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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우 존재와 사건 성찰 5

프로이트가 <문명 속 불만>에서 임의의 원시부족사회(최초의 문명)가 형성되는지 상상하며, 문명이 어떻게 리비도를 전횡하여 개인으로부터 그 동력을 공급받는지 신화의 형식으로 설명한다. 먼저 프로이트는 고통의 원천을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하는데, 1. 자연의 우세한 힘, 2. 우리 육체의 연약함그리고 3. 가족국가사회 속 인간 상호관계를 조정하는 규율의 불완전함(‘타인’)이 그것이다. 프로이트는 홉스식 국가 신화를 차용한다. 문명사회 이전의 개인은 온전한 자유를 누리지만, 연약하고 온갖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에 폭력적인 자연환경과 타인, 타 공동체로부터 보호받고 행복(쾌락)을 증진시키기 위해 문명을 건설한다. 각 개인은 문명의 질서, 즉 (상징계, 아버지의 법으로 치환될 수 있는) 정의에 자신을 복속시킨다.     


상황이 이상적이라면 인간은 포기된 권리, 억압된 성충동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적당히 만족시키는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문명은 분명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고 그들의 상호관계를 조정하는 성취와 규율의 총합을 의미한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해 보인다. 홉스식 국가신화가 그러하듯이, 문명의 목적론적 논리는 그 자체로 권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듯 보인다. 안녕을 위해 일부 권리를 양도한 개인들의 조화로운 합이 곧 문명이라 주장할 수 있다면 사실 라깡이나 바디우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문명, 곧 상징계가 완벽하다면 말이다.  

   

그러나 문명을 추동시키는 일자의 권력이 강력하고 폭력적인 만큼 문명(Kultur, 문화적 틀)을 무(無)로 돌리고자 하는 죽음충동도 있다고 프로이트는 이야기한다. 바디우와 체르멜로 프랑켈 공리에 따르면 부정의 형식으로만 등장하는 공집합이 그것에 비유될 수 있다. 바디우의 비유대로 일자로 셈해지는 것이 현실세계에서 어떤 이념적 틀에 개인이 포섭되는 것과 비견될 수 있다는 관점에 따른다고 해보자. 가령 ‘자연수(집합 N라고 하자)’라는 이념이 있다고 한다면, 분류공리꼴에 따라 다음과 같이 자연수라는 이념에 속하지 않는, 자연수의 어떤 원소도 귀속되지 않는 어떤 집합, 곧 공집합을 도출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N = {1,2,3,4,}

{x∈N∣x <0} =      


공집합은 상징계 내에 현시된 것, 언어로써 포착된 것, 사회적 틀이나 규범이 정하는 그것을 빠져나가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텅 빈 그 무엇, 그러나 그 공백은 정말 내용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공백이 아니라, 기존의 상식이나 규범으로써는 포착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들끓고 있기 때문에 비어있다고 말할 수 있다. 기존에 우리를 강하게 사로잡고 있던 그 에피스테메를 벗어던지고 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영화 파이트클럽은 곧 어떤 시스템이나 사회적 틀, 개인을 억누르는 그 무엇에 대한 불만을 마초적 형식으로 그려내며, 주인공은 정신의학적 용어로 해리성 인격장애의 형태로 자신의 증상이 발현된다. 주인공이 만들어낸 또 다른 자신, 타일러 더든은 영화 내내 시종일관 반박과 부정의 형식으로 억압이 무너지는 지점들을 뱉어낸다.      


‘싸워본 적이 없으면 너 자신을 얼마나 알겠어?’ 

(레이몬드의 머리에 총을 겨누며) ‘레이몬드, 넌 뭐가 되고 싶었던 거야!’

‘너는 은행에 들어가 있는 너의 돈이 아니야, 너는 네가 모는 차가 아니야, 너는 너의 지갑에 들어가 있는 것들이 아니야. 너는 네가 입는 망할 옷이 아니야.’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은 타일러 더든은 공집합보다는 강력한 여집합으로서, 결국 또 다른 일자에 종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주인공은 여자한테 말 한 번 못 거는 숫기 없는 모습을 내비치는데, 타일러 더든은 그에 대한 강력한 반작용이다. 제 감정 하나 솔직하게 말 못 하는 소심한 성격을 만든 것을 환경 탓이라고 쳐도, 결국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주인공의 종착지는 강력한 가부장적 남성상이다.     


