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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Jan 15. 2017

언제나, (너와 내) 가족이 먼저

서로에게 공감하는 사회를 꿈꾸며

참 많은 일들이 있었던 지난 한 달이었다. 요약하자면, 만삭에 가까웠던 아내가 무사히 레지던트 지원을 위한 인터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고, 우리 가족에 새로운 식구가 태어났으며, 나는 직장을 옮기는 것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지난 6개월을 돌이켜보면 사실 분에 넘치는 시간이었다. 내 능력 이상으로 나를 대우해주는 사람들을 만나서, 처음으로 의학이라는 학문이 꼭 삭막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격려와 칭찬이 가득한 환경에서 수련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만큼 메이요 클리닉의 모든 사람들은, 미국 문화와 미국 병원에 생소한 외국 의대 출신 인턴을 끊임없이 다독여주었고, 배움의 길로 인도했다.


'과분했다'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에서 수련을 꿈꾸며 쏟아왔던 모든 노력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달까. 이는 동부에서 내가 느낀 조금은 삭막했던 병원 분위기와도 매우 달랐다.


하지만, 아내의 인터뷰 초청이 오면 올수록, 그리고 인터뷰를 진행하면 할수록,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아내가 받은 20여 개에 가까운 인터뷰 중, 현재 우리가 거주하는 로체스터 인근의 프로그램은 오직 한 군데, 메이요 클리닉뿐이었다. 인터뷰의 90퍼센트 이상은 뉴욕을 비롯한 동부의 프로그램들에서 온 것들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 가족이 같이 살기 위해서는, 내가 메이요를 떠나 동부의 프로그램으로 이직을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힘든 결정이었다. 그렇지만 그보다 나에게 더 힘든 것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나의 멘토와 레지던트 프로그램 디렉터에게 이야기를 꺼내느냐 였다. 한국적인 사고방식에 길들여진 내게, 이유를 불문하고 수련받는 병원을 바꾼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배반'이었고, '배신'이었다. 내가 이 프로그램을 떠나면 다른 누군가가 내 몫의 당직까지 서야 한다. 그리고 프로그램 입장에서는 내가 떠난 빈자리를 계속 누군가로 메꾸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었다. 내가 미국에서 수련을 받고,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사실 '가족' 때문이었기 때문에. 내 아내, 내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더 많은 추억을 남기고 싶은 이유가 아니었더라면, 난 미국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든 이 이야기를 꺼내야만 했다. 설사 그것이 나와 프로그램 디렉터와의 관계에 금이 가게 할지라도.


*


결국 프로그램 디렉터와 약속을 잡았고, 나는 매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우리 프로그램 디렉터 교수 (미국은 레지던시 프로그램마다 프로그램을 총괄하고 레지던트 교육을 담당하는 프로그램 디렉터와 그/그녀를 보조하는 부 프로그램 디렉터 몇 명이 존재한다. 우리 프로그램의 경우 주 프로그램 디렉터 한 명과 부 프로그램 디렉터 한 명이 존재한다)는 때로는 레지던트들에게 어머니와 같으면서도, 단호한 면모가 있는 교수님으로 알려져 있다. 호불호가 분명하고,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타입이다. 난 최대한 차분하게, 덤덤하면서도 너무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 방법으로 우리의 상황과 결론에 다다르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말하는 내내 조심스러웠고,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말을 이어가자, 프로그램 디렉터가 자신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마냥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피터, 우리 생각하지 말고,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렴 (Peter, don't think about us, do what you gotta do).


뜻밖의 대답에 조금 놀랐다. 한국에서 모든 학업과정을 마친 나에게 교수들은 언제나 어려운 존재다. 사실 미국에서도 레지던시 프로그램 디렉터와 레지던트의 관계는 독특하다. 우리의 인사권에 대해 막대한 영향을 가지고 있는 교수인 프로그램 디렉터의 경우에는 그/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내 인생이 매우 힘들어질 수도 있다. 나를 혼내거나, 화를 내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가 예상한 반응은 적어도, '동료들을 위해 다시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라든가, '피터, 2-3년이면 길지 않은 시간이야. 커리어를 위해 조금 떨어져 사는 건 어떨까?'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피터, 너를 잃는 건 우리 프로그램으로서 엄청난 손실이야. 그리고 우린 정말 널 보내기 싫어. 아마 네가 떠나면 가슴이 찢어질 거야. 그렇지만, 넌 네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해. 내가 도와줄 건 뭐 없니? 추천서라든가, 너무 스트레스가 심해서 쉬고 싶다든가. 암튼 뭐든지 필요하면 말하렴. 정말 짜증 나는 상황이다 그렇지? 젠장. 욕 좀 할게, 그래도 괜찮지? "


이야기를 하는 도중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순간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가까스로 참아내고 잘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조금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감사한 마음을 가득 안고 방을 나섰다.


