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신의학신문 Jul 27. 2018

<트라우마> 과거에 멈춰있는 시간, 묶여있는 시간

[정신의학신문 :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그 날 멈춰버린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다.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2013, TVA)


애니메이션 장면 中 (제작:A-1 Pictures,애니플렉스,후지TV)


어린 시절부터 비밀기지에 모이곤 했던 진타와 단짝 친구 5명, 이들 사이에서 첫사랑이 수줍게 피어오르던 어느 여름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이들 중 한 명인 멘마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각자 다른 마음의 상처를 뒤로하고 이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5년 후, 등교를 거부하고 집에서 외톨이로 지내고 있던 진타 앞에 멘마의 유령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그녀의 존재를 단순히 환각으로 치부하던 그였지만, 그때 그 시절의 순수함을 간직한 그녀의 천진난만함에 점차 그녀의 존재를 믿게 되고,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하여 진타는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 옛 친구들을 찾아 나섭니다.
 

재경험 - 친구의 죽음과 함께 멈춰버린 남겨진 이들의 시간

PTSD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외상후스트레스장애는 한 가지 또는 그 이상의 외상성 사건에 이어 나타나는 재경험, 회피, 각성과 반응성의 변화 등을 특징으로 하는 정신질환입니다.

외상성 사건이란 전쟁, 사고, 자연재앙, 폭력 등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이러한 사건들이 가족 또는 가까운 사람에게 일어난 것을 알게 되는 간접적인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게 된 환자들은 이러한 외상적 경험과 이를 떠올리게 하는 자극에 대하여 심한 공포심과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는 무력한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외상 당시의 장면과 기억이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에, 일어났던 사건을 떠올리는 것을 고통스러워하게 되며 심한 경우 외상의 존재를 부정하기도 합니다.


애니메이션 장면 中 (제작:A-1 Pictures,애니플렉스,후지TV)


애니메이션 초반부, 우리는 멘마가 죽은 후 남겨진 5명의 망가진 일상을 보게 됩니다.

주인공 진타는 행동력 있고 쾌활했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등교는커녕 집 바깥으로의 외출도 쉽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며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잠을 자거나 게임만 하며 지냅니다.

유키아츠는 겉보기에는 모범생처럼 보이지만 당시의 이야기만 꺼내면 이성을 잃고 난폭해지는 모습을 보이며 심지어 밤이면 죽은 멘마의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존재하지 않는 멘마와 대화를 하는 등의 이상행동을 보입니다.

멘마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하고도 두려움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폿포는 스스로 돈을 벌어 해외를 탐험하는 등 적극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는 멘마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충격과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필사적인 발버둥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결국, 남겨진 아이들 모두 5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사건으로 끊임없이 고통받으며 살아갑니다.
마치 친구의 죽음과 함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애니메이션 장면 中 (제작:A-1 Pictures,애니플렉스,후지TV)

"내일 사과하면 될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다음 날은 영원히 오지 않았다."

 

회피 - 심각한 외상을 경험한 아이들에게 조기치료가 필요한 이유

물론, 이들 중 모두에게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사람들은 극심한 정신적 외상을 겪고도 일상생활을 잘 유지하는 반면, 어떠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 기준에서는 크게 심하지 않은 사건에도 증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 5명 모두가 마음속에 심각한 상처를 입고도 그것을 마주 보기 두려워하며, 동시에 나머지의 삶 전체가 그 사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겉으로는 당시를 극복하고 편안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던 나머지 두 명의 친구들도 당시의 죄책감과 주변에 대한 미움, 열등감으로 망가져 갑니다.
 
극 중에서 별명은 이들의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중요한 소품입니다.
이들은 평온하고 침착한 상태를 보이다가도 진타가 당시의 이야기를 꺼내거나 그들을 당시의 별명으로 부르자 크게 동요하며 화를 내게 됩니다.

과거의 외상적 사건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은 외상적 사건과 유사하거나 상징적인 내적, 외적 단서에 노출되었을 때 매우 강렬한 심리적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생각과 느낌, 행동을 필사적으로 피하게 되는 ‘회피’라는 증상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회피’는 이들의 고통을 경감시켜주지 못합니다.
진타와 폿포가 과거를 생각나게 하는 모든 것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사회적 접촉을 회피한 후에도 이들의 무기력감과 죄책감,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유키아츠의 경우에는 과거의 상처를 끊임없이 재현하는 반복강박(repetitive compulsion)을 보이기도 합니다.
 
‘회피’는 이들이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심리적 외상은 때로는 기억의 저편으로 숨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고통스러운 기억이 의식으로 떠오르는 것을 피하게 됩니다.
이 숨어버린 감정과 고통들은 인생 전체에 걸쳐 재경험되며 보다 깊은 상처로 확대됩니다.


애니메이션 장면 中 (제작:A-1 Pictures,애니플렉스,후지TV)

“나 봤었어. 그날. 난 무서워서, 여기에 있는 게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은데 왠지 어떻게 해도 도망칠 수가 없어서. 고등학교에 안 가고 멀리 가버리면 바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돌아오게 돼! 그곳으로!”
 

슬픔을 슬픔으로,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것

애착이론의 선구자로 알려진 영국의 정신과 의사 보울비(1907-1990)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비탄(grief)이 발생하고 사라지는 과정을 4단계로 나누어 설명하였습니다.

