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를 연극하는 인형에서 생동하는 인간으로
인생이란 희곡은 부조리를 맞이하고 어쩔 줄 몰라할 때, 진정으로 시작된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아내려면, 때로는 차에서 내려야 하는 순간도 필요한 것이다.
우리 모두가 아는 상식적인 명제가 하나 있다. '상실을 맞이했을 때 가장 필요한 건 충분히 애도하는 것.' 하지만 이런 경구와도 같은 명제가 유령처럼 주위를 떠도는 건, 대개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후쿠와 오토는 4살이 되었을 때, 딸을 잃었다. 오토는 그 슬픔을 잊기 위해 섹스와 이야기에 빠졌고, 가후쿠는 연극에 빠져들었다. '고도를 기다리며'나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연출하고 부조리한 삶의 고통에서 무력하게 스러지는 바냐를 연기하며 가후쿠는 스스로를 처벌하는 방식으로 고통에서 도망쳤다. 이 연극에서 인물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대사를 뱉는데, 자신들의 이 고통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으며 이해하게 두지 않을 것이라는 가후쿠의 선언처럼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슬픔에 대한 회피 방식에는 유통기한이 있으며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은 결국 상하기 마련이다. 후반부에 드러나는 타카츠키의 고백과 오토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오토는 의도적으로 남자들을 데려와 집에서 불륜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가후쿠가 문만 열면 볼 수 있는 거울을 CCTV 삼아 자신의 죄를 고해하려는 것처럼. 하지만, 이런 고해는 성사되지 않고 오토의 죽음으로 미결 사건이 되어 버린다. 가후쿠가 밤늦게까지 눈을 돌렸기 때문에.
이제 가후쿠는 삶에서 딸의 죽음에 대한 슬픔 외에 도망쳐야 할 고통이 몇 가지 늘었다. 아내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 화를 내지 못 한 자신에 대한 무력감, 그리고 토사처럼 묻혀버린 아내에 대한 분노. 자신 속에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견뎌내지 못 한 가후쿠는 더 이상 바냐 역할을 수행하기가 힘겨워진다. 자신을 간접적으로 처벌하는 '역할 수행'이 불가해지자 가후쿠가 선택한 것은, 그 배역에 다른 인물을 세우고 자신은 연출의 역할로 더욱 물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역으로 세운 인물이 다름 아닌 오토의 불륜 상대인 타카츠키이다. 어떤 점에서는 자신을 처벌하는 역할에 아내의 불륜 상대였던 타카츠키를 세우는 것보다 나은 선택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타카츠키라는 인물의 특성 때문에 상황은 가후쿠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다소 충동적이며 향락적 생활을 즐기지만 상대와 거짓 없이 만나는 진실한 사람.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 이는 일면 이방인의 뫼르소를 삽입한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데, 가후쿠와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타카츠키는 가후쿠의 내면에 직면이라는 균열을 심는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해 낸다. 자신이 스스로의 내면을 부정하고 있었다는 것. 마음을 부인했기에 사랑하는 아내와도 진실로 만나지 못했다는 것. 이 두 가지를 가후쿠가 깨닫게 될 때쯤, 타카츠키는 상해치사로 극에서 퇴장한다. 결국, 가후쿠는 다시 한 번 무대 위로 소환되고 바냐가 되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그 양상이 이전과는 다르다. 영화의 전반부가 고통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시도였다면, 영화의 후반부는 고통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이다. 진실하게 살아가려면 가후쿠가 말했듯 충분히 슬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기꺼이 아파하고, 기꺼이 애도한다면 향초와도 같은 담뱃불이 꺼질 때쯤 다시 한 번 시동을 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출발해 보자. 그 끝에서 우리의 차가 지나온 행로를 돌아보고, 너무도 아프고 힘들었다고 투정 부려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