*


오후에는 현재 나의 멘토 교수를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했다. 내가 메이요에 처음 온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나를 누구보다도 믿어주고, 전폭적으로 지지해준 교수님이었다. 한국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혼혈인 이 교수님은 나에게 처음에 전화받는 법부터, 레지던트 생활에 도움이 될 책들을 비롯하여, 환자 보고를 하는 법, 데이터 분석하는 법, 논문을 쓰는 방법까지 하나하나 걸음마 가르쳐주듯 나를 이끌어준 분이다. 덕분에 나는 바쁜 인턴 기간 중에도, 6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논문 두 편과 학회에 발표할 포스터 두 편을 완성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이 교수님께 내 결정을 말하는 것이 프로그램 디렉터에게 말을 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나와 매주 만나며, 날 이끌어준 교수님이었고, 누구보다 날 아껴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를 듣는 교수님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다시 우리의 생각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해드렸다. 최대한 이 곳에 남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주변 프로그램들에서 인터뷰를 받지 못했고, 이제 곧 태어날 딸까지 생각하면, 떨어져 사는 건 너무 힘들 것 같다고. 그래서 이직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고.


진지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던 교수님은 갑자기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똑같이 했을 거야. 내가 자네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자네랑 완전히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거야.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답변에 이번에는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왈칵 쏟아져 나왔다. 사실 내가 이 곳에 와서 낸 논문들과 포스터들, 다 교수님이 가지고 계신 데이터를 분석한 것에 지나지 않았고, 그 조차도 교수님이 하나하나 다 지도해주셔서 나는 말 그대로 '숟가락을 얹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옮길 생각을 하기 전부터, 내가 이것을 다 이렇게 받아도 되는 것인지 죄송스러웠고, 나중에 내가 더 훌륭한 학자/의사가 되어서 이를 갚아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도 6개월 만에 떠난다고 말을 하는 제자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나를 전적으로 이해해주는 모습에 감정이 격해졌던 것이다.


"피터, 가정을 소홀히 하는 남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네가 만약에 다른 결정을 내렸다면 나는 오히려 실망했을 거야. 옮기는 것에 대해서 나나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해할 필요 전혀 없어. 넌 옳은 결정을 내린 거야."


그러고 나서 누가 이 결정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다. 사실대로 말했다. 당신을 제외하곤 프로그램 디렉터에게 오전에 말한 것이 전부라고. 그러자 그는 다시 한번 웃으며 말했다.


"Shrink (미국에서 정신과 의사를 부르는 속어) 두 명이 같은 상황에 대해 똑같이 생각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야. 그러니까, 자넨 옳은 결정을 한 거야. 커피 한잔 하러 갈까?"


커피를 마시러 걸어가는 내내, 나의 멘토는 앞으로 어떻게 계획을 짜서 어떤 식으로 이직을 준비해야 할지 이야기를 했다. 프로그램 디렉터와 상의해서 최고의 지원을 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렇게 눈물을 한 움큼 쏟은 후, 집에 가는 길에 멘토가 이메일을 보내왔다고 핸드폰에서 신호가 왔다. 같은 내용이었다. 가족을 우선시하는 네 결정은 옳은 결정이고, 이에 대해서 다시는 미안해하지 말라고. 멘토링은 원거리에서도 가능한, 장기적인 관계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라는 말도 덧붙이며. 그 날 미국 생활 1년 8개월 만에 처음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미국에 오길 참, 잘했다.

어릴 때, 모 탤런트가 아들이 죽었는데도 촬영을 계속했다는 일화가 미담처럼 뉴스에 소개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던 경험이 있다. 도대체 우리 사회에서 '일'이라는 것이 주는 의미가 어떤 것이길래, 자신의 피붙이의 죽음 앞에도 일을 강행하는 것이 미화될 수 있는 것일까. 불과 몇 년 전, 한 프로야구 선수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휴가를 요청했다가 거부당한 사건이 있었다 (참조: http://www.sportsseoul.com/news/read/267980).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같은 시기, 당시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이었던 한 선수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상황에서 컨디션 조절보다는 아내의 출산을 함께하는 것을 택했다 (투수에게 등판 스케줄을 지키는 것은 컨디션과 바로 직결되기 때문에, 등판을 거를 경우 경기에 주는 영향이 막대하다). 결국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 이 선수는 바로 다음 경기에서 보란 듯이 기록 달성에 실패했다. 기사에서는 '야구 문화의 차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그것은 그냥 '문화의 차이'다. 가족을 중요시하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는 일보다 한 시즌 100경기 이상 치르는 프로야구 게임 중 한 게임이 더 중요한 사회가 정상인가? 우리는 어쩌면 비정상적인 사회에 너무나 익숙해진 것이 아닐까. 나에게 형과 같은 2년 차 레지던트인 술리만에게 이직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가 보인 반응 또한 교수들과 다르지 않았다.


"피트 (Pete), 당연히 옮겨야지. 내가 너였으면 당연히 옮겼을 거야. 아무도 너를 비난하지 않을 거야.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 떠나는 너를 누가 비난한다면, 그건 그 사람이 이상한 거야."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우리 부 (associate) 프로그램 디렉터는 나와의 면담 중에 내가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나눌 때, 나보다 먼저 눈물을 보였다.


