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Feb 12. 2017

다시, 뉴욕으로

2012년 겨울, 그리고 2013년 여름을 기억하며

육아 휴직 2주 차에 이직을 위한 인터뷰 때문에 방문하게 된 뉴욕 라구아디아 공항에서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2012년의 겨울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동문 선배님의 소개로, 컬럼비아 대학에서 소아 정신과 실습을 2주간 돌 수 있었다. 겨우 본과 2년 차를 마친 상황이었고, 한국에서 조차 정신과 실습을 돌기 전이었다. 하지만, 그 2주가 나의 인생 경로를 완전히 바꾸어놓을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너무나 다양한 인종적, 사회경제적 배경의 환자들, 그리고 정신과 의사, 임상 심리학자, 사회복지사, 교사들의 짜임새 있는 팀워크를 보면서, 감동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처음으로 미국에서 정신과 수련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뉴욕에서, '컬럼비아와 같은 유수의 병원에서 수련을 받을 순 없겠지만', 이란 단서가 붙었지만. 나는 뉴욕의 다이나믹함에 빠져들었고, 하루하루 병원을 걸어가던 때의 행복한 기억이 지금도 종종 떠오른다. 작년 맨하탄 내의 한 중소병원에서 인터뷰를 받았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다시 느꼈었다. 아주 만족스럽지 않았던 프로그램이었음에도, 그곳을 가장 높게 랭크해서 내 꿈이 시작된 곳에서 레지던트 수련을 받고 싶은 충동이 들었을 정도로.

컬럼비아 의과대학 병원인 New York Presbyterian 병원에 걸려있는 현수막. 2012년 겨울은 나에게 놀라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출처: ecomanta.com)

 

한 달간 숨 가쁘게 진행된 이직 과정이 마무리되었고, 나는 뉴욕대학 (NYU) 정신과 2년 차로 오는 7월부터 일하게 되었다. 작년에는 인터뷰받는 것조차 상상하지 못한 프로그램인지라, 지금도 사실 믿기지가 않아서, 병원에서 일을 하다가도 가끔씩 놀라게 된다. 그리고, 감사하게 된다.


12월 중순, 우리 프로그램 디렉터와 이직에 관한 상담을 한 후, 나는 뉴욕을 비롯한 동부의 프로그램들에 이메일을 돌렸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해서,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닌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우선은 내가 정말 가고 싶은 프로그램들에만 이메일을 돌렸다. 미국 최고의 정신과 프로그램으로 꼽히는 컬럼비아를 비롯하여, 최고의 심리 치료 (psychotherapy) 교육을 자랑하는 커넬 대학, 가장 다양한 환자군과 임상 교육을 자랑하는 뉴욕 대학, 그리고 뉴욕 내의 명문 의과 대학인 마운트 사이나이 대학 프로그램에 이메일을 보냈다. 이 중 커넬 대학은 정기적으로 2년 차를 두 명 뽑고, 나머지 프로그램들은 2년 차를 따로 뽑지는 않는다. 커넬 대학은 이미 2년 차 계약을 모두 마무리했다고 답변이 왔다. 컬럼비아는 빈자리가 없다고 짤막한 이메일을 보내왔다. 마운트 사이나이는 아예 답장이 오지 않았다. 이 중 오직 뉴욕대학만 신기하게도, '지금은 자리가 없지만, 혹시나 자리가 날 때를 대비해 너의 이력서를 보관해 두겠다'는 답변을 보내주었다. 빈 말인듯한 그 말이 나는 그저 고마웠다. 그렇지만 기대는 하지 않았다. 추가적으로 뉴욕, 보스턴 등지의 다른 프로그램들에도 수많은 이메일을 돌렸고, 여전히 빈자리가 없다는 답변이 절반, 아예 답변을 하지 않는 프로그램이 절반 가량 되었다. 그렇게 초조함은 이어졌다. 잠시 연구 조교로 있었던 예일 대학교 (예일 또한 정기적으로 2년 차를 두 명정도 모집한다) 또한 나의 멘토이신 교수님을 통해 이직에 관한 문의를 했고, 이미 인원을 다 채웠다는 연락을 받았다.


'너무 늦게 알아봤구나'


자책감이 밀려왔다. 조금만 더 일찍 연락했다면 더 많은 기회가 있었을 텐데. 나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프로그램 디렉터와 멘토를 보며 더더욱 아쉬움을 느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때에, 예일의 멘토 교수님을 통해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예일 대학교에서 추가적인 지원금을 통해 2년 차 자리를 충원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는 소식이었다. 원래 뽑는 두 명자리에 한 자리를 더 구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우리 프로그램 디렉터에게서도 이메일이 왔다. 다트머스 대학에서도 추가 지원금으로 2년 차 자리가 하나 추가되었고, 그 자리에 추천할만한 이직을 원하는 정신과 1년 차를 추천해달라는 이메일을 다트머스의 프로그램 디렉터가 전국의 모든 프로그램 디렉터에게 보낸 것이었다.


