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중심으로 (학부 졸업논문)
본인을 ‘클라우제비츠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클라우제비츠 본인이 전쟁론이 미완의 작품이며, 대부분의 내용을 수정해야 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전쟁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전쟁론의 비일관성에 혼란을 겪는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전쟁론이 더 이상 전쟁을 설명할 수 없으며, 존 키건과 마틴 반 크레펠트 등의 학자들은 새로운 전쟁이론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특히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정치의 연속(Der Krieg ist eine blosse Fortsetzung der Politik)이라는 명제로 유명하지만, 이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는다. 오늘날 대규모 전면전 형태의 전쟁이 외교의 수단으로서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는다. 국제사회는 전쟁이 필연적으로 국익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난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 학습했으며, 전쟁이 사활적 이익 보호를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하지 않는 한 전쟁이 외교수단의 수단이 될 확률은 희박하다. 서로에 대한 적대감정과 적대의도, 그리고 여태 치른 희생에 대한 대가를 근거로 ’ 최종대가‘를 얻기 위한 악순환이 지속된다. 때문에 전쟁을 외교 옵션에서 배제하게 된다.
하지만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서구문화에서 전쟁의 본질에 대한 체계적이고 실용적 이해를 제공한 시초이기에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서구사회의 전통적 전쟁관의 토대를 세웠다는 점에서 전쟁론은 실로 대단한 학술적 가치를 갖는다. 전쟁론으로부터 이러한 의문에 답하려는 시도가 지나치게 보수적이거나 낡았다고 치부될 수 없다. 서구사회가 전통적으로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갖는 한계는 곧 이를 연구하는 한국 군사학계의 한계이기도 하다. 여태껏 전쟁에 관한 유효한 통찰을 제공해줬다면, 몇 가지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전쟁론을 포기하기보다는 문제점을 파악하고 보완하는 것이 더 유효하다.
또한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전쟁에 회의감을 드러내는 서구사회도 당시에는 전쟁에 그토록 몰입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특히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헤어프리트 뮌클러가 지적하듯이 ’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르고 ‘ 전쟁을 지속하는 바람에 돌이킬 수 없는 전쟁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전쟁 과정 중에 발생하는 적대감정은 당시 많은 프로파간다의 흔적들에서도 발견된다. 적국에 대한 증오감정이 쉽게 제어될 수 없다. 전쟁의 폭력적, 감정적 요소가 정치논리를 해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클라우제비츠는 그런 비합리적 가능성을 정말 포착하지 못했는가?
우리는 왜 이런 의문이 제기되는지 전쟁론을 다시 살펴 답해야 한다. 정말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격화되어 진지한 외교수단의 선택지로 고려될 수 없는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는가? 전쟁론의 기본 가정이 오늘날 전쟁을 설명할 수 없는 모델인가? 전쟁의 도구성에 관한 클라우제비츠의 언급들을 살펴보지 않으면 전쟁론의 현대적 의미를 더 이상 논할 수 없다.
1. 나폴레옹 전쟁 초기와 절대전쟁
전쟁의 놀라운 삼위일체(wunderliche Dreifaltigkeit), 즉 폭력, 우연(개연성), 이성의 요소 중에서 ‘절대’전쟁은 용어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일차적 삼위일체의 요소 중에서는 폭력성, 이에 대응되는 부차적 삼위일체 요소 중 국민(people)의 요소와만 오로지 관련 있다. 배스포드(2017)도 전쟁론에서 ‘절대(absolut)'라는 단어는 매우 자주 쓰였으며, 주로 철학적 극단을 가리키는 형용사로 사용되었다고 지적한다.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의 전쟁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 보이며, 그가 수행했던 전역에서 절대전쟁의 단서가 있다고 믿었다.
절대적인 완벽함으로 수행되는 현실의 전쟁이 바로 오늘날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본 적이 없다면, 전쟁의 절대적 본질이 약간이라도 현실성을 갖는다는 우리의 생각에 대해 사람들은 의심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혁명 전쟁이 수행한 짧은 전주곡 이후에 용맹 무쌍한 보나파르트 장군이 전쟁을 바로 이 수준까지 올려놓았다. 보나파르트 휘하에서는 적이 쓰러질 때까지 전쟁이 쉬지 않고 계속되었으며, 반격은 거의 쉬지 않고 이루어졌다.
