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면의 <진한사> 번역 프로젝트
유방은 팽성에서 항우에게 패해서 달아났다. 당시 유방의 부인 여후呂后의 오빠, 훗날 주여후周呂侯로 봉해진 여택呂澤이 하읍下邑에 머무르고 있었다. 유방은 그리로 가서 약간의 사졸을 수습하고 다시 탕碭에 주둔했다. 그리고 다시 하읍에 가서 물었다.
“내가 함곡관 동쪽 지역은 포기하고 다른 이에게 양도한다면, 누가 함께 공을 세우려 하겠는가?”
장량이 말했다.
“구강왕 경포는 초나라의 효장이지만, 항우와 사이가 벌어졌습니다. 팽월과 전영은 양나라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상태니 급히 부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漢나라의 장수 가운데 한신만이 큰 일을 할 수 있으니, 전선 하나는 맡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토를 양도하시려면 이 세 사람에게 넘기십시오. 그렇게 하신다면 초나라를 격파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
유방은 이에 소하를 구강왕 경포에게 보내 설득시키게 하였고, 사람을 보내 팽월과 연합하고자 하였다. 처음에 항우가 제나라를 공격할 때 구강의 병력을 징발했었다. 그러나 구강왕 경포는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으며, 휘하 장수로 하여금 수 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가게 시켰다. 그리고 유방이 초나라를 팽성에서 격파했을 때도 경포는 병을 핑계로 초나라를 돕지 않았다. 항우는 이 때문에 경포를 원망하기 시작하였으며, 몇 차례 사자를 보내어 경포를 책망하고 소환했다. 하지만 경포는 더욱 두려워해서 감히 가질 못했다. 이 와중에 소하가 가서 설득하니 경포는 과연 초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5월, 유방이 형양에 주둔하였다. 소하는 관중의 노약자와 호적대장에 이름을 올리지도 않은 이들도 모두 군대로 보냈다. 한신도 병력을 수습하여 유방과 회합하니, 병세가 다시 크게 진동하였다. 그리고 초나라와 형양 남쪽 경京과 색索이라는 곳 사이에서 전투를 벌여 격파하였다. 그 후 용도甬道를 건설하여 황하와 연결했으며, 이 길을 통해 오창의 곡식을 확보하였다.
한편 위왕 표는 돌아가서 부모의 병을 돌보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런데 돌아가자마자 황하의 나루터를 끊어버리고 초나라를 위해 반기를 들었다. 6월, 유방은 악양에 돌아와서 태자를 세웠다. 그리고 장한이 다스리던 폐구에 강물을 끌어들여 쏟아 부었다. 폐구는 항복하고, 장한은 자살하였다. 8월, 유방은 형양으로 갔다. 그리고 역이기를 시켜 위왕 표에게 가서 설득하게 시켰으나, 위왕 표는 듣지 않았다. 이에 유방은 한신을 좌승상으로 삼고, 조참과 관영과 함께 위나라를 공격하게 시켰다. 9월 한신은 위왕 표를 포로로 잡아 형양으로 압송하고, 위나라 땅을 평정했다. 그리고3만 명의 병력을 요청해서 북으로 연나라와 조나라를 확보하고, 동쪽으로는 제나라를 공격하며, 남쪽으로는 초나라의 군량 보급로를 끊을 것이라고 하였다. 유방은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처음에 유방이 초나라를 공격할 때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 함께 하자는 의사를 타진했었다. 그런데 진여는 이렇게 말했었다.
“한漢나라가 장이를 죽이면 따르겠습니다. ”
이에 유방은 장이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찾아 베고는 그의 머리를 진여에게 보냈었으며, 진여는 병력을 보내 유방을 도왔었다. 그러나 유방이 팽성에서 패하고, 진여도 장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자 유방에게서 등을 돌렸다. 유방은 장이와 한신을 함께 보내 대 지방을 함락하고, 하설을 알여閼與에서 사로잡았다. 3년, 겨울, 10월, 수 만의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정형井陘을 항해 내려왔다. 조왕과 진여는 병력을 모아 정형의 입구에 주둔했으며, 20만 대군이라고 불렀다.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는 진여를 설득했다.
