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각기동대의 주인공인 쿠사나기 소령은 두뇌만 사람이고 나머지 신체는 모두 기계로 이루어져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무엇을 근거로 자신을 인간이라고 증명할 수 있을까? 아마 그녀에게 인격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 인격조차도 신경세포끼리 전달하는 화학 물질들의 교환을 통해 창발된 존재라면,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에서 태어난 인격인 인형사는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그래도 공각기동대의 마지막에서 인형사는 자신과 쿠사나기의 가장 큰 차이가 생식능력에 있다고 했다. 만약에 생식 능력에서도 인간과 기계가 아무 차이 없다면? 인간이 기계처럼 생식능력을 잃어버렸다면 과연 양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이에 총몽은 사람과 기계를 구분짓는 최후의 보루마저 허물면서 인간성의 본질을 극한으로 탐구한다.
총몽은 반이상향을 무대로 현실을 비판하는 소년만화에서 출발한다. 총몽은 공중도시 자렘과 이를 부양하는 지상의 여러 마을을 배경으로 삼으며, 이는 부유한 선진국과 이를 부양하는 옛 식민지였던 빈곤한 나라들을 연상시킨다. 갈리는 뇌와 상체의 일부만 남은 채 고철마을의 쓰레기장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신체의 일부를 기계로 대체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빈곤한 나라에 사는 대부분 사람들이 부유한 나라를 위해 기계처럼 일만 하는 모습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갈리도 자신을 구해준 이드의 도움을 받아 기계 몸을 장착해서 부활하며, 이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찰 대신 범죄자를 처리하는, 싸움을 업으로 삼는 헌터워리어가 된다. 사실 기억을 잃은 갈리는 싸움말고도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원래 누구인지 깨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로 싸움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전형적인 소년만화의 문법을 따르는데 급급하다 보니, 왜 갈리가 헌터워리어가 되어야 했었는지에 대해서 개연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에 작가는 갈리에게 남은 유일한 기억이 실전된 화성의 사이보그 무술인 기갑술이며, 따라서 싸움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탐색해 나갈 수 밖에 없다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 시작하며, 처음부터 악당 마카쿠를 등장시키면서 단순한 소년 만화의 문법을 뛰어넘으려고 한다.
갈리가 쓰레기장에서 발견되었듯이 마카쿠는 오폐수가 처리되는 하수도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갈리는 발견되자 마자 이드의 사랑을 받았지만, 마카쿠는 시궁창에서 고통과 공포를 겪으며 살다가 결국 화상과 병으로 몸이 썩어가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마카쿠는 죽기 직전 총몽의 최종 보스인 디스티 노바에게서 자신의 욕망을 잘 발현시킬 수 있는 벌레로 개조받게 된다. 벌레가 된 마카쿠는 다른 사이보그의 신체를 마음대로 빼앗을 수 있으며, 그가 지배한 신체가 그의 지능 수준을 결정한다. 갈리 역시 마카쿠에게 기존의 장착된 신체가 파괴되어 살인 병기인 광전사보디를 이식받았으며, 덕분에 강렬한 생존 본능을 느끼게 되었다. 만약에 갈리가 광전사보디를 이식받지 않았다면 스스로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기는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작가는 갈리와 마카쿠가 어떻게 개조되는지 보여주면서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가 정신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뿐만 아니라 주위 환경도 정신적 성장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만약에 마카쿠가 갈리처럼 태어나자마자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면 악당으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마카쿠는 화려한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도 자신을 위해서 약한 이에게서 약탈하고 아무데나 쓰레기를 뿌린다면서, 자신을 처단한다는 것이 일종의 위선이라고 외친다. 이에 갈리는 사람의 행위는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고 대답하며, 마카쿠를 쓰러뜨린다.
소년만화에서 주인공은 저 유명한 원피스라는 작품이 보여주듯이 범인들이 불가능하리라고 여겼던 꿈을 향해 도전하고 성취하며, 아울러 정신적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갈리의 첫사랑 유고의 등장은 독자들로 하여금 전형적인 문법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유고는 사이보그들의 척추를 뽑아내는 범죄를 저지르면서까지 돈을 벌어 공중도시 자렘으로 가려고 한다. 유고의 행위는 아무리 꿈을 위해서라고 미화해봤자 분명히 비 인간적인 범죄이며, 마카쿠가 더 나은 신체를 찾아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일과 다를 바가 없다. 모터볼 선수들도 명예와 부를 위해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며, 심지어 스스로의 생명도 하찮게 여긴다. 그들의 삶은 마치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파괴되어도 상관없는 기계와도 비슷하다. 사실 우리네가 늘상 입에 올리는 꿈도 대개 세상의 영광의 일부이며 이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희생이 필요하지 않은가. 명문대 입학에서부터 대기업 취직, 혹은 유명 작가가 되는 것, 곰곰히 생각해보면 무인도에서 홀로 살지 않는 한 무언가 성취를 이룬다는 것은 보통 타인을 짓밟고 올라서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는 마카쿠, 유고, 대다수의 모터볼 선수들처럼 주화입마에 걸려 죽고 만다. 하지만 모터볼 챔피언인 저슈건은 달랐다. 자신은 그들처럼 세상의 영광따윈 좇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뒤에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비로소 기계처럼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물론 저슈건의 무술 스승이 말한대로 사람도 고작 분자로 이루어진 기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한계를 벗어나는 일은 저슈건이 갈리와의 최후의 싸움에서 보여준 것처럼 죽어서 신의 반열에 올라야 가능할지도 모른다.
