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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Mar 06. 2019

한고조 유방의 경제 실책, 하이퍼 인플레이션

여사면呂思勉은 <진한사秦漢史> 프로젝트 


여사면呂思勉은 <진한사秦漢史>에서 한고조 유방의 정치를 논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했는데, 이는 중국이 결국 서양만큼 상업이 발달하지 않은 까닭에 관한 중요한 실마리이며, 본인으로 하여금 이 책을 번역하도록 마음먹게 시켰다. 전국시대 말 상업, 특히 화폐경제는 당시 관료들이 인플레이션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정도로 발달했다. 그런데 왜 결국 전통시대 지식인들은 농업 짱짱맨을 외쳤을까? 재미있는 사실은 전국시대 유가는 상업을 긍정하고, 법가는 농업이 쵝오시다를 외쳤지만, 한나라 때 들어서 유가는 농업을, 법가는 상업이 중요하다고 서로 입장을 변경하였다. 이 문제는 이미 거진 완성된 내 박사 논문의 마지막 장에서 다루었지만, 아직 출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썰은 다음으로 미루겠다.ㅎㅎㅎ 다만 전통시대 지식인들이 상업을 이해하지도 않으면서, 걍 반대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한고조漢高祖 8년, 한고조 유방은 동으로 한왕韓王 신信과 잔당들을 동원東垣 에서 격파하고 돌아왔는데, 궁궐이 너무 장엄한 것을 보고 분노해서 소하蕭何에게 말했다.


“천하는 흉흉한데다 어려운 전쟁도 몇 해 동안 지속되었으며, 그 승패도 아직 알지 못하는데 어찌 궁실을 과도하게 지었는가?” 


소하가 말했다.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궁실을 지었습니다. 무릇 천자는 사해를 집으로 삼으니,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큰 위엄이 없게 되며, 후세에 증축하라고 명령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고조는 기뻐했다. 하지만 소하의 말은 화려한 문장으로 죄를 면하려는 글에 불과하다. 평안한 백성은 같이 의로움을 행할 수 있지만, 피로한 백성들은 쉬이 잘못을 저지른다는 말을 들을 적이 있지만, 천하가 흉흉한데 이 때문에 노역을 일으킨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새벽 아직 날이 밝아오지도 않았는데 명성만 크게 떨칠 생각만 하면, 그 후대는 나태해질 것이다[昧旦丕顯,後世猶怠] . 어찌 먼저 과도한 사업을 벌여서 후세에 아무것도 추가할 것이 없게 만들 것을 기대하는가? 역사가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유방이 어떻게 관중 지방을 진무시켰는지 칭찬하지만, 사실 소하가 누에에서 비단실을 뽑듯[為繭絲]  내부를 너무 훌륭하게 다스렸을 뿐이다. 유방이 팽성彭城에서 패배했을 때, 소하가 관중의 노약자와 요역 대장에 오르지 않은 이들을 모두 군대에 보냈다. 이 때는 초한전쟁이 막 시작할 때이기 때문에 이후에 징발된 이들은 모두 본디 요역 장부에 기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에는 관중 지방에 큰 기근이 들어 쌀 가격이 한 석에 동전 만 개나 되었으며, 심지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백성들을 촉蜀과 한漢(사천四川과 충칭重慶)지방에 이주시켜 기식시켰다.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에 따르면 진나라 때 동전에 반량半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무게도 그 글자대로였다. 하지만 한나라가 새로 일어나면서 진나라 때의 돈이 무거워 사용하기 어렵다면서 백성들로 협전莢錢을 주조시켰다. 법령을 무시하고 이익을 쫓는 백성들이 독점한 곡식들로 시장 상품의 가치를 매기니 물가가 미친듯이 올랐다.


(역주 : 협전에는 비록 예전처럼 반량이라고 새겨졌지만, 실제 무게는 1/4로 감소하였다. 예컨대 명목 가치는 10000원이지만, 실제 가치는 2500원이 되어버렸다. 이에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해서 실물 자산, 특히 곡식의 가치가 앙등했다. )


쌀은 한 석 당 10000전, 말은 한 필에 400금이나 된 것이 이 때의 일이다. 화폐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고, 또 백성들이 사사로이 주조하니, 물가의 앙등은 마땅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문제의 원인을 백성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돌리니 마땅한 일인가? 하지만 한나라가 백성들을 착취한 일에 대해서 역사서가 자세히 설명한 것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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