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강요가 아닌 받아들임
[정신의학신문 : 윤홍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요가 아닌 받아들임
상처 받은 사람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 상황을 직접 겪지도 않은 남인데, 남들이 뭘 하라고 해줄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배우자의 외도를 알게 된 부인에게 함부로 충고를 해서는 안 됩니다. 함부로 용서하라거나, 참고 살라는 얘기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 또한 함부로 조언을 하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글의 제목에 "받아들임"에 대한 단어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 단어 때문에 지금 부인은 머릿속에서 "결국, 이미 벌어진 일이니 받아들이라는 말이군?"하는 반감이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저 또한 상처받은 부인에게 어떤 강요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상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해 지식을 전달하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지금 부인에게는 상처가 생겼습니다. 피부에 날카로운 물질이 닿으면 피가 나고, 제때 소독을 하지 않으면 농이 차고 곪게 되듯이 부인의 마음에도 상처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외도 비슷한 얘기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남편 비슷한 상상만 해도 분노가 올라올 것 입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하루에도 수십명씩 그런 상처를 바라보게 됩니다. 부인은 이런 일을 처음 겪으시는 것이겠지만, 저희는 매일 이런 상처를 다룹니다. 물론, 제가 부인과 똑같은 경험을 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큰 아픔이고, 고통인지 똑같이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들이 빨리 안정을 찾는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피부를 다쳤다고 생각해봅시다. 이것이 정말 상처인지 자꾸 반창고를 떼어보고, 만져보고, 눌러보고, 잘 움직일 수 있는지 이리저리 움직여본다면, 상처는 점점 덧나고 회복되는데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를 미리 알고, 그 과정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회복을 앞당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들
첫 번째, 우리는 ‘분노의 시기’를 경험할 것입니다. 이 시기에 우리는 보통 "왜?"라는 질문을 합니다. 남편에 대해 궁금한 것들이 쏟아질 것입니다. 믿음이 깨진 것에 대한 분노가 치솟기 때문입니다. 내가 의심하거나 다그치지 않아도, 세상이 평화롭게 유지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 대한 의문이 생길 만한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믿었던 것들, 무관심했던 것에 대한 의심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도대체 왜 그런 것인지, 상간녀는 왜 내 남자를 택한 것인지, 시어머니는 왜 그런 것인지에 대해서 무지하게 많은 질문을 쏟아내게 됩니다. 혹은 자신에 대한 질문도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성적인 매력이 없어진 것인지? 내가 눈치가 늦은 건지? 내가 믿기만 한 게 잘못인지? 많은 것에 의문을 표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분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궁금한 것 같지만, 사실은 화가 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배우자에게, 상간녀에게, 그와 연관된 모든 사람들에게 서운하고 억울합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의 신체도 격렬하게 분노할 것입니다.
신체가 분노하는 것은 의사들에게 있어서는 큰 걱정입니다. 심장에 무리가 가고, 면역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입니다. 화가 나는 것은 이해되지만, 그것이 지속되어 건강에 문제가 생길까봐 걱정됩니다. 부디, 화가 나는 것은 인식하고 받아들이시길 권합니다. "내가 지금 많이 화났구나."라고 중얼거리면서 심호흡을 깊게 하십시오. 그래야 스트레스로 인한 질환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는 ‘가정의 시기’를 경험합니다. 우리에게 벌어진 일이 머리로는 받아들여지지만, 가슴에서는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알기는 하지만, 느끼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 가정합니다. "내가 만약, 이러했다면 그 일을 피할 수 있었을까?", "남편이 만약 그 장소에 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 "내가 만약 좀 더 단호했더라면, 이런 일을 겪지 않고 살아 갈텐데..."하면서 가정합니다.
물론, 우리가 시간을 과거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이성으로는 그것을 알고 있지만 거부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이랬더라면...."하는 가정형의 문장이 머릿속을 맴도는 시기가 옵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과, 받아들이기 힘든 감정 사이에 협상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런 가정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결국 첫 번째 시기인 분노와 두 번째 시기인 가정의 시기가 계속 반복됩니다. 이런 가정이나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화를 내고, 이렇게 화를 만든 남편 때문에 화가 나고, 다시 가정하기를 반복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에너지가 소진됩니다.
결국 분노와 가정을 반복하다가 지칠 때쯤 우리는 세 번째 시기인 ‘우울감의 시기’를 만납니다. 세상이 부정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무기력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피부의 상처와 비유하자면 우울감은 딱지가 생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더 이상 피가 뚝뚝 떨어지지는 않지만 간지럽고, 부드러운 피부가 아닌 불편한 껍질이 생기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익숙하지 않고, 부자연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딱지를 떼어버리면 오히려 상처가 덧나고 다시 딱지가 생기길 기다려야합니다. 우울한 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외도를 했다는 나쁜 사건은 과거의 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시기를 넘긴다 해도, 상처와 우울한 기억은 남아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우울감을 거부하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소원만 빌고 있다면, 어렵게 내려앉은 딱지가 떨어져 나갈지도 모릅니다.
사건을 받아들이기
이런 이유로 어떻게 우울감의 시기를 넘기느냐는 상당히 중요한 일이 됩니다. 무턱대고 거부하다보면 다시 분노의 시기나, 만약을 가정하는 시기를 무한반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우울감을 술이나 담배, 혹은 나쁜 사람으로 달래려고 하면 더 큰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상처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우울감은 최종 관문이라는 점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죽음이나, 이별, 암 진단 같은 나쁜 것을 받아들이는데 심리적으로 다섯 단계를 통해 진행된다고 얘기합니다.
그것은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의 다섯 단계 입니다. 우리가 남편의 외도를 알고 있다는 것은, 우리는 이미 '부정'의 단계를 지나갔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분노하고, 만약을 가정했던 것은 수용의 2-3단계를 넘나드는 관문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수용이라는 단계를 겪게 될 텐데, 그 직전이 우울입니다. 그러니, 기분이 가라앉고, 의욕이 떨어지고,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것은 마지막 고비에 도달한 셈입니다.
물론, 이런 우울한 사건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누구나 바라고 있었을 겁니다. 다른 문제는 다 포기하더라도 결혼 문제만큼은 평화롭고 안정되게 이루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들의 소원입니다. 나에게 우울한 사건이 생기더라도, 이 남자로부터 얻게 된다는 것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이 사건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합니다.
하지만, 이 우울한 사건을 거부하면서 너무나 많은 후유증이 남지 않기를 바랍니다. 분노는 우리를 공격합니다. "만약에 이랬다면"이라고 생각하면서 가정할수록 우리는 무기력해집니다. 되돌릴 수 없다는 한계에 자주 봉착하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많이 힘들더라도, 하루하루 받아들이기가 좀 쉬워졌으면 좋겠다."라고 바람을 가져봅시다. 받아들임을 희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기대하는 것이나, 자책하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이 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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