'아, 이 사람은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날 도와주려고 하고 있구나.' 프로그램 디렉터에게 생길 수 있는 최고의 악몽은 아마, 레지던트 자리에 공석이 생기는 것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프로그램 디렉터는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도 나의 앞 길을, 나의 행복을,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가족을 생각해주는구나. 다시 한번 마음이 찡했다. 그렇게 조금씩 희망의 한 줄기 빛이 생겼지만, 여전히 불투명했다. 사실 다트머스는 아내가 일하게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뉴욕 지역과는 최소 네 시간은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고, 예일대학교 또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데다가 추가적인 자리가 생길지 여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게 불확실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현재 메이요의 멘토 교수님과 여느 때처럼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개인 지도(supervision)를 받게 되었다.


이직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냐고 묻는 교수님께, 현재 예일대와 다트머스가 잠재적인 후보이지만, 사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이대로 계속 지지부진하게 진행이 된다면 아마 우리 가족은 떨어져 살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최악의 경우에는 3년을 떨어져 살아야 하고, 대안으로 우선 1년을 떨어져 살면서, 2년 차를 뽑는 다른 프로그램들에 메이요에서 2년 차를 마친 후 다시 지원을 하는 방법 (즉, 2년 차를 두 번 하는 방법)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상담을 마칠 무렵, 핸드폰에서 이메일이 왔다는 진동이 울렸다. 뉴욕대학 부 (associate) 프로그램 디렉터에게 온 이메일이었다. 아마 2년 차 자리가 하나 생길 것 같으니, 필요한 서류들을 보내줄 수 있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멘토 교수님께 이 소식을 전했고, 교수님은 오늘 일과가 끝나고 자기 연구실로 오라고 했다. 그렇게 일과 후, 교수님은 내가 보는 앞에서 나를 누구보다 강력하게 추천하는 내용의 추천서를 써서 보내주셨다. 프로그램 디렉터 또한 내 소식을 듣고, 바로 추천서를 작성해주겠노라 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척척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트머스, 예일, NYU의 인터뷰가 3일 일정으로 잡혔다.


다트머스는 지리적인 이유 때문에 나에게 이상적인 프로그램은 아니었다. 결국, 나의 목표는 예일과 NYU로 좁혀졌다. 예일대가 위치한 뉴헤이븐은 사실 우리 부부에겐 의미가 있는 곳이다. 2015년, 처음 미국을 건너왔을 때 우리 부부가 처음 거주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거의 2년 만에 오게 된 뉴헤이븐에서, 나는 무사히 인터뷰를 마치고, 처음 나를 미국에서 연구조교로 받아주셨던 멘토 교수님과 간단히 저녁 식사를 했다. 예일대 프로그램은 레지던트들의 자율성이 무한히 보장되는 프로그램이었다. 업무 강도 또한 매우 낮은 것으로 유명했고, 레지던트들은 자유 시간을 스스로의 관심사에 맞게 최적화시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연구를 하고 싶은 사람은 연구를 하고, 지역사회 활동을 하고 싶은 레지던트는 지역 사회와 관련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사람들의 친절함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특히나 프로그램 디렉터만 10년 가까이해 온 교수님은, 내가 인터뷰를 통해 만난 프로그램 디렉터 중 가장 인상이 좋은 분이었다. 예일대는 현대 정신과학 연구를 이끌어가는 수많은 석학들로 가득했다. 연구자로서의 진로를 꿈꾸는 정신과 의사에게 이보다 좋은 프로그램은 많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인터뷰를 무사히 마치고 뉴욕을 향해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에 몸을 실는 순간, 아내와 함께 뉴헤이븐에서 종종 기차를 타고 뉴욕, 뉴저지를 놀러다니던 2015년 여름이 생각났다. 두 시간여 기찻길을 달려, 그랜드 센트럴 역에서 내리는 순간, 2013년 여름이 자연스레 찾아왔다. 뉴욕은 우리 부부가 처음으로 여행을 떠난 도시이다. 2013년 봄, 우리는 처음 연인이 되었고, 그해 여름, 나는 컬럼비아 소아 정신과로 다시 한번 실습을 떠나게 되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미국 생각이 전혀 없는 아내 (그 당시는 여자 친구)를 만났기 때문에, 미국에서 수련을 꼭 받아야겠다는 의지가 많이 약해져 있던 때였다. 내 온 관심은 우리의 여행 계획에 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2주 동안 뉴욕, 워싱턴 DC, 보스턴 여행을 정신없이 다녔다.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던 뉴욕은 정말 샅샅이 돌아다녔고, 하루 종일 걸어 다녀도 힘들지 않고 마냥 행복했던 기억.


