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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승호 Apr 05. 2024

〈사랑은 낙엽을 타고〉 해석 및 비평

공허의 세계를 절충하는 카우리스마키의 시선

올해 개봉한 카우리스마키의 ‘폴른리브즈’는 여러 가지 희극적 장치들을 내재하고 있지만, 그중에서 특기할만한 것 하나는 극 중에서 안사와 홀라파가 함께 좀비 영화 ‘데드 돈 다이’를 보는 시퀀스다. 안사와 홀라파가 나오기 전 두 명의 관객이 먼저 극장을 나오며 대화를 나누는데, 그중 한 명은 영화가 브레송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와 같다고 하고 다른 한 명은 이 영화가 고다르의 ‘국외자들’과 같다고 해석한다. 사실 앞선 두 영화와 이들이 극장에서 본 좀비 영화 간에 직접적인 상관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들을 포괄하는 한 가지 연결점을 찾아본다면, 세 영화 모두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공허를 함축한다는 점이다.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는 신앙과 자신이 맡은 소임을 수행하려 부단히도 애쓰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마음이 텅 비어버리는 사제를, 극 중의 ‘데드 돈 다이’는 기술문명 산물을 찾아 거리를 활보하지만 허기를 채우지 못하고 결국 다른 인간에 의해 머리가 깨어지고서야 멈추고 마는 좀비를, ‘국외자들’은 어떤 목적도 없이 파국이 섞인 감각적 범죄 속에서 춤을 추는 젊은이들의 초상을 드러내고 있다. 극 중에서 ‘데드 돈 다이’의 결말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안사의 말로 추정컨대 영화 속 영화인 ‘데드 돈 다이’는 안사의 관점에서 허무주의적이고 비극적 결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안사는 ‘결국 그 경찰이 할 수 있는 건 없었어요. 그래도 오랜만에 웃으면서 봤어요.’라는 말을 덧붙이는데 이 말이 꽤나 의미심장하게 들려온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그것이 웃기다니.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해의 여지가 있다. 그들이 웃을 수 있었던 건 당혹감을 직접 경험한 게 아니라 극장에서 스크린을 통해 거리를 두며 간접적으로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나의 삶이 허무하다면 절망스러운 것이 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의 행동이 허무주의가 섞인 기계적 움직임으로 구현된다면 안타까우면서도 동시에 웃길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말은 인생에서 불가피한 절망이 몰려오는 순간이 있더라도 거리를 두고 삶을 영화마냥 바라볼 수 있다면 분명 즐기고 웃을 수 있는 지점이 있을 것이라는 말로 이해된다. 안사와 홀라파가 본 ‘데드 돈 다이’가 현재는 희극적 패러디의 대상이 된 좀비 영화라는 사실이 이를 영화 내적으로 은유하며 이런 관점은 유사한 주제를 다루는 고다르와 브레송의 것과는 다소 대비되는 측면이 있다. 말하자면 ‘폴린리브즈’의 서사세계는 은근하게 ‘브레송의 허망함’, ‘자무쉬의 우스움’, ‘고다르의 역동성’을 한데 뒤섞어 혼혈과 같은 분위기를 창출해 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여러 시선들이 절충된 ‘폴른리브즈’의 영화적 세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절망감이 유령처럼 세계를 배회하지만, 그 배경 속에서 우리는 절망에 융합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때로는 웃음 지으며 우리의 리듬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러니 삶에 별 의미가 없더라도 우리는 웃을 수도, 사랑할 수도 있다.’ 그리고 카메라는 마치 그 이야기를 브레송에게 전하듯 극장에 걸려있는 브레송의 영화 ‘돈’의 포스터를 계속해서 프레임 안에 비추기 시작한다. 안사와 홀라파가 엇갈려 비극이 예상되는 순간에도, 그들이 다시 재회하여 주소를 교환할 때도 말이다. 이 영화의 눈동자는 대체 브레송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그런 점에서, 브레송의 ‘돈’과 ‘폴른리브즈’를 비교해 보는 일은 흥미로운 일이 될 수 있겠다.