그는 나폴레옹이 수행한 전쟁이 절대전쟁의 표본이 되리라 믿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보나파르트 장군이 수행했던 전쟁은 이데올로기적 호소를 통해 국민을 총동원해 인민 전체에 힘의 근원을 둔 ‘완벽에 가까운’ 전쟁이었다. 8편 전반에 걸쳐 클라우제비츠는 이러한 관점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가는데, 그는 역사적인 변화 양상을 고찰한다. 야만적 티타르인, 고대의 공화국, 중세 봉건 군대, 18세기 왕들,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특징을 간략히 서술하는데, 이 중에서 절대전쟁의 형태에 가장 가까웠던 것은 야만적 티타르인이고 그 외는 소규모의 정예군대로 정치적 목적에 동원되었던 군대 간의 전쟁이었다. 정도의 차이였지, 결국 야만적 집단 간의 전쟁 이후에는 절대전쟁의 궁극적 형태이자 모든 전쟁 양상의 필연적 운명이 나폴레옹 시대에 와서야 다시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다. 절대전쟁은 인민의 동원 정도와 전쟁의 폭력성의 정도만으로 전쟁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었다.
절대전쟁은 한쪽 전쟁 수행자의 에너르기(민중의 동원 정도와 적대감정)가 극단에 달해 다른 쪽을 제압하는 매우 특정한 상황에 한정된다. 이는 이상전쟁과 달리 양자 간의 상호작용에 주목하기보다 자연스럽게 국가 무력 수단의 폭력성을 어떻게 극단으로 끌어내 동원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진다. 나폴레옹 전쟁 초기 당시 유럽 각국 간의 무기체계나 국력의 차이는 크지 않았으며, 세력 다툼은 왕가와 귀족들만의 것이었기에 병력을 최대한 많이 동원한다는 것은 곧 전쟁의 승리를 의미했다. 타 요인의 동등성을 전제하면 병력이 곧 힘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의 삼위일체 요소 중 폭력의 요소를 인민과 결부시켜 이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처럼 선형적 기준을 두고 전쟁의 ‘진짜’ 모습과 그렇지 않은 모습이 대비된다는 점에서 절대전쟁은 플라톤주의적 이상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나폴레옹 이전의 ‘제한전쟁(limited war)’의 경우, 단순히 정치적 목적에 종속되어 제한된 수준의 전투력의 손실만이 오가는 전쟁이었다. 전쟁론에서는 나폴레옹이 이를 극단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렸다고 말하는 구절들이 많이 발견된다. 호이저(2016)의 연구에 따르면 클라우제비츠는 이러한 글에서 오직 모든 정치적 제약에서 벗어난 절대전쟁만을 탐구하고 서술했다. 클라우제비츠는 1827년 이전에 쓴 글에서는 정치의 역할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으며 정치는 전쟁수행에 어떠한 직접적인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것처럼 서술했다.
절대전쟁이란 정치적 목적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인민의 폭력성과 동원 정도를 극단으로 끌어올려 수행한 국가 수준의 최대 폭력행위다. 하지만 모두의 상식과는 달리 절대전쟁은 클라우제비츠의 최종적 결론이라고 할 수 없다. 클라우제비츠는 그의 생애동안 전쟁론을 지속적으로 수정 작업 중이었으며 그의 전반적인 사상 변화는 나폴레옹 전쟁의 진행과정에 따라 바뀌었다.
2. 절대전쟁의 폐기와 전쟁론의 모순
나폴레옹 전쟁 이전의 전쟁은 흔히 ‘제한전쟁(limited war)’라고 불리는 전쟁양상이 보통이었다. 유럽 절대왕정 간의 대결은 정치 논리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왕조 간의 전쟁도 강제로 징집된 농민들이나 시민들, 혹은 직업군인들과 용병들 간의 비교적 소규모 대결일 수밖에 없었다. 군주 간의 이해관계에 의해 제한된 수준의 전쟁만이 벌어졌으며 정치적인 대결자를 완전히 섬멸하는 전쟁양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를 두고 ‘좀 더 강력한 방식으로 협상하는 약간 강력한 외교’에 지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등장과 프랑스혁명 이후로 유럽의 전쟁양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나폴레옹은 총동원령을 선포해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모든 젊은이들과 미혼 남성들을 군에 징집했으며 기혼남성, 여자와 아이들, 노인들을 포함한 나머지 인민들은 전쟁 물자를 나르거나 생산하고 군의 사기를 북돋는 등 역할을 맡게 되었다. 국가공동체의 모든 인력과 자원을 동원하여 ‘한계가 없는’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등을 통해 프로이센 군대를 분쇄했다. 이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다른 유럽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러시아전역으로 나폴레옹의 군대는 패퇴했으며 그의 방식대로 진행되었던 ‘절대전쟁’은 실패하였다. 이를 목격한 클라우제비츠는 다른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다. 배스포드 교수(2019)는 클라우제비츠가 명백한 이유 때문에 절대전쟁 개념을 포기했다고 말한다.
