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면의 <진한사> 번역 프로젝트
항우項羽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서초패왕西楚霸王으로서 다른 제후왕들을 분봉하였다. 하지만 제나라에서 항우와 신경전을 벌였었던 전영田榮은 봉지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이 보좌하던 제왕齊王 전시田市를 제나라의 하위 행정 구역인 교동膠東으로 이주시켜 그곳의 왕으로 봉하고, 항우를 따라 진나라로 진입했던 장수 전도田都를 제왕으로 봉했다. 전영은 항우가 제왕 전시를 교동으로 이주시키고 새로 전도를 제왕으로 세웠다는 것을 듣고 크게 분노했다. 이에 제왕 전시를 교동을 보내지 않고 반란을 일으켜 전도를 맞아 공격했다. 전도는 초나라로 도망갔다. 그런데 전시도 항우를 두려워 했기 때문에 오히려 교동으로 도망쳐 취임했다. 전영은 노하여 전시를 추격하여 즉묵即墨에서 죽였다. 이 일로 인해 전영은 스스로 제왕이 되었으며, 서쪽으로 제북왕濟北王 전안田安을 공격해서 셋으로 나뉜 제나라 지방을 하나로 통일했다.
한편, 창읍昌邑 사람으로 팽월彭越이라는 자가 있었다. 일찍이 거야택鉅野澤에서 물고기를 잡으면서 도적질을 하고 있었다. 진승陳勝과 항량項梁이 기의한 지 일 년 남짓이 되었을 때 거야택에 어린 부랑자들이 백 여 명 모였고, 팽월은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 후 제후들의 흩어진 병졸들을 수습하면서 거야택에 머물렀는데 그 무리가 만 여 명이나 되었지만 소속된 바가 없었다.전영은 팽월에게 장군의 인수를 주면서 양梁나라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라고 명령했다. 이 때 조趙나라에서 진여陳余가 제왕에게 병력을 요청했으다. 제나라는 진여와 함께 장이張耳의 근거지인 상산常山을 공격해서 대파하였다. 장이는 한漢나라로 도망쳐 귀순하였고, 진여는 대代 지방에서 옛 조왕趙王인 헐歇을 맞이하여 조나라로 돌아왔다. 이에 조왕은 진여를 대왕代王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조나라에 머물면서 자신을 보좌하게 하였다.
한편 제후들이 초왕을 보좌하기로 결정했지만, 유방劉邦은 항우를 공격하고 싶었으며, 관영灌嬰과 번쾌도 모두 권했다. 하지만 소하의 간언으로 그만두었고, 그를 승상으로 삼았다. 항우는 병사 삼 만 명으로 하여금 유방을 따르게 시켰다. 초나라와 제후들의 휘하에서도 유방을 존경해서 따라오는 이들이 수 만 명이나 되었다. 장량은 한韓나라 지방으로 돌아가겠다고 작별인사를 올렸으며, 유방은 포중褒中까지 배웅했다.장량은 이에 유방에게 잔도棧道를 불살라 끊어버리라고 설득했다. 이는 제후들이 간교한 병법으로 습격하는 일을 방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항우에게도 동쪽으로 진군하겠다는 뜻이 없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유방이 정말 동쪽으로 진군을 하려 했다면, 흔쾌히 스스로 잔도를 끊으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유방이 아직 반란을 일으킬 의사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유방이 남정南鄭에 도착하자, 여러 장수들과 사졸들 모두 동쪽으로 돌아갈 생각이 담긴 노래만 불렀으며, 많은 수가 도망쳐 돌아갔다. 한신韓信도 군량을 관리하는 치속도위治粟都尉의 지위에 있었지만 도망갔다. 이에 소하가 한신을 쫓아가 돌아오게 한 뒤 유방에게 천거했다. 유방은 한신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계책을 물었다. 한신이 대답했다.
“이졸吏卒들은 거의 모두 산동山東 사람이기 때문에 밤낮으로 발꿈치를 든 채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선봉으로 활용한다면 큰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천하가 이미 평정되어 백성들은 모두 스스로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으니 다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계책을 세워 동쪽으로 향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리고 장한章邯등 지금 삼진三秦의 왕은 진나라의 장수로서 몇 해 동안 진나라의 자제들을 지휘했으며, 휘하에서 죽고 실종된 이들이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무리들을 속여 제후에게 항복했습니다. 게다가 신안에 이르자, 항우가 음모를 꾸며 진나라의 항복한 병졸들 이십 여 만명을 묻어버렸습니다. 따라서 진나라의 부형들은 이 세 사람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습니다. 하지만 지금 초나라가 억지로 이 세 사람들을 위협해서 왕으로 삼았으니 진나라 백성들 가운데 복종하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어찌 항우가 알지 못하고, 이 세 명을 왕으로 삼아 유방이 밖으로 나올 길을 차단할 수 있다고 말했겠는가? 과연 이 때 유방의 위협이 제나라 전영보다 심했기 때문에 굳이 방어해야 했겠는가?
5월, 유방은 장한章邯이 다스리던 옹雍 지방을 습격해서 평정하였다. 8월 새왕塞王 사마흔司馬欣과 적왕翟王 동예董翳가 모두 항복하였다. 이에 항우는 옛 오현吳縣의 현령縣令인 정창鄭昌을 한왕韓王으로 세우고 유방을 방어하도록 시켰다. 그리고 소공각蕭公角에게 명령해서 팽월을 공격하게 시켰지만 패배했다. 당시 장량張良이 한韓나라 지방을 순행하면서 항우에게 편지를 보냈다.
