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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Mar 26. 2019

여성 중심의 문명 사회에서 야만인이 되는 소년들

<소년은 어떻게 사라지는가>에 대한 서평

이 주 전에 어떤 네임드 페미니스트께서 어떤 안티페미니스트의 주장이 남녀차별을 용인한다고 사례라고 열거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분의 지적은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이들을 악마화시키는 것에 불과하길래 공유해서 비판했었다.  페북이의 알림을 들은 그 분께선 바로 날아오셨고, 며칠 동안 키배를 떴었다. 처음에는 그 분께서 네임드이기도 하고, 화려한 논변을 구사하셔서, 좀 쫄았었는데, 키배를 뜨면 뜰 수록 속 빈 강정인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네임드가 저격한 안티페미니스트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남녀가 다르기 때문에 평등이라는 개념을 불가능하다, 다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자는 평화라는 개념을 사용하자.

2. 남녀가 다르다는 것은 한 쪽 성별이 다른 성별보다 우월하고 열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특화된 영역이 다르다는 것이다.

3. 남성적, 여성적이라 불리는 부분은 사회적인 억압이 아니라, 생물학+심리학에 기인해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 페미 네임드께서는 이 주장이 남녀 차별을 인정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은, 우선, “평등”이라는 개념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2)의 명제를 보면 안티페미니스트들은 분명 남녀가 다르다는 것은 우월하고 열등하다는 뜻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께서는 “평등”이란 개념은 사회적, 법적인 불평등과 연계되기 때문에, 2)의 명제는 거짓이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3)의 명제, 즉 생물학적인 환원론에 입각해서 남녀 차이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남녀 차별을 인정하는 셈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그 페미 네임드께서는 저 안티페미의 주장 가운데 명제 2)는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라는 식의 거짓말이라고 이해한 셈이다. 그런데 “평등”,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개념들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다. 그렇다면 이 개념을 품은 1)과 3)의 명제가 남성 우월을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까? 요컨대 그 분께서는 생물학적 환원론, 즉, 남녀의 차이는 사회적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지지하는 이는 바로 남녀차별주의자라고 이야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분의 논리에 따르면, 남자가 생물학적으로 여자보다 근육이 더 발달되기 쉽다고 해도 남녀차별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일견 생물학적 환원론을 활용하면, 작금의 남성 우위의 사회를 설명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생물학적 환원론을 지지하면 남자가 여자보다 선천적으로 우위에 있으니까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한물간 나치의 인종주의의 변형에 불과하다. 그런데 과연 안티-페미니스트들이 그 정도로 비도덕적이고 바보일까? 아마 페미니스트들은 그렇게 보는 듯 하다. 그런데 키배를 뜨는 와중에 이선옥 작가가 페북에서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즈가 지은 <소년은 어떻게 사라지는가>라는 책이 번역되었다고 소개했는데, 이게 남성성과 생물학적인 환원론에 관한 안티-페미니스트의 입장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번역본을 보고 싶었지만, 중국에서 받아볼려면 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아마존 중국 홈피에서 킨들 버젼으로 원문을 구매해서 읽었다. 


서론이 길었다. 


<소년은 어떻게 사라지는가>라는 책은 생물학적 환원론자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악마화를 처음부터 일격에 박살낸다. 작금 미국의 중고등학교에서는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평균 성적도 높고, 방과 후 활동 참여율도 높으며, 대학 진학률도 높다. 이 차이는 과연 생물학적일까 아니면 후천적으로 사회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까? 만약에 생물학적인 이유때문이라면, 남녀의 선천적 차이가 반드시 남성 우월론을 설파한다는 페미니스트들의 견해가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만약에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지지하는, 사회적, 후천적 이유때문이라면, 이 역시 현대 사회의 교육이 소위 가부장제를 지탱하기 위해 남성에 유리하게 설계되었다는 그들의 주장도 박살난다. 요컨대, 적어도 현대의 교육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선천적으로나 후천적으로나 남성은 오히려 여성보다 열등하게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안티-페미니스트들이 언급하는 선천적 남녀 차이는 반드시 남성 우월을 담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은 분명 단점도 있다. 중간에 상당한 분량을 기존의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 불충분한 자료 수집과 분석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지리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읽다가 하품을 쩍쩍 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부분 너머의 8장부터에서는 다시 흥미진진한 주제를 꺼낸다. 흔히 페미니스트들은 남자의 여성에 대한 폭력이 과연 여성을 성적 착취물로 인식하게 만든다는 가부장적 시스템의 결과라고 한다. 그런데 위에서 보여주듯이 현재의 교육 제도는 적어도 학업 성취도 측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여성을 남성보다 우월하게 만들어 준다. 따라서 남성 우월적 가부장제가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이론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에 저자는 페미니스트들이 남성 우월주의적 강간문화의 대표사례라고 언급한 글렌리지 강간 사건을 인용해서 정면에서 반박에 나선다.


저자는 글렌리지 강간사건이 남성 우월주의적 강간문화때문이 아니라, 남자아이들에게 도덕 교육이 부재하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학생들의 자율과 자존심을 교육의 최우선 과제로 삼기 시작하고, 그들 스스로 하여금 자신만의 가치를 찾게 시키고, 덩달아 교사들의 권위도 떨어지면서, 학교에서 도덕 훈육은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엄격한 훈육은 여자 아이들에게는 필요가 없다. 말하면 들으니까. 하지만 남자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중학생을 가르쳐 보면 알겠지만, 속된 말로 "패야 말을 듣는다”, “군대가야 비로소 철이 든다”라는 말에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저자도 남자 아이들을 걍 야만인이라고 했으며, 엄격한 통제 속에서 훈육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저 유명한 <파리대왕>을 찍게 된다고 하였다. 도덕 훈육이 부족한 남자 아이들에게 아무리 폭력적인 게임을 즐기지 말고, 야동을 몰래 보지 말라는 건 우이독경이나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도 "왜 우리 아이 기를 죽이고 그래요“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남자 아이들이 스스로를 가치의 기준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동시에 선생의 권위는 시궁창에 쳐 박히게 되었으며, 도덕 훈육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게 되었으며, 마침내 기존의 예의범절을 무시하는 것이 쿨하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세월호 희생자들을 조롱했던 일베충들을 통해 파리대왕의 세계관에서 살고 있는 남자 아이들을 목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게 기존의 가부장제적인 교육때문에 벌어졌을까? 아니다. 말을 하면 잘 듣는 여자 아이들을 기준으로 교육 철학과 시스템이 재편되면서 생긴 부작용이다. 이미 토론 위주로 수업을 진행하는 국제 학교에서 종종 머리가 약간 굵은 남학생들이 이렇게 하소연한다. 


“쌤. 주입식으로 공부시켜주세요.”


어쩌면 한국 남학생들이 <소년은 어떻게 사라지는가>에서 언급된 미국 남학생들보다 운이 좋을지 모른다. 학원 뺑뺑이가 행동 통제 훈련으로도 활용될 수도 있으니까.  


남자 아이들은 여자 아이들보다 선천적으로 문해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자율성도 부족하고, 심지어 폭력성까지 깃들었다는 것은, 문명화된 사회에서 큰 약점이다. 이는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하며, 심지어 지배도 할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페미니스트들이 여성과 남성이 선천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은 까닭은, 어쩌면 작금 현대 사회에서 수입이 높은 직업, 금융과 공학 계통에서 남학생들이 여학생들보다 흥미를 더 많이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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