‘절대(absolut)’라는 단어는 전쟁론에서 독어 원문으로 매우 자주 등장한다. 이는 주로 철학적 의미에서 질적 상태에서 극단적 완벽성을 말하는데 사용되었다. 하지만 절대전쟁이라는 용어는 전쟁론 전체에서 겨우 19번 등장했으며 8편을 제외하고는 2번 밖에 언급되지 않았다. 1편에서 눈에 띄게 이 용어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클라우제비츠가 이 개념을 포기할 중요한 근거들을 찾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나폴레옹이 동원했던 군대가 다른 유럽 국가들을 압도했지만, 러시아 전역으로 인해 절대전쟁은 논리적 문제점을 드러냈다. 전쟁은 클라우제비츠가 1편 1장에서 말했듯이 ‘양자 간의 결투의 연장’이며, 한쪽이 극단의 에네르기 수준에서 전쟁을 수행한다고 해도 상대 입장에서는 절대전쟁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나폴레옹이 전쟁에 투자한 인력과 국가예산은 적은 수치가 아니었다. 이용재(2016)에 의하면 혁명력 13년이었던 1804-1805년의 민간지출과 군비지출은 각각 266만 프랑 438만 프랑으로 군비지출비용이 민간지출비용의 두 배가 안 되었다. 하지만 1812년 러시아 전역을 수행하던 때는 각각 343만 프랑과 722만 프랑으로 국가예산 지출도 나폴레옹 전쟁 기간 중에 최대치였으며 군비지출비용은 민간지출비용의 두 배를 훨씬 뛰어넘었다.
러시아도 물론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을 예상해 총동원령을 내려 70만 병력을 동원했지만 훈련과 장비의 부족으로 실제 가동 병력은 22만에 불과했으며, 800km를 단계적으로 후퇴하며 방어하는 형태의 소모전을 수행했다. 결정적인 결전이라고 할 수 있는 순간도 보로디노 전투와 그 연장선인 모스크바 소모전뿐이었다. 그마저도 러시아는 모든 병력과 물자를 쏟아부었던 나폴레옹에게 거대한 병력끼리 맞붙는 결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소모전을 벌인 끝에 나폴레옹의 군대는 퇴각했다. 러시아군도 약 30만 명의 희생자를 내었으나, 이 중 교전 중 사망자는 약 17만 5천 명으로 줄어든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56만 명 중 약 2-3만 명만이 본국에 돌아갔다.
이처럼 나폴레옹은 인민을 총동원한다면 자신의 천재적인 전쟁술로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클라우제비츠가 감탄했던 절대전쟁의 표본은 실패하고 말았다. 정치적 요인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 나폴레옹의 패인이었다. 호이저(2016)에 따르면 절대전쟁의 필연성을 주장했던 1804년 무렵의 클라우제비츠는 정치적 목표에 따라 전쟁의 모습이 바뀔 것이라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전쟁은 그야말로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양상을 보이며, 우리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난점은 여기서 발생한다. 전쟁은 삼위일체의 요소, 이성, 감정, 우연에 의해 다양한 모습을 띨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폴레옹 전쟁도 분명 세 가지 요소의 조합에 의해 발생한 역사적 사실이다. 여러 가지 역사적 조건들이 갖추어져 클라우제비츠가 말했던 ‘절대전쟁’의 모습을 띨 수 있었을 뿐이다.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의 삼위일체로써 전쟁양상의 다양성을 예측했던 만큼, 나폴레옹 전쟁과 절대전쟁도 세 가지 요소에 의해 형성되는 수많은 전쟁 양상 중 하나이다. 하지만 클라우제비츠는 절대전쟁이 ‘일어날 수 없는 전쟁’인 것처럼 온전히 배제해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정치적 목적은 전쟁수단의 성격과 맞아야 하고 이따금 그 수단 때문에 완전히 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치적 목적은 언제나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정치는 전쟁행위 전체를 꿰뚫고 지나가며 전쟁의 파괴력이 허락하는 한 전쟁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전쟁은 단순히 정치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정치적 수단이고 정치적 접촉의 연속이며 정치적 접촉을 다른 수단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 전쟁 초기의 모습을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절대전쟁을 주장했지만, 결국 전쟁이 본질적으로 정치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고 결론 내렸다. 그에 따르면 전쟁은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맹목적인 파괴를 추구하는 활동이 아니다. 전쟁은 결국 개인의 싸움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공동체의 사활을 걸고 폭력을 위한 폭력을 휘두른다고 했을 때, 합리성에 지배를 받는 정치논리는 이를 방관하지 않는다.
