셈해진 것 - ‘아직’ 셈해지지 않은 것
셈하고 다시 셈하기
“[이중의 구조] 그것의 필연성은 다음의 지점에 있다. 즉 일자가 없는 상태에서, 그 자신의 복제물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내는 일자는 그 자신에 고유한 실행적 속성에 의한 것에 불과하다. 고로 그 필연성은 자신의 진위를 보증하기 위해 일자-효과가 전개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위성은 여기서는 고유하게도 셈하기의 허구적 연출인데, [이것은] 그 자신의 셈의 실행 속에서 다시 파악되어 부여되는 상상적 존재에 의한 [허구화인] 것이다.”
상징계와 실재의 접합점으로서 공백, 그곳은 공백의 이름의 가능성들로 간주되었다. 존재하지 않는, 일관성의 세계에 편입되지 않은 순수다수의 어느 한 점에 이름이 붙여지고, 무수한 기표연쇄가 따라붙는다. 그리하여 기표의 세계는 하나의 강력한 틀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파악된 것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1차 효과를 발생시킨다.
하지만 이처럼 강력한 존재의 질서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세계의 확실성의 토대는 단순한 질서 이름 그 이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셈 자체는 셈으로부터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집합론적 구조 내부로부터 셈하기가 어디에 있는지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즉, 셈을 실행하는 기능이자 질서를 명령하는 그 기능이 바로 셈의 외부에 위치한 것과 같은 도착적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라깡의 공식인 “대타자의 대타자는 없다”를 환기시켜 보자. 일자가 있다는 강력한 환상 속에 빠져들게 된다면 우리는 어느 길로 접어들게 될 것인데, 엉성한 임의의 초월자에 모든 질서를 내맡기거나, 어떤 질서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허무주의, 둘 중 하나를 말이다. 어느 것도 카오스로 접어들게 되는 결말을 막진 못한다.
카오스로 접어들게 되는 과정을 바디우는 부분집합에 빗대어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부분집합의 원소들은 원-집합에 귀속된다. 그러나 각 부분집합의 이름은 1차 현시에 포함만 되고 귀속되진 않는다. 부분집합의 위상, 혹은 위계는 원-집합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애써 하나의 질서로 묶어두었던 원소들이 파편화되어 원-집합과는 다른 진리를 생산하게 될 가능성, 바디우가 말한 공백의 위협이란 이 상황을 말하는 듯하다. 부분집합은 원-집합의 원소도 아니고 전체도 아니다. 원-집합을 초과한다. 일자-효과로 최초로 발생한 원집합의 절대적 위상을 위협하기에는 충분하며, 이러한 연쇄는 부분집합들의 부분집합들, 또 그 부분집합들로 이어져 흩어져버릴 가능성마저 포함한다.
“그리하여 상황의 상태는, 태생적 구조와 상황에 대하여, 분리되었으며 (또는 초월적이며) 그리고 연결되었다고 (또는 내재적이라고) 각각 말해질 수 있다. 분리와 연결의 이러한 접속은 상태를 메타구조와 같이, 셈하기의 셈하기와 같이 특징짓는다.”
“[상태] 그것을 통해서 구조화된 현시는 허구적 존재를 지니게 되는데, 이것이 공백의 위험을 쫓아내는 듯 보이며, 그리하여 완결성이 셈해지는 만큼 일자의 보편적 안전의 보장이 지배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상징계적 질서를 강력하게 고착시킬 이미지가 필요하다. 셈하기는 여전히 상황을 빠져나가지만, 그 셈하기를 허구적으로 연출하는 것이 바로 메타구조다. 이 또한 도착적이라는 사실을 교묘하게 숨긴 채, 구조화된 현시는 일자가 어떤 이미지에 근거해 존재한다는 환상을 발생시킨다. 이 세계가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하다는 환상, 곧 의미-향유(joui-sens)를 만들어내어 부분집합은 메타구조에 의해 셈해지고 안정성을 되찾는다.