“깊은 해자와 높은 보루를 쌓고 전투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신에게 기병奇兵 3만을 주신다면, 샛길을 통해 그들의 보급치중대를 끊어버리겠습니다.”
그러나 진여는 듣지 않았다. 한신은 내려와서 조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진여를 베었으며, 조왕 헐을 사로잡았다. 광무군 이좌거도 생포당했다. 한신은 이좌거의 계책을 따라 사신을 연나라에 파견했다. 연나라는 불어오는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듯이 유방에게 사신을 보내 회답했으며, 장이를 조왕으로 삼아서 진무하도록 청했다. 유방은 이를 허락했다. 한신이 위나라, 대나라를 함락하자, 유방은 한신에게 사람을 보내 그의 정예병으로 하여금 형양에 와서 초나라를 방어하도록 시켰다. 초나라가 수차례 기병奇兵을 보내 황하를 건너 조나라를 공격했지만 조왕 장이와 한신이 와서 구원하였으며, 돌아다니면서 다른 조나라의 성읍들을 안정시켰고, 병력을 보내 유방에게 보냈다.
한편 소하는 경포를 설득시켰고, 경포는 초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초나라는 항성項聲과 용저龍且를 보내 경포를 공격하였고, 경포는 맞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 12월, 경포는 소하와 함께 샛길로 한漢나라로 가서 귀순하였다. 유방은 경포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었으며, 함께 나머지 잔병들을 수습해서 성고成皋에 이르렀다. 항우는 수차례 한漢나라의 용도에 침입해서 약탈했기 때문에 한나라 군사들은 식량 부족을 겪게 되었다.
여름, 4월, 항우는 한나라가 점거하고 있던 형양을 포위했다. 유방은 강화를 요청했다. 형양 서쪽의 땅을 갈라서 한나라에게 달라고 하였다. 이에 범증은 항우에게 빨리 형양을 공격하라고 권유하였다. 5월, 유방의 휘하 장군 기신紀新이 유방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거짓으로 초나라에 투항했고, 유방은 수 십 기의 병력과 함께 달아났다. 유방은 어사대부御史大夫 주가周苛, 위표魏豹, 종공樅公에게 형양을 수비하라고 명령했는데, 주가와 종공은 위표를 살해했다. 유방은 형양을 나와 성고에 도착했다. 그리고 성고에서 관중으로 들어가 병력을 수습한 뒤 다시 동쪽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이에 원생轅生이 유방에게 말했다.
“무관으로 나온다면, 항우는 반드시 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올 것입니다. 왕께서는 깊은 보루를 세워서 굳게 방어하신다면, 형양과 성고 지역의 전투를 잠시 소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신으로 하여금 황하 북쪽의 조나라 땅을 안정시키고, 연나라와 제나라와 연합하게 하십시오. 이렇게 한 다음에야 왕께서는 형양으로 다시 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초나라로 하여금 방비를 많이 하게 해서 힘을 분산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 한나라로 하여금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할 수 있으니, 다음에 전투를 다시 벌인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
유방은 그 계책대로 완宛과 엽葉사이로 군대를 출동하여 주둔시켰다. 그리고 경포와 함께 병력을 수습하러 나섰다. 항우는 유방이 완으로 갔다는 말을 듣자 과연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다. 유방은 보루를 굳게 지키고 나가서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바로 이 달, 팽월이 수수睢水를 건너 항우의 휘하 장수 항성과 설공薛公과 하비에서 전투를 벌였고, 설공을 격파하여 죽였다. 항우는 종공終公으로 하여금 성고를 지키게 하고 직접 동쪽으로 가서 팽월을 공격했다. 그러자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북으로 가서 종공을 격파한 뒤 다시 성고에 주둔했다.
6월, 항우가 팽월을 격파하여 도주시켰는데, 한漢나라 군대가 다시 성고에 주둔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력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향했다. 형양성을 함락한 뒤, 주가를 삶아 버렸으며, 종공을 죽이고, 한왕韓王 신信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바로 성고를 포위하였다.
유방은 도망쳤다. 북으로 황하를 건너 소수무小修武에 머물렀다. 그 후 사신을 자칭해서 새벽에 장이와 한신이 지키고 있는 보루로 달려 들어가서 그들의 병권을 빼앗았다. 그리고 장이로 하여금 조나라 땅을 지키게 하고 한신을 상국으로 임명해서 조나라 병력 가운데 아직 동원되지 않은 자들을 수습해서 제나라를 공격하게 시켰다. 유방은 한신의 군대를 얻어서 다시 군세를 크게 떨쳤다.