이는 대부분의 경우에 들어맞는 말이지만, 그가 나폴레옹 전쟁 초기 양상을 보고 내렸던 결론을 아예 폐기해버린 꼴이 되어버린다. 삼위일체의 조합에 따라 전쟁 양상이 다양해진다고 이야기하면서 삼위일체 요소 중 ‘이성’의 우위를 논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전쟁론 1장 서론에서 클라우제비츠 본인의 방법론으로 ‘개별 요소를 고려해 부분으로, 그리고 결국 이 모든 것이 한 맥락에서 전체로 나아간다’고 제시했던 점을 고려하면 이는 어떤 부분을 포괄하지 못하는 이론이 되어버린다.
이는 둘 중 하나로 결론지을 수 있다. 하나는 그가 여전히 전쟁 양상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절대전쟁, 즉 폭력이 이성을 압도하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1. 전쟁의 도구성
도구적 수단으로서의 전쟁은 클라우제비츠의 격언 ‘전쟁은 정치의 연장’의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으며, 전쟁에는 문법(grammar)만이 있을 뿐, 논리는 없다고 했던 전쟁론의 인용구와 같은 의미다. 이는 곧 전쟁이 정치논리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 하며, 전쟁을 위한 전쟁은 있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논리적으로 따졌을 때, 국가공동체는 자신의 이익(사활적 이익, 핵심적 이익 등)에 관심이 있으며, 개인의 폭력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문제이기 때문에 폭력만을 위한 전쟁이 있다고 상상하기는 힘들다.
전쟁 전체 또는 전쟁에서 가장 큰 전투인 대전투를 빛나는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국가 정세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전쟁은 정치와 합쳐지며 최고 지휘관은 동시에 정치가가 된다.
클라우제비츠는 이 점을 정확히 짚었다. 전쟁이 정치의 목적에 ‘종속되어야만’ 성공적인 전쟁이 될 수 있다. 국가의 의지를 타국에 강요하는 행위가 전쟁이라면 오직 의지를 강요하는 목적에만 종속되는 행위로써 바람직한 전쟁수행이 가능하다. 따라서 정치적 생존을 위한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절대전쟁’의 양상은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역사적 사례가 아니다. 전쟁이 강압적인 방식의 외교, 혹은 국제정치의 일환이라면 전쟁은 도구적 수단으로서만 남게 된다. 이는 전쟁이 국가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활용되기 때문에 필요하면 사용되고, 계산된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하거나 손해를 끼친다면 중단되어야 한다는 의미와 같다. 전쟁이 ‘폭력적인 외교’라면, 필요에 따라 언제든 멈출 수 있다는 명제는 성립되어야 한다.
이를 간과했을 때 전쟁은 그 자체로 활기를 얻는 기묘한 모습을 띠어 전쟁을 위한 전쟁, 즉 절대전쟁으로 변질된다. 전쟁은 숨 쉴 틈 없이 진행되어 어느 한쪽이 궁극적으로 섬멸되거나 정치적 논리를 완전히 포기할 때까지 진행된다. 이 경우 전쟁은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하나의 전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쟁의 절대적인 형태에서는 모든 것이 필연적인 원인에 따라 일어나고 빠르게 상호 관련을 맺으며, 공평하다고 할 만한 실체 없는 틈이 생겨나지 않는다. (중략) 이 모든 자연스러운 상황 때문에 이 전쟁 형태에는 단 하나의 마지막 결과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까지 승패의 결정도 없으며 얻은 것도 없고 잃은 것도 없다. 즉 끝이 좋으면 다 좋다.
