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첫날, 육로관광코스 A
이번 울릉도·독도 여행은 아무래도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여행이다 보니, 처음부터 마음 편하게 패키지여행으로 준비했다. 숙소준비에, 운전하고 끼니 챙기고, 코스를 결정하고 부모님 컨디션을 챙기다 보면 내가 너무 힘들어 지칠 것 같아서 모든 것을 편하게 하고자 현지 여행사와 여행 계약을 진행했고, 결론적으로 참 잘했던 선택이었다.
도동항에 도착하여 현지 가이드와 접선 후 이름도 기억나지 않은 항구 앞의 한 식당에 가서 울릉도에서 첫 끼니인 ‘산채 비빔밥’을 먹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총 7식 중 5식을 패키지에 포함시켰는데, 울릉도 현지 특별식으로 구성된 5식 중 한 끼가 바로 산채 비빔밥이었다. 섬에서의 특식이 산채비빔밥이라니 뭔가 아이러니했지만 그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육로관광 투어버스의 가이드 설명을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울릉도는 수심 깊은 동해바다의 중간에 화산활동으로 솟아난 섬이다.
울릉도에서 배를 타고 조금만 나가도 수심이 1km 이상 되는 깊은 바다다 보니 오징어 외 다른 어종이 잘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울릉도에서는 일반적으로 밥상에 올라오는 고등어, 갈치와 같은 생선을 잡기가 무척 힘들고, 보통 이런 생선은 육지에서 배송받아먹는다고 한다. 횟감용 생선이 안 잡히는 건 아니지만 육지의 횟집처럼 먹고 싶은 어종을 골라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그날 어부의 그물에 어떤 생선이 잡혔느냐에 따라 그날 먹는 회가 달라진다고 한다.
오히려 섬 내륙 곳곳에서 나는 풍성한 산나물, 예를 들면 부지깽이, 명이나물, 삼나물, 미역취, 고사리가 지천에 깔려있어 해산물보다 산나물 반찬이 울릉도 밥상에는 더 많이 오르내린다고 한다. 실제로 버스투어를 하며 섬 여기저기 보이는 풀들이 잡초가 아니라 부지깽이라는 나물이었다.
울릉도의 육로관광 코스는 도동항에서 출발해 시계방향으로 서쪽해안을 돌아 나리분지까지 도착하는 A코스와 시계반대방향으로 동쪽을 향해 봉래폭포와 내수전전망대까지 향하는 B코스가 있다. 점심을 먹고 본격적인 관광을 위해 투어용 버스에 올라탔다. 첫날 오후일정은 버스를 타고 나리분지까지 이어지는 육로관광 A코스를 돌 예정이었다. 버스 투어에는 부부 여행객 몇 팀과 여섯 명의 할머니 한 팀, 세 친구가 함께 온 중년여성 한 팀이 함께 했다.
패키지여행의 묘미는 무엇일까?
시끌벅적한 오디오와 춤추는 관광객들?
관광을 시작도 하기 전에 쇼핑몰에 들러 현지에서 꼭 사야 하는 특산품들을 주어 담는 쇼핑?
현지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가이드의 현란한 입담을 타고 흐르는 각 명소의 이야기?
다행히 이번 여행에는 버스를 흔드는 현란한 음향과 조명, 춤추는 관광객은 없었다.
대신 재치 넘치는 가이드의 말솜씨와, 이미 관광버스 여행은 수십 번은 다녀보신 듯한 내공을 품기는 할머니들의 만담에 버스 안은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낯선 이들과 함께 여행일정을 공유한다는 것이 불편하고 어색하게 생각되었지만, 점차 나이가 들어도 여행의 열정을 뽐내고 젊은 사람들만큼 씩씩하게 일정을 소화하시는 모습들을 보며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나도 나이가 들어 관절이 닳아 걷는 속도가 느릴지라도, 이에 굴하지 않고 함께 늙어가는 벗들과 함께 여행지로 떠나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저렇게 최대한 즐기고 살고 싶다는 바람이 들었다. 실제로 이번 여행에서는 이 여행의 고수들이 보여준 센스 있는 순간들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노인들의 패키지여행에 갖고 있던 그동안의 나의 선입견이 얼마나 한심한 수준이었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순간이 버스에서 할머니들의 대답과 유머, 웃음이었다. 나는 보통 레크리에이션 행사나 이런 여행에서 참가자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사회자나 가이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적당히 듣다가 쑥스럽게 피식 웃거나, 동행자와 사회자의 말투나 행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편인데, 상당히 웃기거나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어야 박수를 치고 깔깔거리고 분위기에 동조한다. 그런데 이 할머니들이 보여준 태도는 나와 전혀 달랐다. 가이드의 말 한마디에 '얼쑤'라든지, '옳소'와 같은 추임새를 넣고 즉각 호응을 해주고, 한 발 더 나아가 삶의 내공이 담긴 유머를 쏟아내시며 분위기를 끌어올리시며, 이야기를 들으며 수동적으로 구경하는 관광객이 아니라 이야기를 함께 만드는 입장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바꾸고 계셨다.