8월, 황하에 접근해서 남쪽을 바라보며 소수무에서 군사들에게 밥을 먹이고, 다시 전투를 벌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낭중령 정충鄭忠이 유방에게 그만둘 것을 설득하였고, 유방도 그 말을 따랐다. 이에 노관盧綰과 유가劉賈로 하여금 이 만의 병력과 수 백 기를 거느리고 백마진白馬津을 건너게 한 뒤, 팽월을 도와 초나라 군대가 쌓아둔 보급품을 불태우게 하였으며, 다시 초나라 군대를 연燕의 성곽 서쪽에서 격파하였다. 그리고 수양睢陽과 외황 등지의 열 일곱 성을 공격해서 함락하였다.
9월, 항우는 해춘후海春侯 대사마大司馬 조구曹咎에게 말했다.
“성고를 조심해서 지켜라. 유방이 도전한다면 그와 전투를 벌이는 것을 삼가고 동쪽으로 진군하는 것만을 멈추게 하면 된다. 15일이다. 내가 반드시 양나라 땅을 평정시키고 다시 장군에게 올 것이다. ”
항우는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팽월을 공격하러 나섰다. 위에서 항우가 제나라 방면의 위기를 해소하고 유방을 공격해서 몇 번의 전투를 치루자, 이를 틈타 전횡은 제나라의 성읍들을 다시 수습할 수 있었으며, 전영의 아들 전광을 제왕으로 옹립했다고 언급했었다. 그리고 전횡은 전광을 보좌했는데, 국정을 마음대로 운영했다. 정사의 대소사가 모두 전횡에게서 결정되었다. 그 와중에 한신이 동쪽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화무상華無傷과 전해田解를 시켜 역하歷下에 군대를 주둔하게 하여, 한漢나라 군대를 방어하게 시켰다. 유방은 역생酈生을 보내 제왕 전광과 그의 상相 전횡을 설득하게 시켰고, 전횡도 그의 주장을 그럴 듯하다고 여겨서 역하에 주둔시켰던 군대를 철수시켰다. 한고조4년, 10월, 한신韓信은 괴통蒯通의 계략을 사용해서 제나라를 습격해서 격파했다. 제나라는 역생을 삶아 죽였다. 제왕 광은 동쪽의 고밀高密로 도망갔고, 상相 전횡은 박양博陽으로 도망갔다. 항우는 자신의 종형의 아들인 항타項它를 대장大將으로, 용저龍且를 비장裨將으로 삼아 제나라를 구원하게 시켰다.
한편, 한漢나라 군대는 과연 수 차례 성고에서 전투를 도발하였지만, 초나라 군대는 나오지 않았다. 이에 사람을 보내 모욕하니, 며칠 후, 대사마 조구는 분노해서 범수氾水를 건넜다. 하지만 초나라의 사졸들이 반 정도 강을 건넜을 때 한나라 군대가 공격해서 대파했으며, 대사마 조구, 장사 사마흔은 모두 범수에서 자결하였다. 유방은 병력을 이끌고 강을 건너 다시 성고를 확보하고 광무廣武에 주둔하였으며, 오창에 보관된 식량을 차지하였다. 항우는 양나라 지방의 십 여 개 성을 함락했지만, 조구가 격파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군대를 데리고 귀환했다. 그리고 광무에 주둔하면서 한나라 군대와 서로 마주보며 수비를 하기 시작했다.
11월, 한신과 관영이 초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용저를 죽였으며, 성양까지 육박해서 제왕 전광을 포로로 잡았다. 제상齊相 전횡은 스스로 제왕이 되어 팽월에게 도망쳤다. 관중으로부터 병력은 날로 충원되었다. 팽월과 전횡은 양나라에 머물러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초나라의 병력을 괴롭히고, 그들의 군량을 끊었다.한신은 제나라를 격파한 뒤 사람을 보내 말했다.
“제나라는 초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임시로 왕을 세우지 않는다면, 안정시킬 수 없을 것으로 우려됩니다.”
