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절친 K군이 카톡을 보냈다.
“학교에 남는 애기 영어 책 있냐? 있으면 다오."
“그거 다 도서관이 수량 잡아놔서 안되는디.”
“그래? 그럼 우리 아기가 이번에 국제학교 유아원에 들어가는데 책 추천할 것 읎냐?”
“뭔 국제학교 유아원? 그거 돈 낭비여 이눔아. 책 달라고 하기 전에 그런 거나 미리 물어보지.”
“그래도 한국에서 아기들 영어 유치원 다닌다고 하니까. 우리 아가도 다니면 좋을 듯 해서 그렇다.”
평소에 스스로를 마초 중의 상 마초라고 자칭하고, 주위 친구들도 그렇다고 인정한 K군은 아들 바보로 변해있었다. 물론 이번 결정은 K군 보다 제수씨의 입김이 강한 듯 했지만 말이다. 하긴 저번부터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처형네 딸래미도 영어 학원에 다녀야 하는지 계속 문의를 해왔었다. 인터넷 여기저기에서도 가끔씩 초등학교 입학 전 아이들에게 영어 교육을 시킬지 여부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보면, 이 화두는 분명 학부모들의 뜨거운 감자이기는 한 것 같다. 물론 내가 영어 교육 전문가가 아니니까 몇 세 부터 영어를 공부시키면 좋을지는 잘 모른다. 허나 국제학교에서 3년 반 동안 재직하면서 확실히 깨달은 것은, 굳이 영어 유치원에 다니지 않아도 얼마든지 원어민처럼 영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차라리 영어 유치원의 학비를 가지고 방학 때마다 애들 해외 여행 시켜주거나, 먼 훗날 결혼 자금에 보태주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영어 유치원이 무쓸모하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IB 국제학교에는 유치부부터 다니던 학생들 가운데 간혹 졸업 때까지 English B에 머무르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초등학교 고학년, 혹은 중학교 때 전학와서 English A 수업을 듣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English A와 English B의 수업 수준 차이는 넘사벽이다. 국제학교 English A에서는 원어민을 대상으로 문학을 가르치지만, English B는 외국인을 위한 영어 교학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어느날 English A 8학년 선생님 교실에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벽에는 SAT 단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러니 중학교 때부터 English A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11학년에 올라간 학생들이 토플을 대충 쳐도 110점을 훌쩍 넘기는 건 너무 자연스럽다. 반면에 English B 수업을 듣는 학생들 가운데 대다수는 토플 100점도 안 나와서 낑낑 거린다. 그래서 난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에게 조언한다.
“English A 수업만 따라가면 토플 학원은 안 보내셔도 됩니다.”
엊그제 학교에서 X-fest라는 행사를 열었다. 6학년에서 8학년까지 학생들은 X-block이라고 매일 한 시간씩 자유롭게 정한 주제를 탐구하는 시간을 가지며, 학기 마지막에 X-fest라는 발표회를 연다. 함 들러보다가 작년에 우리 학교에 전학왔으며, English A 수업을 듣는 7학년 H군이 공룡 모델을 가지고 유창한 영어로 설명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X-fest가 끝나고 H군에게 물었다.
“영어는 언제부터 공부했니?”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학원을 다녔어요. 그런데 5학년 때부터는 문법 공부가 재미 없어서 다니는 둥 마는 둥 했어요. 하지만 영어 책은 꾸준히 읽었어요.”
H군은 국제학교에서 중학교 1년 다녔을 뿐이다. 그 전까지는 영어 독서를 통해 기본기를 다졌을 뿐이다. 그런데 간단한 일상 대화는 물론이고 비교적 어려운 개념도 척척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국제학교에서 유치부부터 다니는 학생 가운데 극소수는 한국어도 영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 비록 발음은 혀에 빠다 바른 것처럼 감기지만 말이다. 그 학생들도 다른 한국인 학생들처럼 학원도 두 세 군데 다닌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면, 그들은 공통적으로 독서를, 정말로, 아주, 미친듯이, 극도로, 혐오한다. 책을 10장 읽는 것을 1500미터 장거리 달리기 만큼이나 어려워 한다.
많은 이들이 주지하듯, 외국과의 연관된 삶을 사는데 영어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상당수의 학부모들이 자녀의 영어 실력을 위해 어릴 적부터 영어 유치원에 보낸다고 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효과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자녀들의 영어 실력 향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적절한 독서 습관의 확립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