그가 궁극적 형태의 전쟁이라고 칭송했던 나폴레옹의 전쟁이 실패하고 결국 절대전쟁이 이론의 정점에 놓인 최고의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클라우제비츠의 관점에서 나폴레옹이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실패한 이유도 전쟁의 정치적 특성을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프랑스는 18세기 말부터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인구가 많았기 때문에 강력한 인민 동원이 가능했으며, 그의 천재적인 용병술 덕분에 대부분의 유럽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나섰던 것은 러시아가 대륙 봉쇄령을 어겼기 때문이며, 모스크바를 점령함으로써 러시아의 항복을 받아내고자 하였다. 러시아가 당시 영국과의 무역 덕분에 경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12년에 모스크바와 러시아 절반을 점령한 것도 그때 목표로 삼았던 평화조약을 맺었을 때만 보나파르트에게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점령은 그의 전쟁계획에서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고, 그 전쟁계획에는 러시아 군대의 파괴라는 다른 부분이 없었다. (중략) 그래서 그에게는 첫 번째 부분이 전체적으로 쓸모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절대전쟁은 결국 한쪽의 절대적인 굴복이 없으면 끝나지 않는다. 한쪽에서 투자한 자원과 병력만큼 상대방도 전쟁에 비슷한 수준, 혹은 그 이상을 투자할 것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결국 전쟁은 극단으로 치닫게 되며 한쪽이 파멸에 이르기 전에는 전쟁이 종료되는 일이 없다. 이는 제한된 수준에서 벌어지는 전쟁에도 적용된다. 한쪽이 더 많은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압도적인 전투력이 투자되어야 한다.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더 많은 병력과 자원을 투자한 것이다. 당시 산병전술, 빠른 기동, 전장총과 포탄 사이즈의 표준화 등 많은 군사적 혁신이 일어났지만, 온 인민과 국가자원을 동원하지 않았더라면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적절하지 않은 정치적 목표 설정이나 목표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투자는 결국 전쟁이 계산적인 이성에 종속되지 못하게 만든다. 시작된 전쟁은 투자한 만큼, 혹은 설정한 목표만큼 이득을 얻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은 이득을 얻기 위한 수단적 가치로서 남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전쟁이 정치를 전복시켜 국가공동체 전체를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과 절대전쟁의 모순에서 우리는 전쟁이 도구적 수단으로 남아야 한다는 ‘규범적 가치’에 이른다. 여기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새로운 접근이 가능한데, 오랫동안 그의 대표적 격언으로 알려졌던 ‘전쟁은 정치의 연속(Fortsetzung)’을 클라우제비츠가 현실에 대한 관찰로서 얻은 결론이 아닌 현실 전쟁이 극단적 수준에 내몰려 정치논리를 망각하는 상황에 대한 경고로 읽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면 국내 군사학계가 놓쳤던 맹점이 드러난다. 정치논리는 지속적으로 전쟁을 감시하며 통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견제한다. 그러나 전쟁이 한 번 정치논리의 범위를 벗어나 정치 자체를 변질시키는 상황에 대한 경계가 없다면, 우리는 안일하게 전쟁이 항상 정치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만 여기게 되며 그 역은 생각하지도 않게 된다. 전쟁은 정치논리를 벗어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전쟁을 항상 감시해야 하고, 국가공동체의 이익을 해치지 않도록 통제해야 한다. 전쟁론에도 클라우제비츠가 이 점에 대해 분명 고민한 흔적이 남아있다.
따라서 전쟁계획을 세울 때 정치적인 관점이 순전히 군사적인 관점에 굴복해야 하는지, 달리 말해 정치적인 관점이 완전히 사라지고 군사적인 관점에 종속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정치적인 관점이 지배적인 관점으로 남아있고…(중략) 전쟁을 낳은 것은 정치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관점이 군사적인 관점에 종속되는 것은 불합리할 것이다.