유방은 분노해서 한신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장량이 말했다.
“차라리 그를 왕으로 세워서 스스로 지키라고 하는 편이 낫습니다.”
2월, 장량에게 인수를 들려보내 한신을 제왕으로 삼았다. 항우는 우대사람 무섭武涉을 한신에게 보내 유방에게 반기를 들고, 초나라와 연합해서,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각자 왕이 되어 다스라지고 설득했다. 무섭이 떠난 뒤,괴통은 천하의 권력이 한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천하삼분지계를 설득하였다. 하지만 한신은 주저했고, 결국 승낙하지 않았다. 7월, 유방은 경포를 회남왕으로 삼았다. 8월, 항우 스스로도 원군은 적고 식량은 떨어졌으며, 한신도 병력을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해오니,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 때 유방은 후공侯公을 보내 항우를 설득했다. 항우는 이에 유방과 화약을 맺고 천하를 둘로 나누었다. 홍구鴻溝 서쪽은 한나라, 동쪽은 초나라가 되기로 정했다. 9월, 유방의 아버지 태공太公과 부인 여후呂后를 돌려보낸 항우는 전선을 풀고, 동쪽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유방도 서쪽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장량과 진평이 간언하였다.
“지금 한나라가 천하의 태반을 차지했으며, 제후들도 모두 귀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초나라 병사들은 지쳤고, 식량도 다 떨어졌으니, 이는 하늘이 그들을 멸망시킬 때입니다. 이 기회를 빌어 공격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호랑이를 길러 스스로 후환을 남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유방은 그 말을 따랐다. 한고조 5년, 10월, 유방은 항우를 추격했다.양하의 남쪽에서 일단 군대를 멈추게 시키고, 제왕齊王 한신과 위상국魏相國 팽월과 회합해서 초나라를 공격할 날짜를 정했다. 유방은 고릉固陵에 도착했지만 회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초나라는 한나라 군대를 공격해서 대파했다. 유방은 다시 보루로 들어가서 깊게 해자를 파고 굳게 지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량에게 말했다.
“제후들이 따르지 않는데 어떻게 하오?”
장량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은 초나라 군대가 이미 격파되었는데도 아직 땅을 나누어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가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것입니다.만약에 군왕께서 정말로 그들과 천하를 함께 공유하실 수 있다면, 바로 도착할 것입니다. 제왕 한신이 왕이 된 것은 군왕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한신도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팽월도 본디 양나라 땅을 평정했는데, 처음에 군왕께서 위표때문에 팽월을 상국으로 제수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위표가 죽었으니 팽월이 왕이 되기를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만, 군왕께서는 아직도 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지금 수양부터 북쪽으로 곡성穀城에 이르는 지역을 모두 팽월로 하여금 왕이 되어 다스리게 하고, 진陳 지방에서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는 지역을 제왕 한신에게 주십시오. 한신의 집이 초나라에 있기 때문에 한신은 다시 자신의 고향을 수복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 땅을 저 두 사람에게 내놓으셔서 그들로 하여금 전쟁을 치루게 한다면, 초나라는 쉬이 패배할 것입니다.”
이에 유방은 사신을 한신과 팽월에게 보냈다. 이는 사실상 적을 평정하고 동등한 지위에서 땅을 나누기로 약속한 것이며, 유방이 그들을 신하로서 봉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신이 도착하자, 모두 군대를 끌고 왔다. 11월, 유가가 초나라 땅으로 진입해서 수춘을 포위했다. 한漢나라는 또 사람을 보내 초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포섭했다. 주은은 초나라한테 반란을 일으켰으며, 서舒의 병력을 이끌고 육현六縣을 도륙했다. 그리고 구강의 군대를 징발하여 경포를 마중한 뒤 함께 성부로 가서 도륙하고 유가와 회합했다.
