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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기 vs. 종속되기

존재와 사건 성찰 (3)

바디우는 프레게의 공리와 체르멜로 프랑켈 공리를 직접적으로 맞붙혀 지금까지의 요지를 정리하고 있다. 체르멜로-프랑켈 공리는 집합론, 언어가 장악한 상징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재적 필요성에 의해 요청되어 정합적인 것과 비정합적인 것 간의 혼용을 막고 있다. 순수다수와 비-존재를 신격화시키고 절대적 일자의 초월성으로 간주했던 칸토어와는 달리, 바디우는 실재와 맞닿았을 때 집합론의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차 강조하고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만 집합론이 지속될 수 있다. 역설적 다수성들에 의해 집합론, 언어, 상징계가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실재가 침투할 수 있는 틈을 봉합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체르멜로-프랑켈 공리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분리공리를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외연공리에서보다 귀속관계(∈)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그 이유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위계의 철폐보다는 (본문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언어와 실존을 직접 맞닿지 않기 위해서라고 일관되게 해석될 수 있을 듯하다.      


                                                              ∀A, ∃B → B = { x∈A┃ p(x)}


임의의 집합 A가 있다면 A에 속하면서 특정 명제(성질)를 만족하는 원소들만 모아놓은 집합을 구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특정 성질을 만족하는 원소들을 모아놓은 집합이 아무런 근거 없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굳이 이미 선험 하는 집합의 부분집합으로 한정하는 이유는 러셀의 역설 때문이다. 러셀의 역설

[ A = {x┃ x∉x } ]을 상기 명제를 대입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A, ∃A → A = { x∈A┃ x∉x }


임의의 집합 A를 가정하고 이를 부연하기 위해 집합 A가 실존한다고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적어도 러셀의 역설에 한정해서는 분리공리가 집합론이 실재와 맞닿아 붕괴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반해 프레게의 논제는 다수(집합)가 이미 실존하며 통제 가능하다고 가정하여 이러한 보호 기능을 전혀 못하고 있다.


한편 바디우가 ZFC 공리계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상징계의 온전한 보호와 언어 자체에 대한 강박적 수호가 아니다. 존재와 사건 강해 초반부(p.10~)를 복기시켜 본다면, 수학의 언어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그러한 한계의 경계선이라 할 수 있는 공백의 연안가로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일찍이 하이데거가 ‘존재의 망각에 대한 망각’이라고 불렀던 그 지점들을 폭로하고서 언어의 사유를 지속시키는 것과 그러지 못한 것은 엄밀히 다르다. 바디우가 강조했듯이 그가 존재론 담화에 수학을 끌고 들어오는 것은 수학의 언어가 존재에 관련하여 말할 수 있는 가장 근접한 것을, 즉 공백을 말하기에 가장 효율적이며, 신비주의적인 오류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수준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분석가는 분석주체, 내담자에게 환자 자신에 대한 질문을 유도해 이론이 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자신이 지금껏 알고 있었던 존재의 윤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가장 근본적이고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 S1, 있음(sein)을 부연하던 다른 기표들 S2로부터 분리시켜내야 한다. 분석주체는 자신의 증상을 표현할 때 의식적 수준에서 발화하는 것보다 더 말하기 힘든 것,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무언가, 즉 언어가 더 이상 발화될 수 없고 실재를 표지 하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ZF공리계와 같이 어떤 새로운 시도들이 출몰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증상의 망각을 유도하거나 증상을 포기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증상이 끊임없이 유지될 수 있도록, 프레게에서 체르멜로 프랑켈로 옮겨간 것처럼, 언어가 실패하는 지점에서는 구차하게 기존의 체계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상징계 자체를 붕괴시킨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포착할 수 없는 위협에 노출된다.    

