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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Oct 04. 2016

노인 병동 근무를 마치며

노인들도 똑같이 아프다

메이요에서의 세 번째 근무지는 노인병동이었다. 늘 누군가가 정신과 레지던트를 마치면 전공하고 싶은 분과가 있느냐고 물을 때면, '노인 정신'이라고 대답하곤 했었던 나였기 때문에 가장 기대하던 근무지 중 하나였다.


5주간의 근무를 마친 지금, 누군가가 같은 질문을 한다면 이전처럼 자신 있게 대답하긴 힘들 것 같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노인 정신 병동에서의 근무는 지금까지의 근무지 중에서 나에게 가장 많은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었고, 가장 큰 보람을 주었다고.


*


우리는 다 언젠가는 늙는다. 조금씩 달라지곤 있다지만, 미국 또한 늙음은 젊음의 반대말, 즉 긍정적인 인상보다는 쇠약함이라는 이미지로 대변된다. 노인 병동을 들어설 때의 나의 느낌 또한 그러했다. 에너지가 넘치던 성인 급성 정신 병동과는 달리, 노인 병동은 어쩐지 힘이 없이 처지는 느낌이었고, 조용하고, 침잠해가는 기분이었달까. 물론, 이는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노인 병동 첫 근무 날, 한 할아버지는 폐렴이 악화되어 심정지가 올뻔했었고, 결국 그날 밤, 죽을 고비를 한번 넘긴 끝에 내과 병동으로 옮겨져야만 했다. 수많은 노인 환자들은 수없이 많은 내과적 질환을 함께 앓고 있었고, '나이 듦'에 대한 나의 편견을 강화시켜주었다. 분명 이 병동에는 활기찬 에너지가 존재하지 않았고, 다른 병동과 달리 매우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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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회의 노인에 대한 편견에 사람들은 마음 한편으로 죄책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렇게 쇠약한 노인들은,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 일수도 있고, 어머니, 아버지일 수도 있으며, 머지않은 나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반대급부로 사람들은 노인들에게 '현명함'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한다. 작년 개봉한 로버트 드니로 주연의 <인턴>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와 같은 사회의 가치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노인들은 연륜이 있고, 현명하며, 통찰력이 있다. 사실 이 영화는 그러한 클리셰로 점철되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노인은 과연 현명한가?


세계 보건기구(WHO)는 노인을 65세 이상의 인구로 규정하고 있다. 요즘 같은 고령화 시대에는 이 연령을 70세, 75세로 상향 조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들도 나온다. 하지만 그와 같은 기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64세의 성인이 65세가 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우리 인생이 스펙트럼이라면 누군가를 노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연구라든가, 통계 조사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잘 모르겠다.


*


내가 노인 병동에서 느낀 의문은, 노인이 정신적으로 성숙하다고 믿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 사회가 만든 하나의 신화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노인들이 몸이 더 쇠약한 것은 사실이고, 대사가 느려지므로 약물을 처방하거나 끊을 때에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 반대급부로 노인은 정신적으로 성숙한가? 나는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고스란히 노인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노인도 똑같이 아프다.


우리는 흔히 '나이 듦'과 '정신적 성숙'을 동일시하거나, 이 둘의 상관관계가 매우 강하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사실 둘은 전혀 비례하지 않을 수 있음에도. 대학생 시기에 한 친구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고등학교 때 뭔가 대학생 언니, 오빠를 보거나, 20대 후반의 회사원들을 보면 왠지 엄청 성숙해 보이잖아. 생각도 깊을 것 같고. 그런데 지금 우리 모습을 보면 사실 고등학교 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지 않아? 난 나이가 들어도 그럴 거라 생각해. 우리가 40대, 50대가 된다고 크게 달라져있을까?"


사실 돌이켜보면, 속이 깊은 친구들은 이미 십 대 때에도 충동적이거나 사려 깊지 못한 40대의 아저씨들보다도 성숙해있었다. 정신과적 질환을 앓고 있는 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젊었을 때 아팠던 노인들은 여전히 아팠고 (어떤 이들은 더 심하게 아팠고), 여전히 헤매고 있었다. 나의 노인 병동 근무 마지막 날, 젊은 시절 한 번도 정신과적 질병을 앓지도, 우울하지도 않았던 한 할머니는, 65세가 넘어서 처음 다가온 딸과의 관계 악화로 인해, 우울증을 호소하며 병동에 입원했다. 이 할머니와의 면담은, 첫 우울증 발병으로 인해 소아 병동에 입원한 중학생 소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할머니는 처음 다가온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에 어쩔 줄 몰라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