정치논리가 군사적인 이유로 변형되거나 무시된다면, 클라우제비츠의 말대로 ‘불합리’하다. 군사적 관점에 정치적 관점이 종속된다는 것은 싸우기 위해 이유를 갖다 붙이는 셈이다. 개인 간의 갈등이나 싸움 수준에서는 이와 같은 상황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가 나폴레옹 전쟁에서 절대전쟁의 모순과 교훈을 끌어냈듯이 국가공동체 간의 전쟁에서도 그런 가능성을 고민해볼 수 있으며, 클라우제비츠 본인이 결코 그 가능성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클라우제비츠는 전쟁과 정치의 관계를 존재법칙(sein)으로 설명하지 않고 당위(sollen)법칙으로 설명하고 있다. 전쟁에 대한 정치의 우위는 당연한 게 아니라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클라우제비츠 본인도 나폴레옹 전쟁을 지켜보면서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군사적 천재라고 이야기했던 나폴레옹 본인이 정세를 읽지 못하고 프랑스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전쟁 수행자의 입장에서 그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폭력성은 어떻게 정부와 이성적 정치논리를 변질시키는가?
2. 폭력과 정치의 변증법
폭력과 정치의 긴장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전쟁과 폭력을 지배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에티안 발리바르는 전쟁론에서 정치와 전쟁의 관계를 통념과 다르게 역전시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즉 전쟁의 ’ 논리‘가 정치의 합리성을 전복시키고 정치가 추구했던 합리성의 논리가 변형되어 결국에는 정치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정치의 가능성과 권력을 확대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면 정치 행위는 절대적 한계에 도달한다는 관념을 함의한다. 그러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며, 정치적 주체의 존재가 위험에 빠질 뿐만 아니라 정치행위의 정치적 성격과 정치의 정치적 ‘논리’ 자체가 전복될 수 있는 위험 지대, 제한 영역으로 진입한다는 관념 역시 함의한다. (중략) 정치는 전쟁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면 변형될 수밖에 없으며, 아마도 근본적으로 변형되고 변성될 것이다.
클라우제비츠를 위대한 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던 그 명제가 현실에 대한 관찰로서 해석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상황이 거의 불가능했다고, 혹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에티안 발리바르는 이를 다음과 같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인간학의 용어법을 도입해서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이란 이름으로 정치와 결합시키는 ‘폭력’은 무제한적 폭력이 아니라 제도적 폭력이며, 제도적 폭력으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은 ‘폭력이 정치의 계속’이 아니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에게 문제는 어떻게 폭력이 극단에 이르면서도 제도의 한계 내에서, 제도적인 것으로 남게 할 수 있느냐이다. 하지만 대립물의 통일이 유지될 수 없다면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또는 발생할 것인가?
지속되는 폭력성의 관점에서 보면 한 번 시작된 전쟁은 정치와 무관하게 폭력을 불러오며 폭력은 다른 분쟁과 폭력을 불러온다. 클라우제비츠가 말했던 이상적 관념 속의 전쟁도 이런 식의 극단적 상호작용(Wechselwirkung)을 거쳐 극단화된다. 아무리 국제질서와 평화를 수호하려는 국가라도 할지라도, 의미 없이 지속되는 분쟁에 적극적 군사력을 통해 개입한다든지 등의 이유로 폭력은 확산된다. 정치적 목적이 뚜렷한 전쟁조차도 한 번 시작된 폭력은 상호 간에 적대감정과 적대의도를 극대화한다. 따라서 한 번 시작된 폭력은 끝나지 않으며, 처음에 설정했던 정치적 목적은 변형되고 잊힌다. 전쟁은 오직 전쟁을 위한 전쟁으로만 남게 될 뿐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 예시로 1차 대전 당시의 독일을 살펴볼 수 있다. 헤어프리트 뮌클러(2015)는 그의 책에서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이 정치적 목적이 부재했던 전쟁수행에 맹목적으로 몰입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1914년 1차 세계대전 참전을 신성화하는데 교양 시민계층이 주도했지만, 그 누구도 당시 여름에 어떤 목적으로 국가 차원에서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독일 시민계층은 전쟁수행에 참여함으로써 귀족과 동등한 위치를 주장할 수 있다는 명확한 계급투쟁 성격의 동기가 있었다.
하지만 독일 국민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었으며, 특히 당시 독일의 국가적 차원에서 전쟁을 통해 외교적 실리를 취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수많은 국가들에 승리했어야 했다. 군사적 승리를 거듭해야만 정치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그러한 전쟁에 성공할 수 있다는 분위기에 고취되어 선동당했다. 독일 시민계층은 ‘영국인들의 감정도 없고 정신도 없는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며 호소했다.