1단계에서는 멍해지며 현실을 부정합니다. 가슴속에 알 수 없는 공허감이 생기며 비현실감을 느낍니다.

2단계에서는 고인과 함께 있었을 때의 편안함과 안정감에 절박하게 매달리고 고인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3단계에서는 강렬한 무망감과 절망이 엄습하며 인생을 지속해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됩니다.

4단계에 이르러서야 사람은 인생이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회복하게 되며 이에 따라 새로운 패턴의 매일이 시작되게 됩니다.

상실의 슬픔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으나 서서히 인생이 재건되며 상실 후에도 남아있는 인생의 긍정적인 부분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단계는 순차적으로 나타나며 한 단계를 충분히 거치고 경험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3단계를 충분히 거치지 않으면 상실을 경험한 개인은 나머지 인생을 분노와 우울에 사로잡혀 살게 되며 인생을 긍정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있어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극의 주인공 5명은 비탄의 각 단계에서 멈춰버린 이들의 전형적인 문제를 보여줍니다.
이들은 친구의 죽음 후에 슬픔을 표현할 기회도, 추억을 정리할 시간도 가지지 못한 채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표현하지 않고 부정한다고 해서 마음속의 슬픔과 비탄이 사라질 리 없습니다.
추억이 주는 기쁨과 아픔을 충분히 이야기하고, 경험하고, 슬퍼하는 과정을 통해서만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인생에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며, 인간은 이 과정을 통해 슬픔의 흉터는 여전히 남아있을지언정 먼 훗날 그 사람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잔잔히 미소 지을 수 있게 됩니다.
 
극 종반부에 드러나는 멘마의 소원은 ‘어릴 적 어머니를 잃은 진타가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충분히 슬퍼하고 울 수 있게 되는 것’, 즉 감정의 표현에 의한 상처의 치유였습니다.
그리고 멘마가 죽음으로써 멘마의 소원은 그녀의 친구들 5명 모두에게도 해당되게 됩니다.
이들은 모두 ‘충분히 슬퍼하지 못한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진타와 함께 멘마의 생의 궤적을 찾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힘들게 숨겨왔던 ‘그날’과 마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자신들이 억눌러왔던 부정적인 감정을 해방시키고 추억을 재구성하는 치유의 과정이 됩니다.


애니메이션 장면 中 (제작:A-1 Pictures,애니플렉스,후지TV)

"진타는 울지 않아. 아마 내가 이렇게 돼서 계속 혼자 노력하는 것 같아.
그것만은 마음에 걸려. 사실은 좀 더 화내고. 울어줬으면 했는데."

 

멈춰있던 시간이 흐르고, 과거의 상처는 추억의 아련함으로 남는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죽은 멘마와의 숨바꼭질 장면은 마치 외상후스트레스장애의 치료과정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들은 각자 멘마가 죽던 날, 멈춰버린 자신의 시간으로 돌아가 그 날을 다시 한번 재현합니다.
그리고 각자 미처 말하지 못하였던 잃어버린 사랑의 감정을, 열등감과 죄책감을, 질투를, 나약함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들이 행하는 숨바꼭질이라는 행위는 숨겨왔던 상처의 치유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들은 의식의 저편으로 숨겨놓았던 자신의 감정을 찾아내 의식으로 ‘떠올려 기억하고’, ‘느끼고 슬퍼하며’, ‘현실적으로 재구성’하게 됩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끝나지 않았던 과거와의 숨바꼭질이 끝난 후 친구들은 드디어 멘마와, 그리고 오랫동안 상처받았던 자신과 작별을 고합니다.
멘마 또한 끝내 전하지 못했던 자신의 첫사랑을 진타에게 전하고 환한 미소와 함께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 모든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후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잔잔히 미소 짓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지고 있었던 무거운 짐을 벗어난 것처럼.


애니메이션 장면 中 (제작:A-1 Pictures,애니플렉스,후지TV)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랑클(1905~1997)은 그 자신이 직접 3년간의 나치 강제수용소의 생활을 경험하고 저술한 명저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인간이 괴롭고 끔찍한 상황을 견디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정신적 힘으로 ‘태도와 자유의 결정능력’을 들었습니다.

책의 원제인 ‘인간의 의미탐구(Man's Searching for Meaning)’가 의미하듯이 자신을 둘러싼 시련과 역경에서 스스로 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불행과 외상을 견뎌낼 수 있는 인간의 원동력이며, 자신의 고통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 상태’가 지속되면 고통이 끝난 후에도 고통의 후유증이 지속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통과 슬픔을 인생에서 지우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고통으로, 슬픔을 슬픔으로 받아들이며 내면에서 고통과 슬픔의 의미에 대하여 성찰하며 다룰 수 있게 하는 것이 정신적 외상을 다루는 치료의 핵심이 아닐까 합니다.
과거를 극복하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충분히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충분히 슬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애니메이션 등장인물들이 말하듯 ‘이별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니메이션 장면 中 (제작:A-1 Pictures,애니플렉스,후지TV)


"점점 멀어져 가는 계절에 길가의 핀 꽃도 달라져 간다.
그 계절에 핀 꽃은 뭐라고 하더라?
하늘하늘 흔들리면서 닿으면 조금 쓰라리고
코를 가까이하면 아련하게 따스한 햇살의 풋내가 나며 점점 엷어져 간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 꽃은 분명 어딘가에서 다시 피겠지."






정신의학신문 홈페이지 바로가기

www.psychiatricnews.net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