울릉도의 서쪽 해안에는 유명한 바위들이 많이 있었다. 작년쯤 태풍으로 낙석사고가 발생해 인명피해가 있었던 거북바위, 울부짖는 사자 모양의 바위, 코끼리 모양의 주상절리 바위, 트럼프의 휘날리는 머리칼을 쏙 빼닮은 트럼프 바위, 곰이 만세를 하는 모습의 바위, 세명의 선녀가 목욕을 했다가 옥황상제의 노여움으로 바위로 변했다는 삼선암 등을 볼 수 있었다.
패키지 관광객이 갖추어야 할 자세 중 하나는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빨리빨리 이동을 해야 하고, 관광명소에서 다음이동 전까지 하라는 것들을 부지런히 하고 와야 한다. 나 또한 패키지 여행객답게 가이드가 '버스에서 내리세요', '지금부터 무엇을 하세요', '언제까지 오세요'라는 지시사항에 열심히 귀 기울이며 부모님을 모시고 이리저리 이동하며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이때도 여행의 고수, 할머니들의 부지런함을 엿볼 수 있었다. 젊은이들보다 걸음이 느린 탓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매의 눈으로 사진의 포인트를 빠르게 찾아 이미 누가 사진을 찍고 있건 말건 일단 몸과 핸드폰부터 들이밀며 인증사진을 찍고 휘리릭 버스에 올라타셨다. 이 분들은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패키지여행 숙련가들이었다.
버스 투어 가이드 아저씨는 위트 있는 설명도 일품이었지만 울릉도의 좁고 구불거리는 도로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모든 바위를 잘 볼 수 있도록 버스를 운전하는 솜씨 또한 최고였음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나보고 자유여행으로 이렇게 운전하라고 했다면, 도로운전에 온 신경을 쏟느라 항구를 벗어나기도 전에 지쳐 떨어졌을지도 몰랐다.
패키지여행상품이다 보니 한 번의 특산물 쇼핑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호박엿, 호박빵, 호박젤리, 호박조청, 더덕진액 등이 한 번에 쇼핑이 가능한 쇼핑센터를 방문했다. 어차피 사게 될 거라면 먼저 편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평소 기관지가 안 좋은 엄마는 더덕진액을, 배가 고팠던 나는 호박빵을 사들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이후 ‘예림원’이란 곳을 방문했다. 이곳은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울릉도 유일의 식물원이자 조각작품 등 구경할 거리가 많아서 관광버스가 들리는 곳 중 한 곳이었다. 관광을 원하면 매표소에서 티켓을 따로 끊어 구경을 하도록 안내를 받았다. 티켓값은 성인 기준 인당 오천 원이었다.
울릉도까지 왔는데 오천 원이 아까워서 구경을 안 하고 버스에서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곳은 바다의 절경과 수목원의 조형물들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14,000제곱미터의 넓은 땅에 20억 정도의 비용을 써서 조성했으며 단 한 사람이 울릉도의 자생식물들로 꾸미고 가꾼 식물원이란다.
어느 정도의 열정이 있으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일까?
돌 하나, 나무하나, 조형물 하나도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사실에 존경심이 절로 솟아났다.
예림원에는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그곳에 올라 바라본 몽돌해변의 풍경이 예술 그 자체였다. 분명 깊어 보이는데 맑고 투명한 푸른빛의 바다, 몽돌 하나하나가 그대로 다 비치는 깨끗한 바다가 눈앞에 펼쳐있었다. 이제야 울릉도의 바다를 제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제주도의 찬란한 에메랄드 빛과는 무척 다른, 보는 이의 눈길을 쭉 빨아들이는 것 같은 그윽한 청색의 바다였다.
투어버스는 이제 오늘의 하이라이트 '나리분지'를 향해 달려갔다.