선동은 애국주의적 정서와 종교적 이유를 들어 지속되었다. 독일의 목사와 신학교수들은 전쟁은 신의 섭리에 따른 구원 사건이었으며, 희생이 크면 클수록 상환될 선금도 크다고 호소했다. 종교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전쟁 수행 책임자들에게서 전쟁을 개시하는데 어느 정도 부담을 덜어줄 수 있었다. 이로써 독일이 상대해야 할 국가들에 대한 적대감정과 적대의도가 정당화되어 끊임없이 재생산될 수 있었고, 이는 1차 세계대전 패전의 책임이 충분히 ‘애국’하지 못한 이들에게 있다는 배후중상설로 이어진다. 독일은 결국 본인들이 진지한 정치적 고려 없이 전쟁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반성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의 책임이 단순히 독일 군부나 히틀러에게 있는게 아니라 독일 국민 전체에게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다만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란 인민에게 확산된 폭력성은 정치논리를 왜곡하고 장님으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에티안 발리바르도 같은 맥락에서 애국주의적 이데올로기 등의 위험성을 이야기한다.
애국주의는 국가가 조종할 필요가 있지만 지배할 수 없는 대중의 정서이기 때문에 도덕적 요인은 정치의 합리성을 위협하는 양면성을 생산한다. 전쟁 시기에 애국주의는 공포를 포함하며 또한 공포를 압도하는 적에 대한 증오(Feindschaft)가 된다. 그것은 지배자에 대한 충성과 동일시될 수도 없으며 (그것은 심지어 지배자에 반대하는 것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이해관계에 대한 고려를 통해 주관적으로 통제될 수도 없다. 그것은 정치를 파괴할 수 있는 정치를 실현한다.
전쟁의 폭력성 자체는 전쟁이 지속되는데 유리한 방식으로 적용된다. 전쟁의 폭력성은 정치논리의 변형을 통해 정치로 하여금 폭력을 지속하도록 유도한다. 전쟁은 전쟁 그 자체로 수렴하는 경향을 지니며, 서로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적대감정을 증폭시킨다. 이는 더 큰 적대의도를 형성하여 서로의 목표는 상대방의 궁극적 섬멸에 가까워진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클라우제비츠가 이상전쟁에 관해 말했듯이, 서로에게 전력을 투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폴레옹 전쟁이나 1차 세계대전 당시 모든 독일국민이 ‘정복전쟁’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명백히 이데올로기적 호소, 종교적 신성화, 애국주의 정서 등으로 합리화된 적국에 대한 적대감정과 적대의도는 국가 정부가 마땅히 유지해야 할 정치논리마저 해친다.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 전쟁을 지켜보며 이러한 대립의 산물을 확인했다. 전쟁과 전쟁수단에 대한 정치의 우위가 성립하지 않고서는 파국에 이른다. 즉, 그러한 관계가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클라우제비츠는 이에 대한 규범성을 제공하고자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과 규범은 언제나 일치하지 않는다.
정치의 전쟁에 대한 우위가 전제되어야만 전쟁이 비로소 유의미하다고 해도 나폴레옹 전쟁이나 양차 대전 당시의 독일과 같은 사례가 다시 등장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전쟁과 전쟁수단에 대한 정치 우위의 논리는 결국 전쟁의 국제정치적 목적성이 합리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국가, 혹은 비국가 행위자가 명백히 합리적 목적을 가져야만 전쟁이 개시되는가? 이러한 편견은 특히 국제질서 하 비교적 안정적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 구성원들에게서 발견된다. 뮌클러는 이를 두고 국제질서에 편입된 국가들과 제3세계 사이에 ‘애매한 전쟁의 띠’가 있다고 표현했다. 지난 몇십 년간 전쟁과 무관한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국제정치적 합리성을 맹신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확산될 폭력성을 직시하라고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다.
특히 클라우제비츠는 정치가 전쟁에 우선권을 갖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명시하는 바람에 서구사회의 전통적 전쟁관에 편견을 형성했다. 때문에 명백한 불합리성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국가/비국가 행위자를 마주해서도 자신들과 같은 합리적 사고를 하리라 가정한다. 무력 자체로는 논리를 지니지 못하고 문법(Grammatik)만을 지닌다는 클라우제비츠의 통찰은 옳다. 다만 논리에 내재된 이성(Verstand)이 폭력(Gewalt)에 의해 왜곡되어 정상적인 형태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할 수 없게 만드는 서구사회의 경향성이 있다는 점도 명백하다. 이는 어느 정도 클라우제비츠의 잘못이 있다.