12월, 항우를 해하垓下에서 포위했다. 항우는 밤에 한나라 군대가 사면에서 초나라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자 초나라 땅이 모두 그들의 손아귀에 넘어간 줄 알았다. 이에 팔백 기를 따르게 해서 그 밤에 바로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달려 도망갔다. 날이 밝자 한나라 군대는 이를 깨달았다. 기장騎將 관영에게 오천 기를 데리고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항우가 회수를 건널 때 즈음 휘하에 말을 탈 수 있는 자는 백 여 명 뿐이었다. 음릉陰陵에 이르자 길을 잃었다. 이에 밭에 있던 농부에게 길을 물었다. 농부는“왼쪽입니다”라고 대답했다.항우는 왼쪽으로 향했는데, 이윽고 큰 늪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한나라 군사가 추격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항우는 다시 동쪽으로 병력을 이끌고 갔다. 동성東城에 이르렀을 때 고작 28기만 남았다. 추격하는 한나라의 기병은 수 천 명이었다. 항우는 스스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뒤 휘하 기병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군사를 일으킨 지 올해로 8년이 되었다. 직접 70여 번의 전투를 치루었는데, 맞서는 자는 깨뜨려버렸고, 공격받은 자들은 항복하였으니, 패배를 겪어본 적이 없었으며, 곧 천하를 제패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끝내 여기에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전투를 잘못 치룬 죄가 아니다. 오늘 내가 정말 죽음을 무릅쓰고 그대들을 위해 결전을 벌이고자 하며, 세 번 모두 분명 이길 것이다. 그대들을 위해 포위망을 깨뜨리고 적의 장수를 참살하며 그들의 깃발을 꺾어버릴 것이다. 그대들로 하여금 하늘이 나를 망하게 만든 것이지 내가 전투를 잘못한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만드리라.”
이에 휘하의 기병을 네 대로 나누고 사방으로 향하게 했다. 한나라 군대는 몇 겹으로 그들을 포위했다. 항우는 휘하 기병에게 말했다.
“내 그대를 위해 저기 장수 한 명을 취하겠다.”
그리고 사방의 기병에게 달려 내려가도록 명령하면서, 산의 동쪽의 세 곳에서 나누어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항우도 고함을 내지르면서 달려 내려가니 한나라 군대는 바람에 초목이 갈라지고 쓰러지는 것처럼 붕괴했으며, 바로 한나라의 장수를 벤 뒤, 세 곳에서 휘하 기병과 회합하였다. 한나라 군대는 항우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어서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다시 포위하였다. 항우는 이내 달렸다. 다시 한나라의 도위 하나를 참살하고 수 십 명을 죽였다. 항우가 다시 휘하의 기병과 회합했을 때 단지 두 기만이 망실되었다. 휘하 기병들에게 말했다.
“어떤가?”
휘하 기병들은 엎드려 말했다.
“대왕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에 항우는 동쪽으로 가서 오강烏江을 건너려고 하였다. 오강정장烏江亭長이 배를 정박시킨 채 기다리고 있었다. 오강정장이 말했다.
“강동이 비록 작으나, 면적이 사방 천 리이고, 수 십 만 명이나 있기 때문에 왕노릇하기 충분합니다. 대왕께서 빨리 강을 건너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신만이 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나라 군대가 도착해도 강을 건널 수는 없습니다.”
항우는 웃으며 말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만들었는데, 내가 왜 강을 건너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강동의 자제 팔 천 명을 이끌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왔는데, 지금 돌아갈 수 있는 이가 한 명도 없다. 설사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애석하게 여겨 왕으로 추대한다고 하더라도, 내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보겠는가? 설사 그들이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 항우가 설마 부끄러워 하지 않으리란 말인가?”
그리고 기병들에게 말에서 땅으로 내리라는 명령을 내린 뒤, 단병을 쥐고 근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항우 홀로 한나라 군사 수 백 명을 죽였다. 하지만 항우 역시 몸에 십 여 개의 상처를 입었다. 좌우를 둘러 보니 한기사마漢騎司馬 여마동呂馬童이 보였다.
“너는 내 옛 사람이 아닌가?”
항우가 말했다.
“한나라가 내 목에 천금千金과 식읍 만 호戶를 걸었다고 들었다. 내 너에게 덕을 베푸리라.”