맨하탄 남부의 배터리 (Battery) 파크의 전경 (출처: dguides.com)

                            

그 당시 자유의 여신상을 한 바퀴 도는 페리를 탄 후 배터리 파크에서 아내와 앉아서 처음으로 미래에 대해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눴었다. 미국에서의 수련에 대해서도 진솔하게 이야기를 했었다. 그때 나는 아내와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자세한 맥락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 사람과 함께라면, 그곳이 한국이든, 뉴욕이든, 미국이든 간에, 행복할 거라는 생각을 처음 했었다.


그렇게 아련한 기억을 묻고, 나는 하룻밤을 호텔에서 자고 뉴욕 대학교 인터뷰에 임하게 되었다. 간단한 프로그램 소개를 마친 후, 현재 1년 차인 레지던트의 인솔로 주 로테이션 병원 투어를 했다. 전 날 예일대학에서 너무 좋은 인상을 받은 후였던지라, 사실 머릿속에서는 지레 김치국을 사발로 들어마시며, 혼자 두 프로그램 중 어떤 프로그램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나름의 고민을 하던 때였다. 뉴욕대학교 병원인 랑곤 메디컬 센터 투어를 마치고, 뉴욕대학 정신과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벨뷰 (Bellevue) 병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병원인 벨뷰 병원은 1736년 처음 설립되었다. 공중 정신 보건 (Public Psychiatry)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이 병원은 말로만 전해져 오던 '꿈의 병원'이었다. 900 병상 중 정신과 병상이 300 병상 이상을 차지하며, 이 곳의 정신과 응급실 (CPEP - Comprehensive Psychiatric Emergency Program, 미국 전역에서 뉴욕 주에만 존재하는 정신과적 환자를 다루는 응급 프로그램)은 1년 당 14,000명 이상의 정신과 환자가 방문하는, 뉴욕의 정신적으로 가장 고통받는 환자들이 치료를 받는 곳이다. 그렇게 평소 주워 들었던 사실들과, 레지던트의 설명들이 머릿속에서 복잡히 얽히고, 마음 한 켠에는 예일대에 대한 생각이 나를 간지럽히는 상황에서 벨뷰 병원을 들어서는 순간, 내 머리에 가득 차 있던 상념들이 말끔히 정리되는 경험을 했다.


벨뷰 병원 정문은, 과거 벽돌 건물에 신식 건물을 증축한 구조로 되어있다. (출처: nyc.gov)

                                               

 Bellevue 병원에 들어서서, 250년 넘은 벽돌 건물을 본 순간,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메이요가 최첨단 의학을 지향하는 사람에게 최적의 병원이라면, 벨뷰 병원 안은 말 그대로, 공중 정신 보건을 원하는 정신과 의사에게 꿈과 같은 환경이었다. CPEP에서 만난 주황색 수의를 입고 수갑을 찬 환자들부터, 병원 내에 자리한 법정, CPEP을 방문하는 수많은 환자들 중 가장 교육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은 환자들만 보낸다는 정신과 레지던트들이 담당하는 병동까지. 내가 지금 이 곳에서 인터뷰 초청을 받은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내가 처음 미국행을 꿈꿨을 때 그리던 정신과 프로그램이, 바로 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예일대가 정신'의학자 (혹은 연구자)'를 위한 최적의 프로그램이라면, 뉴욕대는 정신과'임상의사'를 위한 최고의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연구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것은, 다양한 환자들 (그중에서도 사회적으로 소외된 환자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치료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그 날의 짧은 투어는 나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어떤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은가'


뉴욕대학교는 일 강도가 높기로 소문난 뉴욕 프로그램들 중에서도 가장 업무 강도가 세기로 유명한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레지던트의 자율성과 삶의 질이 높기로 유명한 예일대와 가장 극명히 구분되는 차이는, 바로 임상에 쏟는 시간에 있었다. 이는 뉴욕대학의 레지던트들도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열심히 일해야한다. 하지만, 졸업할 때엔, 어떤 환자도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고 졸업하게 된다.'


