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Feb 14. 2020

그녀의 신발을 신고 걷다

타인에게 온전히 공감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하여

그녀와 환자-의사로 만난 지는 이제 일 년 반 남짓 되었다. 휴가를 제외한 매주 45분-한 시간 동안 우리는 심리-약물 치료를 병행하였다. 자살 생각으로 내원한 그녀의 치료를 동행하는 초기에는 하루하루가 마치 급한 불을 끄는 소방관이 된 느낌이었고, 그 불씨가 조금 잦아들었을 때부터는, 조금 더 그녀에 대해 깊이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정신과 레지던트로서 나는 매주 다섯 시간을 각각 다른 분야의 전문가 들과 일대일로 만나 한 주간의 외래 환자 들에 대해 의논하고, 조언을 구하고, 가르침을 얻었다. 일 년간 이들과 가장 많이 논의한 환자는 단연 그녀였을 것이다.



그녀는 트랜스젠더다. 이미 십 대 때부터 본인은 여성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한 번도 이 사실에 의심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십 대 때 수술을 받고, 생물학적인 남자로 산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여성으로서 살아왔다.


보통 우울증을 겪는 환자들은, 본인의 선택에 대해, 반추(반복해서 생각하는 것; rumination)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본인이 특정한 진로를 선택한 후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든가, 어떤 사람을 만나 인생이 불행해졌다고 생각하는 등, 다른 선택을 했으면 본인의 현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후회하는 것이다. 아마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선택에 대해 옳은 결정이었는지 자문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지 않을까.   


만성적인 우울증을 겪는 그녀 또한 지난 삶에 많은 후회가 있었다. 제삼자가 보면 그녀의 모든 불행은 성전환을 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파혼, 이혼을 당하고, 가족과 멀어지고, 음지를 전전하며 살게 된 그녀. 하지만, 나는 그녀가 한 번도 본인의 전환 과정을 후회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그녀에게 여성으로 사느냐 남성으로 사느냐는 애초부터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언젠가 그녀에게, 그녀가 그리는 미래에 대해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대답했다.


선생님, 저는 사실 1-2년 후에 제가 살아있을 지도 장담할 수가 없어요. 저는 그렇게 먼 미래를 보며 살아본 적이 없어요.


 

그녀의 치료 과정은 때로는 감당이 안될 정도로 힘들기도 했고, 스스로의 한계를 느낀 적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정신과 의사로서, 내가 그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최선은 그녀를 내 가치관으로 재단하지 않고, 그저 이야기를 편견 없이 들어주는 일뿐이라고 되뇌었었다.


어느 날 그녀가 이십 년도 더 된 옛날에 했던 성전환 수술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수술 기술이 훨씬 발전하지 못했던 당시, 얼마나 위험한 수술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그 때에도, 목숨을 건 선택이 아닌, 그저 삶의 당연한 수순이었다는 듯 덤덤히 이야기했었다.


지난 일 년 넘는 기간 동안 그녀는 말 그대로 모범 환자였다. 한 번도 치료에 늦은 적이 없었고, 늘 본인이 겪는 감정과 증상에 대해 기록하고 모니터 하고, 꼬박꼬박 설명해주던 그녀. 왜 그럴까에 대해서 고민하던 나에게 누군가 이렇게 속삭였다.

 

'이 상담실에서 한 발자국 나가면 그녀는 무조건적으로 본인의 이야기를 편견 없이 들어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스스로 되물었다.


이 상담실에서 한 발자국 나가면 나는, 그녀를 아무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을까.


이 상담실에서 한 발자국 나가면 나는, 그녀를 아무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을까?


이 브런치의 메인 사진은 반 고흐가 그린 신발이다.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라 (walk a mile in one's shoes)”라는 말을 스스로 떠올리기 위해서다. 사실, 누구도 (모든)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걸어볼 순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구는 나에게 타인의 경험, 관점, 삶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는 자경문과도 같다.

 

반 고흐의 <신발> (1887)


레지던트 졸업과 함께 이제 곧 나는 그녀와의 치료를 마무리할 것이다. 아마,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나는 그녀의 삶의 대부분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그녀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환자의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일부 내용이 각색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작가의 이전글 문제의 본질은 악플이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