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이라는 살인과 이해라는 모욕
진실이라고 하는 건 예술 작품과 같다. 바라보는 각도와 조명에 따라 물리적 실재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목도하는 이들이 무엇을 믿는 사람이냐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세 번째 살인〉은 의도적으로 파편화된 사실만을 듬성듬성 배치해 전체 그림을 그리기 어렵게 만든다. 코끼리의 형상을 모르게 할 뿐만 아니라, 지금 만지고 있는 게 코인지 다리인지도 알 수가 없다. 이런 피상적 사실에는 자연스레 인물들이 소유한 믿음이 투영되고, 각자의 진실은 실타래처럼 엉켜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진창에 빠진다.
의뢰인을 이해하기보다는 주어진 사실에 맞는 최적의 전략을 찾는 것에만 몰두하던 변호사 시게모리는 본인이 일하는 공장의 사장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미스미를 만나면서 어떤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변호사인 시게모리는 재판의 승패에 집중하는 반면 미스미는 재판의 승패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미스미는 자신에게 유리하든 불리하든 상관없이 진술을 계속 번복하고 그 의도를 변호인에게 알려주지도 않는다. 마치 내면에서 뭔가 계속 조각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시게모리는 본인의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분열적인 인간의 조각들을 맞춰보려 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모순적이며 불가해한 것을 마주했을 때 본능적으로 빈 여백을 채우려 하는 특성이 있다. 하지만, 그 여백을 채우는 질료는 우리가 가진 믿음이기에 이렇게 구축된 진실의 형상은 사실 상대가 아니라 나의 것에 가깝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미스미와 대면할 때조차 시게모리는 쇼트 내에서 출처를 알 수 없이 자신의 눈에 쏟아지는 빛과도 같은 믿음을 봤던 것이지 미스미를 보고 있던 게 아니다. 미스미가 살인 자백을 번복했을 때에도 시게모리는 믿지 않았다. 자신의 믿음에 근거해 그 말을 해석했을 뿐.
영화의 말미까지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 미스미의 모습은 자신을 믿기보다는 해석하려 한 시게모리, 사법제도, 더 나아가 관객에 대한 조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점에서 진실을 추구하는 해석은 살인과 같을 수 있다. 게슈탈트 심리학자 김정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해받는 것은 모욕이다."
그럼에도 유일한 진실이 있다면, 미스미가 사형을 선고받을 것을 앎에도 자백을 번복한 것과 시게모리에게 진실을 알려주기를 거부한 것 아닐까. 이는 일면 《이방인》의 뫼르소가 내리는 실존적 결정처럼 느껴진다. 자신을 살해하고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거부함으로써 어떤 해석의 탄생을 지연시키는 것. 즉, 타자의 해석에 의해 자신의 진실이 살해당하고 훼손되는 것에 대한 저항. 그것이 이 모순적 심판에 대한 미스미의 유일한 반항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