나리분지를 넘기 위해서는 산길을 넘어야 했는데, 가이드 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아무리 가파르고 좁은 울릉도의 산길일지라도 여름이든 겨울이든 투어버스는 그 길을 오르내린다고 한다. 겨울에는 눈이 3미터 이상 쌓일 때도 있지만 버스는 산길을 넘을 수 있다는 말에 다들 놀랬다. 눈이 많이 내리는 울릉도에서 겨울마다 도로에 쌓인 눈을 누가 어떻게 치우냐고 물었다. 가이드는 울릉도는 겨울이면 바닷물을 도로에 뿌려 소금이 천연제설 역할을 하게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고 도로를 살펴보니, 도로 주변마다 해수가 담긴 커다란 물통들이 즐비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바닷물을 끌어와 도로에 뿌리면 도로가 얼지 않고 제설 효과도 오래가며 재료값이 들지 않아 비용도 절약된다. 아무리 극한 환경이라도 어디든 다 적응해 살아가는 지혜가 있다. 아무튼 그렇게 울릉도의 제설법을 설명 듣다 보니 어느덧 나리분지에 도착했다.
오백만 년 전 화산폭발로 울릉도가 만들어지고, 분화구가 무너지며 나리분지가 되었다. 백두산의 천지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물은 없다. 절벽이 가득한 울릉도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평지가 바로 이 나리분지이며, 처음 개척민들이 이 땅에 왔을 때 지천에 나리꽃이 피어 있어 나리분지라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사실 나리분지 안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높은 산봉우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지리책에서 글로만 보았던 ‘분지’에 내가 있다는 사실 말고는 나리분지라는 특정 지명이 나에게 주는 특별함은 없었다.
버스는 우리를 나리분지 한가운데 있는 유명한 산장 앞에 내려주었다. 나리분지 관광이라는 명목으로 이곳에 왔지만, 실상은 그 식당에서 먹고 마시다 가라는 무언의 권유와 같았다. 점심식사 후 딱 적당히 출출해질 만한 시간에 산장 앞으로 관광객을 데려다 놓는 여행사의 영업방식에 박수를 보냈다.
우리는 정말 그때 너무 배가 고팠다.
오징어산채전과 음료수를 한 병 시키고 기다리는 동안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을 맞으며 더위를 식혔다. 아마도 이곳이 육로코스 A의 하이라이트인 이유는 점심식사 이후 딱히 먹은 것이 없어 허기진 여행객들의 배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 아닐까? 혹은 이곳에서만 마실 수 있다는 씨껍데기 막걸리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맛이 너무 궁금했지만, 암 수술 후 금주중이신 아빠 때문에 술은 마시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게 될 나리분지는 나리분지의 생김새나 울릉도의 전통가옥이 어떻게 생겼냐 보다는, 배가 무척 고팠고, 먹었던 음식이 정말 맛있었다고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
두둑이 배를 채우고 다시 버스를 탔다. 예전 같으면 나리분지까지 오면 다시 왔던 길을 돌아서 항구로 가야 했는데, 이제는 울릉도 일주가 가능하도록 섬 둘레를 이은 길이 모두 뚫렸다고 한다. 덕분에 금세 섬을 한 바퀴 돌아 숙소가 있는 저동항에 도착했다. 저동항은 기다란 방파제를 따라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마주 보고 있고, 방파제 안쪽에는 아직 출항의 때가 아닌 오징어잡이 배들이 가득 있었다. 오후 6시가 가까운 시간인데도 항구 주변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알고 보니 마침 8월 5일부터 7일까지 울릉도에서는 오징어 축제가 열렸으며, 그날은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레크리에이션과 가수들의 축하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여행날짜 한번 기가 막히게 잘 잡았다고 부모님의 칭찬이 있었고, 심지어 우리의 숙소가 축제의 주무대가 펼쳐진 저동항이라는 사실에 한번 더 칭찬을 받았다. 저녁 식사 후 편한 마음으로 축제를 즐기다가 코앞의 숙소에 들어가면 되었다.
저녁식사는 오삼불고기였다. 매콤한 소스가 버물어진 오삼불고기와 부지깽이나물반찬으로 배를 잘 채운 우리는 자연스럽게 축제무대를 즐긴 후 숙소로 돌아왔다.
엄청 긴 하루가 다 갔다. 새벽 4시에 광주에서 출발해 밤 9시에 울릉도 저동항의 숙소에 몸을 뉘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주전부리를 뜯고 대화를 할 기운 따위는 없었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세 명 모두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울릉도에서 첫날은 숙소밖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를 자장가 삼아 모두가 그렇게 뻗어버렸다.
나의 삶. 나의 일상. 나의 에세이. 여름 여름방학 여행기 6. 울릉도·독도 편 (2). 울릉도 첫날, 육로관광코스 A.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