패를 본 이들이 부지기수이지만, 그 중의 제일은 아마 원소일 것이다. 왜냐하면 조조를 패망시킬 기회와 국력을 허망하게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즉, 원소는 어리석은데다가 인재도 활용할 줄 모르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반면에 조조는 본인이 가장 군재에 밝은 인물임과 동시에 다른 유능한 이들을 탐욕스러울 정도로 초빙해서 적재적소에 배치하였다. 물론 가끔 자만심에 빠져 죽을 뻔 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말이다. 


조조가 원소를 멸망시킨 뒤, 서사의 중심은 조조와 유비의 대립으로 옮겨간다. 유비는 인자한 군주의 전형이다. 도겸에게서 서주를 받을 때도 몇 번 씩 사양했다. 유비가 조조의 침공을 피해 서주에서 형주로 남하할 때도 끝내 백성들을 데리고 내려온다. 그리고 유표가 임종에 이르러 형주를 넘겨준다는 것도 한사코 거절해서 결국 조조에게 강동을 정벌할 교두보로 넘겨주기까지 한다. 어찌보면 참 한심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적벽대전의 승리를 발판으로 형주와 파촉을 손에 넣는다. 하지만 관우가 조조와 여몽의 협공으로 인해 전사하자 유비의 눈은 뒤집힌다. 인자함을 택할 것이냐 의리를 택할 것이냐. 이는 중국철학사에서 가장 주요한 담론 가운데 하나인 공과 사에 관한 논쟁을 반영한 일화이다. 공자는 아버지가 양을 훔쳤다고 하더라도 이를 숨겨주는 일이 비도덕적이지 않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의형제의 전사를 복수하기 위해서 아무 실익도 없는 전쟁을 일으켜 죄없는 백성들을 사지로 모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가? 천지의 기운과 인간 만사를 꿰뚫어 보는 제갈량도 반대했는데 말이다. 결국 유비는 스스로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했고, 수십만의 촉군은 이릉에서 화공에 몰살당한다. 오늘날 우리는 공리주의를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유비의 행위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억울한 일을 당해도 사적 복수가 법적으로 금지되는 것을 악용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간단한 일화로 치부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유비는 정의와 덕망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어느날 유비는 여포에게 패하고 허허벌판을 헤매다 사냥꾼의 집에 하루 묵었다. 그런데 사냥꾼은 유비가 허기에 지친 것을 보고 자신의 마누라를 죽여 그 인육을 대접한다. 비록 이는 유비의 덕망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보여주는 삽화이기도 하다. 


조조에게 쫓기던 유비는 융중에서 제갈량을 삼고초려 끝에 영입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제갈량의 등장 전후로 나관중판 <삼국지연의>의 전투 묘사가 완전히 뒤바뀐다. 제천대성 손오공을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노는 관세음보살처럼 적의 심리를 읽어 승리를 이끄는 것은 기본이고, 하늘의 기운도 조절해서 적벽에서 동남풍을 불게하여 조조군을 화마에 휩싸이게 만들며, 심지어 미래를 예측해서 육손을 팔진도에 가두거나, 등애가 음평에서 험준한 산길을 개척해서 촉을 공략할 것을 예견한다. 물론 제갈량의 맞수로 사마의가 거론되지만, 그 역시 진법 대결하다가 처절하게 박살난 뒤, 오로지 수비로만 일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위나라 정벌에 실패한다. 가정에서 마속이 등산을 하지 않았다면, 유선이 황호의 꾀임에 빠져 기산을 장악한 제갈량을 불러들이지 않았다면, 장안은 몇 번 함락하고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제갈량도 마속과 황호가 제갈량의 북벌에 백태클을 걸어버릴 것이라는 징조를 홀시하면서 그의 염원은 실패로 돌아갔다. 어쩌면, 제갈량이 유비의 유언대로 유선대신 촉나라의 황제가 되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제갈량은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이라도 사업에서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실 세간에서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사업에 성공해야, 혹은 털끝 만큼의 실수도 없어야 비로소 유능한 인물이라고 칭송한다. 어쩌면 제갈량도 북벌에 실패했기 때문에 무능한 자라는 낙인이 찍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는 단순한 군담소설이 아니다. 주요 등장 인물들은 의리, 배신 등의 주제들을 대변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복합적인 성격은 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이 작품이 중국의 4대 기서라고 불리며, 현재까지도 다양한 형태도 각색되어 널리 읽힌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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