*


고백하건대, 나는 미국병을 꽤나 오래 앓아왔다. 다만, 보통의 미국병이 보다 원대한 세상, 큰 무대, 최첨단의 교육과 기술을 배우고 싶은 욕구에 기반한다면, 나는 '가족 중심 사회'에서 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미국을 꿈꿨다. 그래서였을까, 의료계의 디즈니랜드라고 불리는 메이요 클리닉에서 수련을 받으면서도, 나는 '미국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상상에서나 가능하던 최고의 업무 환경이었으나, 고향에 대한 향수,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는 답답함, 미세한 문화적 장벽 등이 얼버무려져, 마냥 오길 잘했다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런 나에게, 이 날의 두 멘토와의 만남은 나의 망설임을 정말 오기 잘했다는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어린 시절, 메이저리그를 즐겨보던 내가 좋아하는 선수였던 명투수 톰 글래빈이 우승을 놓친 경기를 마친 후, 기분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했던 대답을 기억한다. 그날 문득, 그가 오래전에 했던, 나를 감동시켰던 그 인터뷰가 떠올랐다.


"이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린 그저 야구 게임을 하는 것뿐이다. 나는 지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하지만, 내일 아침이면 여느 때처럼 내 딸아이의 포옹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겐 어떤 야구 게임보다 더 소중하다. "

- 1997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패배 후, 탈락이 확정되며 한 인터뷰 중에서


*


어쩌면 우리 사회는 지나친 경쟁에 지쳐, 상대방을 경쟁 상대로만 보며 자란 나머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능력인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잃은 건 아닐까. 육아휴직을 쓰겠다는 남자 직원에게, '넌 네 생각만 하냐?'라는 말을 하기에 앞서, 내가 이 대리의, 이 사원의 생각을 얼마나 했느냐를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 같은 날, 대학교 친한 친구들의 카톡 방에는 새해 벽두부터 지방 발령을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한 친구가 푸념을 늘어놓았다. 다음 주부터 바로 내려가라는 것을 그나마 사정사정해서 새해로 미루었다는 내용의 이야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화가 났고, 슬픔이 밀려왔다. 내 부하 직원의 입장을 한 번만이라도 생각했다면, 그렇게 일방적으로 통보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오늘 뉴스에서 본 유력 대선 주자라는 전 유엔 사무총장의 '지난 10년간 가족도 멀리하고 업무에만 몰두했다'는 내용의 발언은, 친인척의 비리 의혹 때문에 거리를 두는 것일지라도, 나를 또 한 번 절망하게 만들었다.  그런 마인드에 사로잡힌 지도자가 열어가는 2017년의 대한민국이 과연 인구 절벽을 극복할만한 어젠다를 제시할 수 있을까. 뉴욕에서 10년간 살아가면서, 수많은 외국 정상들과 (심지어 가정적인 남자로 소문난 오바마까지) 함께했던 시간들에서 그가 배운 것이 고작 그것이라면,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이제 가족보다 일을 우선시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한국의 저출산 문제는 가족보다 일을 중시한 문화가 만든 경제성장의 어두운 이면이다. 단순히 어두운 이면을 넘어서, 그토록 그리던 경제성장마저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양날의 검이다.


내 가족을 뛰어넘어, 남의 가족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한, 이 문화는 바뀔 수 없다. 지난 6개월간 수많은 1, 2년 차 레지던트 (병원에서 이들은 최말단 직원에 가깝다)들이 아이들이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병가를 내고, 조기퇴근을 하는 경우를 봐왔다. 그로 인해, 누군가는 일을 더해야 했고,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맡기도 했지만, 어떤 누구도 이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 곳에서 내 (혹은 내 동료의) 딸, 아들이 아픈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환자의 목숨이 걸린 일이 아닌 이상) 최우선의 가치이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


그렇게 나는 전폭적인 교수님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이직을 위한 준비를 했다. 그들의 강한 추천서는 결국 나의 이직 가능성을 높여주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 자명함에도, 두 사람은 나에게 최고로 강력한 추천서를 써주었고, 그 도움으로 나는 다음 주부터 이직하고자 하는 프로그램들을 방문하여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다. 작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프로그램들에서 인터뷰를 받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지난 6개월간 나름 발버둥 치며 치열하게 살았던 내 노력이 보상받는 느낌도 조금은 들어,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준 수많은 인연들에 가장 감사했다.


*


지금 이 글을 쓰는 와중에, 우리의 생후 일주일 남짓 된 딸아이는 나에게 고개를 향한 채, 새근새근 잠이 들어있다. 내가 이직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교수님들, 그리고 내 동료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내가 너였다면, 같은 결정을 했을 거야 (If I were you, I would have done the same)"이었다. 우리 세대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상실한 공감능력을 과연 되찾을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닐까. 내 가족만큼, 남의 가족도 소중함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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