그렇게 투어를 마치고, 레지던트들과 점심식사를 한 후에, 프로그램 디렉터와 부 프로그램 디렉터와 동시에 면접을 보게 되었다. 두 사람 모두 나를 너무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내가 두서없이 나의 살아온 인생과 앞으로 펼치고 싶은 인생에 대해 늘어놓는 이야기들을 경청해주었다. 그들은 현재 1년 차 중에 내과로 과를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겼으며, 아직 서류 작업이 마무리가 된 것은 아니지만 거의 빈자리가 날 것이 확정적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모든 인터뷰가 끝날 무렵, 프로그램 디렉터가 나에게 그 자리를 채워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미 투어를 통해 마음을 거의 굳힌 상태였으므로, 솔직한 내 상황을 설명했다. 현재 다트머스와 예일에서도 인터뷰를 마친 상태이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뉴욕대학에서 수련을 받고 싶다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2년 차에 공석이 생긴 것이 정말 오랜만의 일이라고 했다. 만약 내가 뉴욕대학교에 이메일을 더 일찍 보냈거나, 더 늦게 보냈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다른 곳에 계약을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아예 새로운 자리를 포기하고 메이요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살게 되진 않았을까. 하늘이 도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인터뷰를 마친 후, 10시간의 비행 끝에, 나는 로체스터로 돌아왔다. 사랑하는 아내와, 생후 2주일 된 딸이 나를 맞아주었다. 3일 사이, 딸아이는 훌쩍 커있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우리가 몇 년간 떨어져살 생각을 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예일대학교 프로그램 디렉터에게서도 매우 긍정적인 이메일을 받았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나는 돌아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뉴욕대학교에서 공식 계약서를 받았고, 서명을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4년 전 여름, 뉴욕에서 꿈꾸었던 모든 것들이 현실이 되었다. 내가 미래를 함께하겠노라 다짐했던 사랑하는 아내와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고, 뉴욕의 다양한 환자군을 치료하며, 동시에 양질의 수련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에서 나의 임상능력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말콤 글레드웰은 베스트셀러인 그의 저서 <아웃 라이어>에서 한 사람의 성취는, 그 사람의 시대적 배경과, 삶 속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서 도움을 받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했다. 지난 5년 간, 나를 이끌어주었던 수많은 감사한 스승들을 기억한다. 5년 전,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처음 임상 실습 기회를 제공해주었던 소아 정신과 교수님은 이번 이직 과정에서도 나에게 추천서를 써주셨다. 어마어마하게 바쁘기로 유명한 이 교수님은, 내가 급하게 마감 이틀을 앞두고 추천서를 부탁했는데도, 기꺼이 추천서를 써서 보내주셨다. 뉴욕대와 계약을 마친 후, 이 교수님을 다시 뉴욕에서 뵐 생각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메일을 드렸다. 소아 불안 장애의 대가인 이 교수님은 7월부터 듀크 대학의 정신과 과장으로 스카우트가 되었다고 답변이 왔다. 그래서 아마 시점이 엇갈리게 되어 뉴욕에서는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진심을 담아 축하의 인사를 드렸다. 마찬가지로, 예일대학교의 멘토 교수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예일대에서 교수님을 1년여만에 다시 뵈었을 때, 나는 마치 친척 어른을 만나는 것 마냥 반가움을 느꼈다. 동문후배라는 이유로 이끌어주신 모든 선배님들. 의과대학 시절 지도교수님은 언제나 바쁜 일정에도, 그리고 그다지 훌륭한 학생이 아니었음에도, 나에게 최고의 추천서를 써주신다. 이 분들이 안 계셨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로체스터에서는 현재 메이요의 프로그램 디렉터와, 멘토 교수님께 직접 찾아가서 소식을 전했다. 두 분 모두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가족'을 위해 기뻐해 주셨다. 두 분의 메시지엔 변함이 없었다. 나를 잃는 것은 아쉽지만, 우리 가족이 떨어져 살지 않게 되어 기쁘다는 것 (We'd hate to lose you. But I'm happy for you and your family). 레지던트 동료와 선배들에게도 소식을 전했고, 모두 진심을 담아 나에게 지지의 메시지를 보내줬다. 물론, 가장 먼저 2년차인 술리만에게 말을 했고, 그는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었다. 이 외에도 지난 5년간 도움을 주신 너무나 많은 감사한 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분들께 내가 받은 사랑을 갚는 방법은, 우선, 받은 도움을 늘 잊지 않고 감사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분들이 나에게 그랬듯이, 기꺼이 도움을 주는 길 뿐이다.  


감사할 일로 가득했던 2017년 첫 한 달이, 그렇게 저물어갔다.





작가의 이전글 언제나, (너와 내) 가족이 먼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