이 외에 노인 병동에서 느낀 점은 사랑의 위대함, 그리고, 부모의 내리사랑이었다. 하루에 두 시간 걸리는 거리를 매일 회진 시간에 맞춰 운전해 왔던 한 할아버지도, 6시간 넘는 노스 다코타의 한 도시에서 아내를 데리고 병원에 입원시킨 후, 3주 내내 호텔에 머물며 극진히 간호하던 할아버지도, 아내 없이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15분마다 소변을 봐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남편을 극진히 간호하던 할머니도 모두 위대한 사랑의 실천가였다. 40년, 45년 이상을 함께 해온 노부부들은 아픈 배우자를 위해서 그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운전을 해서 병원을 오고, 병간호를 하였고, 하루 종일 곁을 지켰으며, 차도를 보이자 누구보다 기뻐했다. 극심한 우울증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긴장증 (catatonia, 이상한 행동을 반복한다든가, 한 곳을 뚫어져라 쳐다본다든가, 이상한 자세로 가만히 있는다든가 하는 정신과적 증세)까지 보이던 한 할머니는 전기경련 치료(ECT)를 받은 후 급격히 호전되었었다. 입원 이후로 한 번도 웃지 않았던 할머니는 처음으로 대화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고, 의료진을 보며 웃음을 지었었다. 그때 흥분된 남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한낱 일 년 차인 나를 자신의 아내의 생명을 구한 명의처럼 대해주었다. 그 날 남편은 마치 첫 데이트를 하는 젊은 남자처럼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병실 복도를 내내 걸어 다녔다.  


조증이 재발하여 병원에 입원한 한 할머니는, 스스로를 돌보지 못해 병원에 입원했었다. 퇴원을 준비하는 할머니는, 그녀를 데리러 와야 하는 두 딸들이 바쁘다는 이유로 병원에 오지 않아, 병원에 며칠 더 머물러야만 했다. 할머니는 종종 딸들이 자신 들의 딸들을 돌보느라 돈도, 시간도 없어서 당신을 버리려고 한다며 하소연하곤 했었다. 퇴원하는 날짜를 정할 때에도, 할머니의 딸들은 이제는 성인이 된 자신의 자녀들의 대학 학비를 대주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느라 정신 병동에 입원한 할머니를 외면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할머니는 딸들을 이해함과 동시에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도대체 부모 자녀의 관계가 어떤 것이기에 저렇게 끊임없이 내리사랑이 이어질 수 있을까. 아직 배속의 딸아이를 만나지 못한 나로서는 쉽게 짐작하기 어려웠다.


*


어떤 중증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과연 내가 누군지 기억할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한없이 해맑은 표정의 이 할머니는, 갈수록 심해지는 피해망상과 환후 (존재하지 않는 냄새를 맡는 종류의 환각)로 병동에 입원했다. 바로 옆집의 이웃이 알 수 없는 마약을 제조한다고 믿고 있었고, 이 냄새와 자신을 해할 것이라는 망상 때문에 괴로워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었다. 사실 이 할머니는 병동에서 전혀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마음이 쓰였던 환자이기도 했다. 할머니가 퇴원하기 전날, 기존에 언급한 적 없었던 발가락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검진 상으로 어떤 이상도 보이지 않았지만, 할머니가 걱정되어서 꼭 퇴원을 하면 주치의에게 말씀하시라고, 남편에게도 말해두겠다고 당부하던 찰나에 갑자기 할머니가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나에게 내가 당신의 의사여서 너무 다행이라고 말했다. 나는 당황해서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그동안 의사들을 만나서 안 좋은 경험을 너무 많이 했는데, 나를 만나서 좋았다고 했다. 순간적으로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

다.

'다 기억한다 환자들은. 머리가 기억을 못 하더라도.'


나도 모르게 그런 의심이 들었었다. 이 할머니가 날 기억이나 할까? 매일매일 봐도 처음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곤 했었던 할머니였기 때문에. 솔직히 말하면 다른 환자들보다 덜 시간을 썼을지도 모른다. 이 할머니는 퇴원하기 전날까지 내 이름을 몰랐다. 치매란 인지기능을 갉아먹는 병이니까,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그래도 할머니는 의사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기억하고 있다. 앞으로 어떤 환자를 만나더라도, 그들이 만날 때마다 내 이름을 묻고, 만날 때마다 똑같은 질문을 하더라도, 나는 그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겠노라 다짐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


사실 영어는 나에게 크나큰 장애물이다. 환자의 말을 알아듣는 것도, 내가 환자에게 내 생각을 전달하는 것도.


