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가 《대학大學》의 "친민親民"을 "신민新民"으로 고친 까닭
송대 성리학에 대한 많은 개설에서는 이 학문이 불교의 탈을 쓴 유교라고 하면서, 이론적으로는 이기론理氣論이 어떻게 발전하였으며, 실천적으로는 왕권 강화 이데올로기로 어떻게 작동하였는지 설명한다. 하지만 송대 성리학이 옛 문헌 기록의 진실성을 의심했던 의고疑古적 학문 방법론을 채택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잘 언급하지 않는다. 예컨대 성리학이 역사의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예기禮記-대학大學》의 재해석 역시 의고적 방법론에 기초하였다. 그런데 성리학의《예기-대학》에 대한 의고적 접근 방식을 살펴보면 주희가 정말로 왕권 강화에 봉사하기 위해서 성리학의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었는지 의구심이 든다.
《大學》之道,在明明德,在親民,在止於至善。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친하게 대해서, 지극한 훌륭함에 다다르는데 있다.
북송시대 정이程颐는 親民이 원래는 新民이라고 처음 주장하였고, 주희朱熹가 이 견해의 타당성을 부연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정이와 주희는 왜 굳이 친민親民을 신민新民으로 고쳐 읽었을까? 왜냐하면 친민親民은 《예기-대학》을 제외한다면, 전국 시대 말에 편찬된 것이라고 알려진《상군서商君書》,《한비자韓非子》와 《묵자墨子-비제備梯》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공자가 이것이 대학의 목적이라 주장했다고 보기 힘들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전승된 《예기》도 순자荀子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여기에 적힌 구절들이 곧이곧대로 공자의 말씀이라고 여길 수 없다. 반면에 주희는 친민親民을 신민新民으로 고치면서 청동기 명문인 《반명盤銘》, 《상서尚書-강고康诰》, 《시경詩經-대아大雅-문왕文王》, 즉 공자보다 훨씬 이전 시기에 등장한 사료들을 인용하였다. 그러므로 고증학적인 측면에서 따지지만, 친민親民보다 신민新民이 더 타당하다. 따라서 주희가《예기》에서 《대학》을 분리하면서, 이 편장은 원래 공자의 말을 증자曾子가 적은 것이며, 옛 버전은 오류가 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겠다고 선언한 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오늘 페북 어디서, 주희가 친민을 신민으로 고친 것이 통치 이데올로기의 강화 목적에 있다는 것을 봤다. 그런데 주희가 인용한 《상서-강고》는 주공칭왕설周公稱王說의 근거가 되는 사료이다. 주공은 주나라 초기의 먼치킨으로, 은나라를 멸망시킨 형 무왕武王이 급사하자, 그의 어린 조카인 성왕成王을 줄곧 신하로서 보좌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순자荀子-유효儒效》 에는 주공이 성왕 대신 왕위에 올랐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군주와 신하가 자리를 바꾸는 것이 순리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성인聖人을 제외하면 아무도 할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위대한 유학자의 본보기이다.”
순자도 맹자와 마찬가지로 현명하고 도덕적인 위대한 인물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니 맹자보다 더 급진적이었다. 왜냐하면 맹자는 주공이 설사 아무리 먼치킨이라고 하더라도 왕이 되지 못했다고 인정했으며, 이게 바로 천명이라고 수긍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순자는 어디에서 주공이 성왕 대신 왕위에 올랐다는 근거를 찾았을까. 바로《상서-강고》이다. 무왕 사후 형제들의 반란을 진압한 주공은 여러 훈계를 반포했다.《상서-강고》도 그 중 하나로, 주공은 여기서 자신의 동생인 강숙康叔을 위衛에 봉하면서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한다. 주공은 도덕성마저 겸비한 천고의 인물로 알려졌기 때문에, 전통시대부터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우리 주공이 그럴리 없어”하면서 이 기록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을 검토하거나, 이를 반포한 이가 실은 주공이 아니라는 추론을 내리곤 했었다. 하지만 전한 말 왕망이 황위를 찬탈하면서《상서-강고》를 인용했다는 사실은 적어도 당시에 이 기록은 주공칭왕설의 주요 근거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나라 때 유교 이데올로기가 유씨 왕권 강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하는데, 오히려 왕망의 고사와《상서-강고》는 당시 사람들이 정말로 위대한 인물이라면 누구든지 황제가 될 수 있다고 믿었음을 보여준다.
독서가 미진해서 관련 사료는 아직 찾지 못했지만, 주희라면《상서-강고》가 지닌 함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왕망 찬탈 고사는 어린 아이도 아는 것이며, 당시 수준 이하의 학자들도 오경五經은 딸딸딸 외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희가 위에서 인용한《대학》의 한 구절을 고치면서《상서-강고》를 인용했다는 것은, 어쩌면, 저 구절을 왕권 강화 이론으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든지 공부를 통해 더러운 구습을 제거해서, 하루 또 하루 혁신해 나간다면, 궁극적으로는 성인이 되어 군주가 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