경쟁에서 패배한 이들은 대개 주화입마에 걸리기 십상이다. 고철마을에 살던 헌터 워리어 자팡은 갈리와 유고를 희생양삼아 돈 좀 만지려 했었지만 실패하고 얼굴을 잃어버린다. 다행히 사라라는 여성과 결혼하여 저슈건이 꿈꾸던 바로 그 평온한 삶을 살게 되지만, 갈리가 모터볼에서 성공하는 것을 보고 주화입마에 걸려 사고로 사라를 죽여버린다. 만약에 자팡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갈리와 유고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지 않았다면 평범한 헌터워리어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팡의 음모는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모든 잘못은 갈리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팡은 갈리가 분실한 광전사보디를 장착하게 되고 그 영향을 받아 갈리에 대한 복수와 증오만으로 존재하는 괴물이 되며, 이윽고 갈리가 살았던 고철마을을 잿더미로 만든다. 고철마을 사람들은 갈리에게 너 하나만 희생하면 자팡이 파괴를 멈출 수 있을 것이라고 애원한다. 갈리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걸어왔지만, 갈리에게 뒤쳐진 자팡과 그녀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이들에게 불의라는 멍에가 씌워졌다. 선한 의지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디스티 노바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까닭을 규명하기 위해 사람들을 개조해왔다. 마카쿠도 저슈건도 자팡도 디스티 노바에게 개조받았지만 누구는 신이 되고 누구는 악마가 되었다. 이 철학적 문제에 대해 작가는 자팡이 갈리에 의해 소멸되면서 꾼 꿈에서 그가 죽인 아내 사라의 입을 빌려 다음처럼 대답한다. 자신이 선하다는 것을 믿고,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꼈을 때에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왜냐하면 자신의 가치는 승패와는 다른 곳에있기 때문이다.
자팡을 쓰러뜨린 갈리는 마을을 구했지만 총기 사용을 이유로 분쇄 처리될 지경에 놓인다. 하지만 이드를 만나기 위해서 자렘의 도구가 되어 디스티 노바를 체포하러 떠난다. 갈리는 이드와 노바의 소식을 탐문하던 중 자렘에게서 독립하려는 기동해적 버잭과 조우한다. 자렘은 노예제같은 기존 질서의 유지를, 버잭은 해방과 자유의 획득을 의미한다. 하지만 자유를 추구하는 기동해적의 병사들은 고작 기계의 나사 역할만 하도록 강제된다. 대의를 위해서 사소한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변명과 함께 말이다. 반면에 갈리는 새로 사귄 친구들, 퍼기어와 요르그를 구하기 위해 자신에게 채워진 자렘의 명령을 어긴다. 그러나 결국 갈리는 요르그에게 배신당해 버잭에게 사로잡힌다. 요르그는 자유는 강한자의 특권이라고, 차라리 자신처럼 약자들은 개목걸이가 편하다고 변명한다. 요르그가 말하는 자유에는 아직 옳음이라는 개념이 혼재되어 있다. 자유란 자신을 얽어맨 사슬에서 풀린 상태를 가리킨다면, 규칙도, 문명의 이기도, 도덕도 일종의 사슬이라고 여긴다면, 자신의 생존만을 고려하는 야수만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세상은 그를 가리켜 미쳤다고 하겠지만 말이다. 갈리도 종종 전투에서 기동해적의 간부 출신으로 갈리를 습격한 너클헤드가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하게 된 것도 어쩌면 지성을 담당하는 뇌를 제외하고 모든 부분을 기계로 바꾸었기 때문에 자유라는 개념을 누구보다 더욱 논리적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에 노바박사는 이 세상에 이성과 광기따위는 없으며 오로지 천의 얼굴을 가진 광기뿐이라고, 자기 추구를 극한으로 밀어붙일 때 진정한 자유의 지평선이 보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자렘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외친 지도자인 덴에게서는 디스티 노바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광기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수많은 지상 사람들이 죽을 지라도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자렘을 쓰러뜨리겠다고 분통을 터뜨리는 모습에서는 도를 넘어서는 부분이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덴은 디스티 노바의 아들이자 물건에서 기억을 읽어들일 수 있는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지닌 케이어스의 이중인격이 이식되어 탄생되었다. 처음부터 뇌도 생식능력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인공지능을 탑재한 기계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덴은 케이어스가 읽어들인 수 세기 동안 자렘에 의해 학대받고 죄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원한과 비탄을 양식으로 삼아 자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즉 덴은 자렘 정복이라는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더이상 허구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덴은 나는 분노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외친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케이어스 역시 사이코메트리 능력 때문에 