반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며 반란, 시위 등을 통한 전복적 사회 변혁을 암시하는 영화나 미디어는 하나 같이 이런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브이 포 벤데타, 조커, 설국열차 등 기존 사회, 현 문명사회에 대한 강렬한 불만을 드러낸다. 그러나 파이트 클럽의 마지막 장면이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전산망과 모든 건물들을 부수고 끝내듯이, 전복 이후에 어떤 모습이 펼쳐지는지 그리는 영화는 (내가 아는 선에서는) 단 한 편도 없다. 미래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 개략적인 암시라도 품고 있는 영화조차 난 본 적 없다. 2편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영화 파이트클럽이 그나마 다른 영화보다 솔직한 것은, 탈억압적 주체 가능성의 공간이 어떻게 결국 또 하나의 정치적 권력관계를 이루어 개인을 억압하는지 그 과정을 조명함으로써 이미 이런 식의 반(反) 사회적 운동이 갖는 한계를 어느 정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끼워 맞춰 해석하는 격이지만 바디우가 체르멜로 프랑켈 공리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도 그러한 상징계의 강력함이다. 임의의 집합 간 분리되고 투쟁하는 역동적인 운동(멱집합 공리)이 있다고 한들 그것은 결국 일자 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마저도 더욱 큰 일자로 포섭될 가능성(합집합 공리), 그리고 우리 사회 내에서는 더 단순한 하나의 기능적 일련번호로 대체될 가능성(치환 공리)에 종속되고 만다. 우리는 우리가 바란다고 생각했던 그 무엇에 도달하는 순간(즉, 증상이 ‘치유’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실제로는 문제가 더욱 복잡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프로젝트 메이헴은 사실상 하나의 반사회적 이데올로기의 실천에 불과했다. 따라서 문제는 ‘얼마나 상징계에 완벽히 반대되는가 ‘로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다시 본문이 꾸준히 암시하는 질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바디우와 라깡이 공통적으로 주목하는 지점상징계가 넘어지는 지점혹은 폭력적 S1의 도입으로 시작되는 지점들의 장()으로서 공백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수학적 집합론이 (바디우의 말대로) 보다 강박적이고 보편적으로 이해 가능한 언어라면, 이러한 논리 연쇄를 단순히 이해하는 것은 오히려 쉬울 수 있다. 문제는 공백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이다.     


무엇인가를 부정하는 것이 좋은 출발이 될 수는 있겠지만, 결국 바디우가 이야기하는 강박증적 탐사구조를 통한 실재와의 접점을 만나기 어려울 수 있다. 시시프스의 형벌처럼 그런 과정을 무한히 반복해야 도달하는 것이 실재라고 말한다면, (철학사의 교훈이 그렇듯이) 지치다 못한 개인들은 허무주의에 무릎을 꿇고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든 것은 옳다 ‘며 되려 강력한 일자를 소환하게 될 것이다. 공백이란 상기 예시(자연수의 집합 N 중 0보다 작은 원소가 귀속된 집합)처럼 특정 일자의 여집합이 아니라 모순된 형식으로서만 현시된다. 칸토어 이전에 공집합을 집합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복기시켜 보자. 우리가 공집합으로, 공백으로 명명하는 그것은 상징계에 현시된 형태로서는 모두 동일한 위계와 의미를 내포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서술하면 공백은 (하나의 집합을 일자에 비유한다면) 각 상황별로 다른 위상을 갖게 된다.    

 

A₁ = {0보다 작은 자연수의 집합} = undefinded₁

A₂ = {공통의 원소가 없는 두 집합 간의 교집합} = undefinded₂

A₃ = {x | x²+1 = 0} = undefinded₃

A₄ = {x | x = 다른 애인이 생긴 배우자} = undefinded₄     


상기 4가지 예시는 각자가 다른 위상을 지니는데, 먼저 A₁을 이야기하자. 귀납적으로 이야기했을 때 1 ∈ S이며, 임의의 n ∈ S에 대해 n+∈ S라면 S는 자연수의 집합로 정의한다. 그러므로 0보다 작은 자연수란 애초에 정의에 위반되는 일이다.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넘어간다면 그저 끝날 일이, 자연수에 –를 붙여 정수의 집합을 구성하게 된다. 내부의 엔트로피만 갖고 노는 상징계적 논리에 입체적 창조가 덧붙여져, (비유적으로) 자연수만이 세상 논리를 구성한다고 믿던 이들에게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계기가 된다. A₃도 비교적 직관적으로 와닿는 A₁과는 결이 다르지만, 대수(algebra)적 필요에 의해 허수의 개념을 창안하는 계기가 된다.     

한편 A₂처럼 논리적으로나 보편적으로 구성될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으며, 그 범위가 너무 넓어 인정하게 되면 기존 논리체계 자체가 붕괴되는 어떤 undefined가 있을 수 있다. 우스갯소리처럼 명시한 A₄의 집합처럼 전통적인 세계관 내에서는 전혀 인정 안 되는 사랑의 형식이, 일각에서는 폴리아모리로 허용된다는 사실은 내게 꽤나 충격적이다. 이렇게 보자니 undefined, 곧 공집합이 아무것도 없지만 곧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들로 우글거린다는 게 직관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와닿기도 한다. 공집합은 그 하나의 용어로써 ’ 없음이 있다 ‘는 사실을 지칭하고 있지만, 사실 그 없음조차 하나의 개념으로 간단히 말할 수 없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격이다.     


타일러 더든과 주인공의 공존도 그러하다. 한 개인이 정상적인 생활 범주 내에서 두 개의 인격을 유지할 수는 없으며, 더든의 인격적 실존을 견딜 수 없던 의식은 주인공이 그를 자신과 온전히 다른 인물로 인식하게끔 만든다. 더든에게 휘둘리고 영화 후반부에 가서는 도망만 다니던 주인공이었다. 더든의 횡포를 멈추겠다는 결의로 자신의 입에 권총을 들이밀었을 때, 그는 자신이 원하는 여자의 손을 잡고 프로젝트 메이헴 팀원들에게도 자의로 명령할 권리를 득한다. ’ 자본주의 싹 다 망해라 ‘식 결론은 그다지 와닿지 않았지만 적어도 주인공의 서사에서는 그 공백을 마주해 새로운 출발의 가능성을 열어젖힌 격이다. 주인공에게 공백은 타일러 더든이 아니라 더든을 죽인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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