항우는 스스로 목을 긋고 죽었다. 초나라 땅은 모두 한나라에게 투항했지만 노魯나라만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항우의 목을 들고 노나라에 보여주니, 비로소 노나라 부형들은 항복했다. 처음에 초회왕이 항우를 노공魯公으로 봉했으며, 항우가 죽은 뒤 가장 마지막으로 항복했다. 따라서 항우를 노공의 예를 갖추어 곡성穀城에서 장례를 치루었다. 항우가 세운 임강왕 공오는 예전에 죽어 그의 아들인 공위共尉가 지위를 계승하여 왕이 되었다. 그런데 공위가 항복하지 않자 노관과 유가를 보내 공위를 공격하여 사로잡았다.한편 전횡도 벌을 받을 것을 두려워해서, 그를 따르는 이들 오 백 여 명과 함께 바다에 들어가 섬에서 거주하기 시작했다. 유방은 나중에 그들이 난리를 일으킬까 두려워 사신을 보내 전횡의 죄를 사면하고 소환했다. 하지만 전횡은 가지 않고 자결하였다.
유방과 항우의 성패에 대해서 말하자면, 한나라가 소하로 하여금 관중을 지키게 하고, 한신으로 하여금, 조나라, 대나라, 연나라, 제나라를 함락시킨 반면,초나라는 팽월이 후방에서 소란을 일으켰으며, 병력도 줄고,식량도 바닥이 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한나라는 소하, 한신, 팽월들을 어떻게 등용하였을까? 그리고 초나라는 경포와 주은에게 친근한 태도로 신뢰를 보여주었는데 왜 여기저기에서 반란을 일으켰을까? 유방은 낙양궁에서 주연을 베풀면서 이렇게 말했다.
“열후와 장상들은 감히 짐에게 숨기지 말고 실정을 모두 말하라. 내가 천하를 차지하게 된 까닭은 무엇이며, 항우가 천하를 잃어버린 까닭은 무엇인가?”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대답하였다.
“폐하는 오만해서 남을 모욕하고, 항우는 인자해서 남을 아낍니다만, 폐하께서는 사람을 시켜 성을 공격하고 땅을 경략하는데, 투항하는 경우, 임무를 맡은 이에게 모두 소유권을 주시기 때문에 천하와 함께 이익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항우는 현명한 이를 시기하고, 유능한 자를 미워하니, 공을 세운 이들은 해를 입고, 현명한 이는 의심을 받습니다. 또한 전쟁에서 승리해도 남에게 공을 주지 않고, 땅을 얻으면 남들에게 그 이익을 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가 천하를 잃어버린 까닭입니다.”
유방이 말했다.
“공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구려. 장막 안에서 계책을 운용하고, 천리 밖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일에 대해서는 나는 장량만 못하오, 국가를 튼실히 하고, 백성을 위로하며, 군량미를 보급하는데, 보급선을 끊어지지 않게 하는 일에 대해서 나는 소하만 못하오. 백만의 군대를 연합시켜,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하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나는 한신만 못하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이오. 내가 이들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오. 반면에 항우는 범증 한 사람도 활용하지 못했으니 이것이야말로 나에게 사로잡힌 까닭이오.”
그러나 한고조 유방의 말과 고기와 왕릉의 의견은 사실상 같다. 한신은 이렇게 말했다.
“항우는 사람을 부리면서 공을 세워 마땅히 작위를 내려야 하는 경우에도 도장을 마모시켜 찍을 수 없게 해서 차마 줄 수 없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진평도 말했다.
“항우는 타인을 믿지 않습니다. 그가 임용하고 아끼는 이들은 항씨 일족이 아니면 아내의 형제들 뿐입니다. 비록 기이한 능력을 지닌 선비가 있다고 하더라도 등용하지 않습니다.”
역이기가 제왕을 설득할 때도, 항우는 항씨 일족이 아니면 국정을 맡아 볼 수 없다고 하였다. 대개 항씨 일족은 옛 초나라의 세가世家, 즉 대대로 이어져 온 가문으로, 그들의 사람 쓰는 방법은 봉건 시대와 같았다. 비천한 이는 존귀한 이를, 소원한 이는 친척의 지위를 넘지 못한다는 구습을 따랐다. 하지만 한고조 유방은 무지렁이 백성 출신이라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지혜롭고 용맹한 선비는 대대로 높은 지위에 있어 녹을 받은 가문에서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단지 어느 한쪽에 다른 한쪽보다 돕는 이가 더 많았던 일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을까? 따라서 유방과 항우의 흥망은 기실 사회의 변화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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