지금까지의 제 인생을 짧게 요약한다면 구원의 갈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어떤 일관된 교훈을 던지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곤 했습니다. 유년시절부터의 경험은 복음주의 실천신학에, 고등학교 때는 4년제 대학 신화에, 사관학교 생활과 짧은 장교 경험 동안에는 유능한 장교상과 남성성 판타지에 그 어떤 구원이 있으리라 생각하였습니다. 어떤 조건을 만족시키면 더 이상 결핍이 없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게, 혹은 그렇게까진 순진하진 않더라도 그것만 바라보고 살 정도로 눈이 먼 상태를 구원에 대한 갈망이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결코 도래하지 않을 구원을 바보 같이 갈망하고 좌절해 왔던 것으로 제 삶을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디우는 보편적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언어의 한계로써 실재를 표지 하기 위해 수학을 사용합니다. 그러니 공백의 출현과 언어적 논리성의 필연적 붕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백을 인지하면서도 논리적 사유를 이어가려는 노력은 그 보편성에 근거해 모래성을 쌓고 무너뜨리는 제 삶과도 비견될 수 있을 듯합니다. 가짜 존재들의 환영을 횡단하고 가상적 권력이 현실을 지배하는 데 대항하여 그것을 보다 진실된 모습으로 바꾸는 것. 혹자는 그렇게 기한 없는 변화 속에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겠냐고 질문할 수 있겠냐마는, 제게는 그 가짜 권력의 실체를 알고도 우두커니 앉아있는 생애가 더욱 부질없어 보이기만 합니다. 다만 저와 많은 사람들이 ‘저것만 얻으면 행복할 거야’라고 착각하던 그 구원은 이제 제 인생에 없습니다.


ZFC공리계니 뭐니 제 아무리 대단한 수학적 발명처럼 이야기해도, 바디우가 지적한 것처럼 그것은 집합론 곧 언어의 사유를 지속하기 위한 궁여지책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백상현 교수님이 지적하였듯이 그리스적 서구철학의 전통은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 인식론부터 “나는 어떻게 행해야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는 윤리적 담론에 이르기까지, 바보 같아 보이는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진정 산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갖게끔 유도합니다. 그곳의 한계에서 실재의 표지와 조우하고, 또 우리 개인의 한계를 인정하고 존재론 담화를 어떻게든 지속시켜 나갈 방법을 궁리해 나가고.                         

                    

프레게 vs. 체르멜로-프랑켈

프레게적 구원은 고전주의적 구원입니다. 인간이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행복의 경지. 우리가 흔히 착각하던 그 무엇 : 명품, 평판, 차, 이상성욕, 지적 탐구의 경지 등. 존재양화사를 구원과 접지시켜 논리 구조의 맨 앞에 등장시키면서 이것이 대상 a, 우리를 욕망의 환상으로 밀어 넣는 그 무엇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차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조건이란 언어로 표지 된 상징계적 조건일 테고, 그러므로 우리의 요구는 항상 언어로써 굴절되어 결코 구원에 도달할 수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해 ’ 구원이 있다 치자 ‘ 해놓고 러셀의 역설처럼 그 구원에 도달할 수 없게끔 만드는 조건들이 우리를 사로잡게 됩니다. 예컨대 복음주의 신학의 요지를 정리한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 1항은 인간이 존재론적 목적을 달성하는 것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문 1. 사람의 첫째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은 무엇인가?

답. 사람의 첫째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과 영원토록 하나님을 온전히 즐거워함이다.      

그러나 신학적 의미의 구원은 존재양화사로써 표현될 때는 너무나 선명해 보이지만, 그 조건인 교리의 불충분성과 모순으로 인해 결국 구원 자체가 의심받는 지경에 이릅니다. 마치 굳은 믿음을 갖고 신학대학에 입학한 학부생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처럼요. ZFC공리로써 구원을 해석한다면 임의의 인간의 부분집합으로서 해석될 여지가 발생합니다. 논리적으로는 프레게의 것보다 빈틈이 없어 보이나, 제 인생에 많은 짐을 지운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야 구원에 이르는 것인지, 그렇다면 그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내 부분집합으로서, 내 실존의 일부로서 구원이란 무엇인지 발견하는 것은 결국 저의 몫이니까요. 라깡적 의미에서 증상은 찾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더욱 골 아픈 일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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