국가-메타구조의 은유
바디우는 상징계-상상계가 만들어내는 환상을 국가적 차원으로 해석했다. 본문(해설)은 유대민족 신앙의 상상적 유출이라는 실증적 예시까지 제시하여 바디우의 ‘국가’적 차원은 비유가 아닌 궁극적 실체(그 근거는 비록 허구지만)로서 작동한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단순 우리가 보고 느끼는 ‘실제’ 국가의 모습이 환상의 전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게임을 비유로 0과 1로 이루어진 임의의 숫자 연쇄를 상상해 보자. 예컨대 다음과 같은 숫자 배열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11010011....
이때, 연속되는 두 숫자의 패턴을 각각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00 = a, 01 or 10 = b, 11 = c. 상기 패턴은 다음과 같은 문자열로 치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cbbbbabc...
임의의 숫자가 나열된다면 당연히 눈에 띄는 패턴을 발견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는 하나의 규칙을 발견할 수 있다. ‘a와 c는 나란히 배열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a 다음에는 a 혹은 b가 와야 하고, c 다음에는 마찬가지로 a 혹은 c가 올 수 없다. a와 c 사이에서는 적어도 하나의 b가 있어야만 문자열의 배열이 가능하다. 우리는 위와 같이 무한한 배열되는 숫자를 해석하는데 유한한 규칙을 사용하게 된다. 극단적으로 9999번째까지 1이 연속되는 숫자배열을 상상하여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뒤의 숫자배열은 우리 의식적 인식의 한계가 자리 잡는 지점이라고 가정한다면) 0이 이미 셈해진 규칙 내 가정된 이상 a는 당장 도래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은 이미 셈해진 바나 마찬가지다. 억압된 것은 기표의 형태로 잠재되어 있다. 끝내 a가 발음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증상은 다시 회귀한다. ‘유한한 규칙, 그것이 전부인가?‘라는 질문 아래, 혹은 a or b의 연쇄 속에 다시 c가 찾아오지 않을까 기다리며, 두려워하며. 숫자를 셈할 새로운 규칙을 개발한다고 하더라도 규칙은 그저 규칙일 뿐이다.
바디우는 해당 논지를 정치적 차원으로 이끌고 가려는 것 같다. 국가적 차원의 셈하기 기능, 멱집합의 기능은 경제·사회·문화··· 여러 차원에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강력하다. 유나바머 선언문으로 대표되는 현대인의 무기력은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인간 행동에 대한 테크놀로지의 통제가 전체주의적 의도에서, 또는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의식적 욕망에서 시작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 정신에 대한 통제가 하나씩 새롭게 등장할 때, 그것은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합리적 반응으로서 간주될 것이다. (중략) 체제가 앞으로 수십 년 간의 위기에서 살아남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때쯤이면 사회는 중요한 문제들을 다 해결했거나 적어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체제가 해결한 문제 중에는 특히 인간을 '사회화'하는 문제, 즉 더 이상 그들의 행동이 사회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사람들을 순화시키는 문제가 포함된다. 일단 그렇게 되면 더 이상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을 것처럼 보인다. 테크놀로지는 인간과 여타의 모든 중요 생물을 포함한 지구 전체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마지막 논리적 귀결점을 향해 진보해 나갈 것이다.
유나바머 선언문 120-163.
셈해진 규칙 내에선 주체는 가상의 것으로 가정될 뿐이다. 기표는 다른 기표에게, 또 다른 기표에게···. 가정된 주체는 기표의 환유에 따라 이리저리 떠밀리게 된다. 종착역은 없다. 그 자리에서 정지하거나, 다시 환유의 게임을 시작하거나, 다시 한번 환유는 두 가지 길을 강요받게 된다. 전자의 경우 또 두 가지 갈래로 들어선다. 이곳이 종착역이고 궁극적인 진리라고 선언하여 도착적 길로 빠지는 것, 다른 길은 어떤 의미 환유도 의미 없다며 포기해 버리는 것. 하지만 후자의 경우, 유한한 규칙이라는 세상의 굴레 내 한계 지어진 이상 기표 연쇄는 다시 시작될 수밖에 없다. 도착적 세계와 무의미한 허무주의의 근거를 찾기 위해 말이다. 이로써 은유는 어떤 말로도 주체의 존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