전략문화(Strategic Culture)와 같은 최근의 관점들이 전통적인 국제정치적 연구들에 비해 더딘 것도 이러한 합리성에 대한 가정 때문이었다. 비합리성과 폭력성에 의한 정치논리 변형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전략문화 연구 또한 국가 행위자 내부의 문화가 규정하는 ‘합리성’에 대한 연구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한계를 갖긴 하지만, 기존 전통주의적 시각보다는 폭력성과 비합리성의 원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에 대한 정치의 규범적 우위를 주장함으로써 전통적 서구 전쟁관에 어떤 한계를 짓게 되었다. 이는 다양한 전쟁 양상이나 전쟁 발생과정을 설명하기 힘들게 만든다. 전쟁을 지배하는 국제정치적 논리가 결국 합리성에 귀속된다는 생각은 결국 전쟁을 편협하게 바라보게 만든다. 클라우제비츠 본인이 설명했듯이 정치가 전쟁의 극단화를 제약하는 조건이 될 수도 있으나, 그 반대의 상황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전쟁의 원인이 되는, 혹은 전쟁 중에 발생하는 폭력성은 언제든 정치논리를 해칠 수 있고 국가적 차원에서 전쟁의 목적이 불분명한 상황에서도 여러 가지 요인의 복합적 상호작용으로 인해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이로써 전쟁의 도구성은 반박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명제를 통해 서구사회의 전쟁관은 ‘정치에 귀속된 전쟁’이라는 틀로써 전쟁을 해석했다. 표면적으로라도 외교수단으로서의 정치가 전쟁에 논리를 부여하는데 이견의 여지가 없다. 클라우제비츠 본인도 이야기했듯이 타타르족이나 원시 집단 간의 전쟁이라면 정치논리보다 단순한 보복과 같은 감정 요인이 전쟁의 원인일 수 있으나, 이를 문명국가에까지 적용시킬 수는 없다. 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정치체제가 견고화 될수록 전쟁의 정치논리는 배제되기 힘들어진다. 표면적인 이유라도 국민들은 국가에 엄청난 부담을 부과하는 ‘국가적 과업’에 이유를 부여하려고 한다.
클라우제비츠가 주장한 정치의 우위(primacy)는 규범적 성격을 띠는 탓에 현실전쟁의 양상을 어느 정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나폴레옹 전쟁 때문이었다. 전쟁의 이론적 성질을 고찰한 책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전쟁론의 대부분의 내용인 2-6편은 전쟁수행에 관한 실질적 방법론을 제공하고자 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전쟁수행의 방법론과 그 당위성(sollen)을 주장하고자 했던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이 정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은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나폴레옹의 패인이 정치적 계산의 실패라고 받아들였던 클라우제비츠에게 정치 없는 전쟁은 전쟁수행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본질과 현상(sein)은 당위성과 거리가 있다. 분명 정치논리의 우위는 현실전쟁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긴 했지만, 놓치는 부분도 분명 존재했다. 부족한 정치논리, 혹은 그 자체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전쟁들이 그 반증 사례들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국가의 번영과 세계질서 편입을 포기한 북한의 행태, 국가의 실리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데도 발생하는 종교 간의 갈등 및 전쟁 등.
이처럼 전쟁의 원인과 진행과정을 설명하는데 정치의 전쟁에 대한 우위 논리는 한계를 짓는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서양의 손자병법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주장했던 ‘전쟁의 삼위일체’와 ‘정치의 우세(primacy)’ 간의 간극은 전쟁의 현상들을 연구하는데 걸림돌이다. 정치논리의 우세를 주장하면 분명 발생할 수 있는 전쟁들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한정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 8장에서 ‘정치적 관점이 군사적 관점에 종속되는 것은 불합리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불합리하다고 해서 개연성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전쟁론은 아직도 대부분의 전쟁을 바라보는데 유효한 통찰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 기본 전제를 받아들여야 하며, 우리가 현재 전쟁을 바라보는데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한편 우리는 전쟁의 폭력성과 감정적 성질들도 고찰해야 한다. 어떤 종류의 폭력성과 감정적 요인들이 국민과 정부로 하여금 정치논리를 잊고 전쟁을 지속하게 하는가? 우리가 전쟁론 이후에 대답해야 할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