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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늘 Aug 18. 2024

여름 방학 여행기 1. 제주 편

<여행의 첫날>

드디어 여름 방학이 끝났다.

올해 여름 방학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방학이었다.

삼시세끼 밥을 챙겨줘야 하는 식구가 곁에 없어 너무 좋았음은 당연했고, 혼자가 아닌 여행길이었기에 외롭지 않았으며, 속옷까지 젖을 역대급 더위와 싸워야 했지만 더운 만큼 내 망막에 담겼던 자연의 모습 또한 역대급으로 아름다웠다.     

여행과 개인사로 한동안 독서와 글쓰기를 멀리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몸을 추스르며 길었던 여름방학 여행기를 글로 쓰며 기억을 정리해보려 한다.


첫 일정이 시작되던 날, 새벽부터 캐리어를 끌고 출근길 인파에 섞여 전철을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방학이 시작되어 공항인파가 많을 것으로 생각하고 부지런히 나섰지만 아침 비행기라 사람이 많지 않았다.

덕분에 느긋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생각해 보니 여행의 시작을 혼자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흔 넘게 살면서 여행은 항상 친구, 연인, 가족과 함께 시작했고, 특히나 최근 십 년 동안 내 여행의 동반자는 항상 남편과 아이였다.

그들과 함께 탈것에 오르기 전 카페에 들르거나 편의점에 들러 부식 거리를 고르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나 혼자 편의점에 들러 간단한 아침거리를 결정하고서야 혼자라는 낯섦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행의 설렘과 기대를 함께 나눌 누군가가 곁에 없으니 허전해하면서도 이제껏 혼자 여행도 안 다녀보고 도대체 뭘 하고 살았나 싶었다.

그렇게 허전함 반, 설렘 반을 가슴에 품고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제주에 도착하니 친구가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숙소에 들를 것도 없이 바로 여행 시작이었다.

해안도로를 오른쪽에 끼고 서쪽으로 달려 바다를 배경에 둔 평범한 카페에 들렀다.

SNS에는 특별한 음료와 화려한 인테리어,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무장한 핫한 카페들이 많이 광고되었지만, 그 순간 그런 건 다 필요 없었다.

내게 필요한 건 단지, 제주도라면 흔해빠진 검은 현무암이 가득한 인적 없는 바다와 시원한 커피, 그리고 친구면 충분했다.

애월 투썸플레이스에서


아침 10시, 제주 바다를 보며 호사스럽게 스케치북을 꺼내 그림을 그리며 친구와 수다를 떨고 있는 내 모습이 신기했다.

한두 시간 사이 내가 발 딛고 있는 장소의 풍경이 확 달라지고, 더 이상 혼자라는 허전함도 싹 사라졌다.

그때부터는 무얼 먹어도 괜찮고, 어딜 가도 좋았다. 시간에 쫓기지 않기로 했다.

돌멩이 하나, 풀포기 하나, 구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눈에 담기 시작했다.   

  

첫날의 일정은 그렇게 제주 서쪽 해안을 따라 돌았다.

애월읍의 카페에서 차를 마신 후 협재에서 딱새우 비빔밥을 먹고, 신창 풍차 해안도로를 들러 우리만의 인스타그램 릴스 영상을 찍고, 벨기에 Lannoo Publishers 선정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세계 서점 150곳’ 중 한 곳인 ‘소리소문’이라는 책방에 들러 친구와 나는 서로에게 책을 한 권씩 선물해 줬다.


내가 받은 책은 내가 좋아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소로의 일기-여름 편』, 내가 선물해 준 책은 박완서의 에세이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였다.

서로의 취향을 잘 알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서로 읽어보고 싶은 책을 쿡쿡 옆구리 찔러가며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책을 주고받았다.


저지리 소리소문 책방


서점은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유명세 덕인지 사람들이 제법 있었지만 책 구경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다.

입구 한쪽 칠판에는 이주의 시로 안태운의 『여름에 어울리는 옷 사람』이라는 시가 정갈한 글씨체로 빼곡히 적혀있었다.



서점의 어느 한 곳도 허투루 낭비되는 공간이 없이 꽉 채워져 있었고, 독립출판물과 베스트셀러, 인문과학 분야와 예술 분야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큐레이션 된 채 독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따라간 아이들도 평소 책을 많이 좋아해서 어른들 취향에 맞춘 여행코스였어도 전혀 지루해하지 않고 훌륭한 여행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여행은 친구와 나만을 위한 시간은 아니었으니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미디어 아트 전시관 ‘아르테 뮤지엄’까지 방문한 후 숙소에 돌아와 난생처음 고등어회와 갈치회를 먹고 수다를 떨다 잠이 들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김영하의 에세이 『여행의 이유』를 읽었었다.

작가는 여행의 본질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여행은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의 내면은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는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바람이 있다고 했다.

나의 여행의 표면적 이유도 휴식과 관광이겠지만 내 내면에는 이번 여행을 통해 뜻밖의 것들을 함께 얻어갈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여행을 통해 내 삶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친구와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더 끈끈한 유대감을 얻고 싶다.

 훗날 다시 이곳을 방문했을 때 내가 기억하고 있을 풍경을 비교해 보는 것도 좋지만, 누구와 뭘 먹었고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가 더 기억에 오래 남길 바란다.      



실제로 이 친구와 대학 시절 다른 일정으로 제주도를 배낭 여행하다 협재 해수욕장에서 하루일정을 맞춰 신나게 놀았던 경험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20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협재 바다의 풍경보다 여전히 우리가 어디 민박집에서 만나 놀았는지가 더욱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이번 여행도 시간이 지나 그렇게 기억될 거라 기대했다. 역시나 매일 채팅을 하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사는 모습 하나하나 다 잘 아는 친구 사이지만 실제로 얼굴을 보고 함께 여행을 다니며 나누는 이야기는 채팅으로 나누는 이야기보다 훨씬 깊고 다정했다.

그리고 며칠 후 다른 친구들까지 합세하여 이십년지기들끼리 아이, 남편, 직업, 삶, 미래에 대해 밤을 새워 이야기했다.      


기억이 가물거리기 전에 여행 과정 동안 친구들과의 이야기, 부모님의 삶에 대해 이해하게 된 점, 나에 관한 생각들을 쓰고 싶었다.

글로 쓰다 보면 내가 이번 여행으로 얻어온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얻어온 것이 별거 아닐지도 모르는 쑥스러운 여행기일지라도, 나는 쭉 써보려 한다.




나의 삶, 나의 일상, 나의 에세이.  여름방학 여행기 1. 제주 편 <여행의 첫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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