자아를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왜냐하면 어떤 기억이라도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은 속이 텅 빈 그릇이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개성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람이 부는대로 쓰러지는 풀처럼 현실에서 도피하고, 애매한 태도가 미덕인 줄 알던 방관자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갈리와의 만남을 통해 비록 아직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했지만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다른 이들의 편의대로 쓰이는 도구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작가는 덴과 케이어스라는 인물을 통해 진정한 자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이들만이 향유하는 것이라고 웅변한다. 비록 自由가 Freedom에서 비롯된 번역어이지만, 전자가 후자보다 보다 고급 개념임을 덴과 케이어스의 일화가, 그리고 다시 마지막으로 갈리가 자아를 확인하기 위해 겪어야 했던 사투가 보여준다.
갈리는 디스티 노바 교수가 있는 화강암당으로 가는 도중 자신의 복제품인 G-2와 만나 전투를 벌인다. 10년의 방랑 생활이 단지 전투 기계를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 일에 불과했으며, 자신과 전투를 벌이는 복제품이 자신과 하등 다를 것이 없음을 깨달은 갈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G-2에게 죽으려고 한다. 그러나 갈리는 평소 자렘에서 자신의 전투 도우미 역할을 했던 루우가 갑자기 G-2의 통제기를 파괴한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화강암당에서 갈리는 디스티 노바의 함정에 빠져 자신의 꿈 속에서 지금까지 싸웠던 적들 가운데 가장 강한 저슈건과 다시 한 번 붙게된다. 저슈건은 갈리에게 싸움은 자신의 한계 속에서 얼마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지 몸부림치는 마당이며, 이를 통해 비로소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예전의 갈리나 너클헤드처럼 싸움에 도취되어 머릿속을 하얗게 태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싸움 속에서 망설이고 방황할 줄 알아야 자유로의 문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종종 싸움에 비유한다. 아마도 작가 역시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그리고 이는 고철마을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사살되고, 노바 교수의 화강암당에서 탈출하려던 말이 순식간에 칼에 잘려나가고, 지상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지닌 덴이 자렘과 고철마을을 연결하는 수송관도 베지 못한 채 죽음을 당한 것처럼 대개 실패로 끝나지만 말이다. 갈리도 퍼기어와 함께 사막에서 방황 끝에 탈수증세에 걸려 죽을 뻔한 것을 때마침 비가 내리는 기적이 아니었다면 먼 훗날 모래 속의 고철로 발견되었을 것이다. 자유롭게 사는 쪽을 선택하는 것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대개 파멸과 조우하기 마련이다. 자유롭게 사는 길을 걷는 일은 죽음을 예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많은 자렘 사람들은 자신의 뇌가 컴퓨터 칩으로 바꿔치기 당해서 기계처럼 통제될 지라도 세상의 영광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이성을 가진 동물이라고 했다. 그런데 동물이 이성도 가지고 있다면 사람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총몽이라는 작품은 기계에도 이성을 부여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린 사람의 정의에 대해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작가는 작품 전체를 통해서 진정한 인간이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이며, 따라서 정해진 선로를 따라 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의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옳지 않다는 확신이 든다면 죽음이 기다릴지언정 언제든지 내릴 수 있는 용기를 지녔다고 외치고 있다. 설사 기계로 만들어졌어도 이런 정신에 눈을 뜬다면 얼마든지 인간이 될 수 있다. 반면에 사람으로 태어났어도 정해진 길을 따르기만 원한다면 기계와 다름없는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처럼 사는 삶을 택한 이들을 비난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유로의 길에는 대개 죽음과 절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자기 계발서나 관련 에세이들이 기계처럼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들에게 삶은 유일하니 언제든지 자신이 바라는 일을 하고 살라고 주문하지만, 이 길이 수난으로 점철되었다는 것을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총몽 1부가 이런 글들보다 뛰어난 작품인 까닭도 현실에 순응하는 것도 이상을 추구하는 것도 가시밭길 속에서 뒹구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