'아 한국말로만 인터뷰를 할 수 있다면... 더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을 텐데'


라고 자주 생각했었다. 하지만 한 한국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그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메이요 클리닉에 펠로우쉽 인터뷰를 하러 온 이 정신과 선생님은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었다.


환자들을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만 있다면, 환자들은 언어가 좀 덜 통해도 의사를 신뢰하게 돼요. 정신과 환자들이 얼마나 예민한데요. 다 알아요. 이 사람이 날 진짜 위하는지, 그런 척하는 건지.


그 말을 듣고 큰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반성을 많이 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회진을 돌거나, 환자의 처치를 논할 때, 환자보다 오히려 같이 회진을 돌거나 나를 감독하는 교수를 더 의식하곤 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회진을 돌 때 인터뷰를 할 때면, 내 앞에 앉아있는 환자만을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이 말을 하면 이 교수가 어떻게 날 평가할까', '이렇게 인터뷰를 하면 교수한테 혼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나의 머릿속을 채우곤 했었고, 환자에 대한 약물을 처치할 때도, '이렇게 논문을 많이 찾아보고 노력한 걸 알면 이 교수가 좋아하겠지?' 이렇게 생각했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어찌 보면 환자를 볼 때, 나는 환자의 이익을 최우선시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덜 혼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교수들한테 칭찬받을 수 있을까 고민했었던 것 같다.


나는 이것이 내가 받은 교육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돌이켜보면 나는 늘 누군가에게 인정받아야 하고, 잘못하면 혼나는 교육을 받았던 것 같다. 이것이 한국의 교육이라고, 한국의 교육을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한국 교육이 실제로 그렇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내가 다른 나라의 교육 방식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 내가 아는 것은, 나는 그런 교육방식이 참 싫었다는 사실이다. 고등학교 때도, 의과대학 때도, 남들 앞에서 망신 주거나 인격모독적인 발언을 하는 선생님이나 교수님들에게 혼나면 그것이 그렇게 싫었고, 그런 경험들이 지금의 나의 태도를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 대한 타인의 (특히 상급자의) 평가를 의식하는 것이 체화되었다고 해야 할까. 암튼 그랬다.


그 정신과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후 내가 180도 바뀌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오래된 습관, 내 몸의 일부가 된 그 성향을 하루아침에 지울 수 있다면, 세상에 어떤 사람들이 정신과적 질병으로 고통받을까. 하지만 적어도 그 이후로 나는 내 앞에 있는 환자를 진심으로 위하고자 노력은 할 수 있게 되었다. 회진 중에도 나를 지도하는 교수보다는 환자의 기분에 더 귀 기울이기 위해 노력했고, 환자가 이를 느낄 수 있도록 내 진심을 담아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이런 나의 태도 변화로 인해 영어에 대한 나의 생각도 바뀌게 되었다.


'나는 영어가 완벽하진 않지만, 당신을 진심으로 위하는 의사다'


라고 스스로 되뇌자, 스스로를 덜 의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


이 시각 한국에서는, 한국 최고의 병원에서 숨진 한 환자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다. 앞선 글에서도 밝혔듯이, 내가 메이요 클리닉을 오겠다고 선택한 이유는 메이요 클리닉의 정신 때문이었다. 메이요 클리닉의 설립자 중 한 명인 윌리엄 메이요는 수많은 명언을 남겼지만, 결국 메이요 클리닉을 관통하는 한마디는 바로 이것이다.


환자의 이익만이 의료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가치이다 (The best interest of the patient is the only interest to be considered).


사실 나는 이 말이 윌리엄 메이요가 남긴 말 중에서 가장 진부한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 시국을 보니, 그가 왜 이 말을 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 그것도 대형 병원은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환자의 이익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것은 아마 이 세상 어느 대형병원을 가게 되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윌리엄 메이요는 이 진부해 보이는 말을 그의 최우선 가치로 삼은 게 아닐까.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다가, 한 3년 차 레지던트가 우리 프로그램에 관심을 보이는 한 의대생에게 자신이 메이요에서 보낸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병원을 관통하는 이상주의에 대해서 그는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가만히 있던 나에게 지난 3개월이 어땠느냐고, 자기가 한 말에 동의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나는 나 또한 이상주의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너무 만족스럽노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삼 년 차가 나에게 말했다.


맞아 그게 우리의 숙제지. 메이요에서 그 이상을 배워서 계속 이 곳에서 환자를 볼 지, 아니면 이 세상의 다른 곳들을 메이요처럼 만들기 위해 노력할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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