“한漢나라는 관중을 얻고자 할 뿐입니다. 관중지방을 먼저 차지한 유방에게 넘긴다는 맹약이 지켜진다면 멈출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제나라도 답장을 항우에게 보냈다.
“제나라는 조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
이에 역사서에서는 항우가 서쪽의 일을 고민하기 보다는 북으로 제나라를 공격했다고 서술하였다. 유방이 관중으로 다시 진입했으나 즉시 대국을 동요시킬 수는 없었다. 제나라가 양나라와 조나라를 끌어 안고 반란을 일으킨 것과는 사정이 달랐다. 한漢나라를 풀어주고 제나라를 공격한 것은 당시 전쟁의 형세 때문에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지 반드시 장량의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다.
한고조漢高祖 2년, 10월, 유방이 섬陕으로 갔다.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이 항복했다. 한韓나라 태위太尉 한신韓信(조나라와 제나라를 정벌하여 항우 몰락에 기여를 했던 한신韓信과는 다른 인물이다.)으로 하여금 한韓나라를 공격시켰다. 한왕韓王 정창이 항복하였다. 11월, 한신을 한왕으로 세웠다. 유방은 돌아가서 악양櫟陽을 도읍으로 정했다. 봄, 정월(당시 10월이 1년의 시작이었기 때문에, 한고조 3년 정월이 아니라 2년 정월이다) 항우는 전영을 성양城陽에서 공격해서 패퇴시켰다. 전영은 평원平原으로 도망갔으며, 평원의 백성들이 그를 죽였다. 제나라는 모두 초나라에게 항복했다. 초나라는 북상해서 제나라의 성곽과 가옥을 모두 불태워 하나도 남기지 않았고 항복한 병사들은 모두 매장했으며, 그들의 노약자나 부녀들을 노예로 잡았다. 제군齊郡에서 북해군北海郡까지 경략하면서 많은 곳을 훼멸하였다. 이에 제나라 사람들은 서로 모여 반란을 일으켰다.
3월, 유방은 직접 임진臨晉에서 황하를 건넜다. 위왕 표는 항복했다. 유방은 병력을 이끌고 하내지방으로 내려와서 은왕 사마왕을 포로로 잡고 낙양에 도착했다. 신성新城의 삼로인 동공董公이 길을 막고 유방을 설득해서 의제를 위해 상喪을 발하게 했으며, 사자를 보내 제후들에게 알리게 했다.
“천하가 함께 의제를 옹립해서 북쪽을 바라보며 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항우가 의제를 강남으로 추방한 뒤 살해했습니다. 대역무도합니다. 이에 과인은 관중의 병력을 전부 동원하고, 삼하三河(오늘날 하남성 일대)지방의 무사들을 수습해서, 남쪽으로 장강과 한수漢水아래로 배를 타고 이동해서, 여러 제후왕들을 따라 초나라에서 의제를 살해한 자를 공격하기를 원합니다.”
(한수는 장강의 가장 큰 지류이다. 섬서성 한중시에서 발원하여 남동쪽으로 흘러 호북성 무한武漢에서 장강과 합류한다. 그리고 무한에서 다시 장강을 따라 내려가면 남경, 즉 당시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彭城 남쪽에 도착한다. 이는 당시 섬서, 사천성에 근거지를 둔 유방이 서쪽으로 진군할 때 선택할 수 있는 경로 중 하나였다. 그러나 본문에 따르면 이미 유방이 낙양까지 진군했으므로, 육로로 따라서 남하해서 하남성 남양시에 도착한 뒤, 다시 한수를 따라 남하하는 전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4월, 전영의 동생, 전황이 수 만 명의 병력을 수습하여 성양에서 반기를 들었으며,전영의 아들 전광田廣을 제왕으로 옹립했다. 항우는 비록 유방이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미 제나라를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격파하고 나중에 유방을 공격하고 싶었다. 그래서 유방은 다섯 제후의 병력을 겁박하여 확보할 수 있었고, 56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초나라를 토벌하러 나섰다. 외황外黃에 이르자 팽월은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유방에게 귀순했다. 유방은 팽월은 위나라의 상국으로 삼았으며, 양나라 땅(위나라의 다른 이름 : 역주)을 평정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유방은 바로 팽성에 진입해서, 항우의 미인들과 보화와 재물들을 거두었으며,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항우는 이를 듣고, 휘하 장수에게 명령하여 제나라를 공격하게 시켰으며, 자신은 정병 3만 명을 데리고 남하했다. 우선 노魯나라 지방에서 호릉胡陵으로 나온 뒤, 다시 소蕭에서 새벽에 유방군을 공격했으며, 동쪽으로 나아가 팽성에 도착했다. 낮에 유방군을 대파했다. 유방의 군대는 모두 도망치거나, 근처 곡수穀水와 사수泗水로 몰려들었으며, 십여 만 명의 병력이 몰살당했다.한나라 병사들은 모두 남쪽의 산으로 도망갔고, 초나라 군대도 이를 추격하였으며, 영벽靈璧동쪽의 수수睢水에 이르렀다. 한나라 군대는 퇴각하려고 했지만, 초나라 군대에 가로막혔으며, 십 여 만 명의 병력이 결국 살해당하면서 수수로 몰려들었고, 이 때문에 수수의 강물이 흐르지 않게 되었다. 유방은 수 십 기와 함께 도망쳐버렸다. 제후들도 모두 유방이 패배한 것을 보고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