브레송의 영화 ‘돈’은 돈을 욕망하는 인물들이 조금이라도 돈을 더 취하고자 윤리적, 법적 경계선을 넘나드는 이야기다. 이런 서사적 흐름은 돈에 취한 인물들이 돈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다 종국에는 살인에 다다르며 갑자기 종결되는데, 그 마지막에서도 대체 돈을 왜 욕망했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마지막 쇼트에는 그저 시신처럼 허공을 응시하는 병든 주체만이 남을 뿐이다. 다시 말해, 브레송에게 있어서 돈은 인간의 ‘주체성’을 잠식하고 ‘자본주의적 반응성’으로 인간을 좀비처럼 만드는 기생충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무형의 기생충과 맞닥뜨려 브레송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 사실을 카메라와 스크린을 통해 고발하는 일이다. ‘돈’에서는 돈이 이동하는 장면마다 클로즈업으로 돈을 포착하고, 일반적인 상황 쇼트라면 롱쇼트를 사용할 곳에서 미디엄 쇼트나 클로즈업을 사용하여 마치 이 세계가 인물의 목덜미를 점점 조르는 것처럼 이미지를 그려내는데, 이런 시선에는 극도의 절망과 연민이 담겨있다. 브레송은 프레임 뒤에서 그저 고발밖에 할 수 없다는 현실에 심적인 피눈물을 참으며 카메라를 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시선에 이름을 붙인다면 아마 어버이적 시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적 세계는 브레송과는 다소 다른 양상이다. 궁핍하고 마땅한 희망을 장착하고 있지 않은 인물들이 때때로 법이나 규칙을 어기기도 하지만, 이들에게는 작고도 귀중한 소망이 있다. 겉으로는 기대하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인연을 만나는 것. 언젠가 음반을 내 유명한 가수가 되어보는 것. 그러니까 이 황량한 세계에서 카우리스마키의 인물들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처럼 가장하면서 끊임없이 환경을 극복하려 움직이는 모순적인 주체다. 영화 내에서는 마치 이를 입증하려는 듯, 롱쇼트로 인물을 프레임에 담을 때, 인물이 후경에서 전경까지 성큼성큼 다가왔다가 다시 반대쪽 후경으로 나가는 역삼각형의 구도를 반복하는데 이는 인물이 궁핍한 현실의 공간에 융합되지 않고 공간을 극복하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더불어 ‘폴른리브즈’의 인물들은 기계들에 둘러싸인 이 삭막한 세계에서도 다소 냉소적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다. 이런 냉소적 유머가 영화 내에서 종종 나타날 때 카메라는 컷을 살짝 늘여서 이들을 멍하니 잡는듯한 느낌을 주는데, 웃음의 요소를 좀 더 느껴보라는 카메라의 의도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런 카우리스마키의 시선은 허무주의와 유머, 애정이 복합적으로 교호 되는 친교적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선은 브레송의 카메라가 투영하는 어버이적인 시선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어버이의 시선이 ‘돌보는 주체’와 ‘돌보아지는 객체’ 간의 위계적 관계를 연결한다면, 친교의 시선은 ‘너’와 ‘나’의 상호적 관계를 연결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브레송이 부성애적이라면, 카우리스마키는 동료애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해 볼 점은, 누군가를 진실하게 대면하기 위해서는 결국 해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대상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해석은 불가피하고, 우리는 가끔 클로즈업을 통해 상대를 조각내 파편화시키기도 한다. 다르게 말하면, 오해를 생성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런 오해는 관계에 균열을 만들어 내고, 그 균열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그간의 해석을 해체하고 다시 조립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그때서야 상대가 진정으로 선명해지기 시작하고 인간 대 인간의 관계, 동료애가 가능해진다. 결국, 클로즈업을 통한 파편화는 대상에 대한 오해를 해체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 되며 여러 방식의 조각난 프레임들을 기워 맞추는 과정 끝에 우리는 진정으로 대상과 만나게 된다.


이런 관점으로 영화를 본다면 브레송의 ‘돈’과 카우리스마키의 ‘폴른리브즈’의 시선이 대비된다고 했던 글 전반의 견해를 수정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폴른리브즈’의 시선은 ‘돈’의 시선과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돈’의 시선에서 시작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오해가 영화의 역사를 경유해 ‘폴른리브즈’의 시선에까지 도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 영화가 어떤 정답이 될 순 없다. ‘폴른리브즈’ 또한 하나의 영화 작품(film)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파편화된 작품들을 여기저기 기워 맞추며 인간이란 퍼즐의 인상을 가늠해 볼 뿐이다. 그래도 확실한 건 이런 시선들의 교차가 삶을 점점 더 명징하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이며 이런 사실은 ‘예술은 불확실한 세계를 밝혀주는 기둥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 들뢰즈의 말을 연상시킨다. 우리의 영화들은 매 순간 새롭게 우리를 비추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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