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환기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헐리우드 감독 인생에서 절정의 가도를 달리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덩케르크'에 대해 우리나라 배급사에서는 '이것은 전쟁영화가 아니다'라며 홍보했다. 르네 마그리트가 이미지의 배반에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듯 호기롭게 붙인 이 당황스러운 카피문구는 그래도 꽤나 훌륭한 마케팅효과를 거둬낸 듯 하다. 당황스러움은 관심으로 관심은 궁금증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대체 전쟁영화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2차세계대전의 한복판에서 수만의 군사들이 총알과 폭탄 아래 고군분투하는 저 영화가 전쟁영화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전쟁영화들이 품고 있는 서사적 핵심 재료는 '싸움'이다. 건물이 무너지고 참호가 폭발하는 전투들과 냉혹한 참모들의 숨막히는 모략들은 모두 상대방을 이겨내기 위한 싸움의 드라마를 그려낸다. 그것이 얼마나 찬란하던 처참하던 간에 말이다. 전쟁영화는 싸움의 서사시다.
'fight or flight response(싸우거나 도망치거나 반응)'라는 용어가 있다. 멋진 운율의 이름을 가진 이 반응은 하버드 의과대학의 생리학자였던 Walter 박사가 처음 명명한 생리학적 반응이다. 동물들은 위협에 직면했을 때 교감신경의 급격한 활성화가 일어나며 싸우거나 도망가거나 할 수 있는 준비태세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fight or flight response가 활성화되면 뇌하수체를 통해 부신에서 만들어내는 에피네프린 등의 호르몬들이 연쇄적으로 분비되며 온몸이 긴장하게 되고, 뇌에서는 스트레스에 대항할 수 있는 신경전달물질들을 분비하게 된다. 심장은 더 빠르게 뛰어 더 많은 피를 뿜어내고, 소화기관은 잠시 멈춘 채 모든 혈류와 긴장을 근육과 뇌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 최종단계에서 뇌는 결정한다. 도망칠 것인지 싸울 것인지.
'싸움'과 '도망'은 생리학적으로 같은 언어를 공유한다. 재빠르게 상대의 숨통을 노린 한발을 뻗거나, 부리나케 뛰어 적보다 한발 빠르게 도망가거나. 두 극단적인 행동은 모두 단 하나의 목표 '생존'을 향한다. 생존을 위한 최적의 도약을 향해, 하나의 생리학적 반응에서 극적으로 분화한다.
덩케르크는 싸움이라기 보다는 탈출과 도망의 드라마이다. 영화에는 주인공도, 악역도 구구절절한 각자의 사연도 없다. 단지 죽음이 산재한 전쟁터와, 죽음으로부터 도망쳐야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단 한번도 스크린에 얼굴을 드러내진 않지만 집요하게 추적하고 공격하는 독일군의 포화 속에서 주인공 아닌 주인공들의 목표는 오로지 탈출 뿐이다. 숨고, 피하고, 도망쳐서 벗어나야만 한다.
죽음과 얼굴을 맞댄 채 필사적으로 생존을 향해 탈출해야만 하는 운명은 아무래도 씁쓸하다. 싸워서 이기고 싶은 사람은 있지만 애초부터 져서 도망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도망은 싸움의 포기이자 패배의 자명한 증거이다. 죽음의 공포에 너덜하게 지친 영혼들은 패배라는 죄책감에 두배로 비참해진다. 초유의 구출작전으로 죽음의 구덩이를 탈출해내고서도 영화 속 병사들은 생존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자괴감에 억눌려 전쟁터 밖에서도 괴로워한다.
정신과를 찾는 환자들 중에는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자책감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특히 그런 환자들 중에서는 자신을 괴롭히고 학대하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히려 자신을 비난하는 경우들을 보게 되기도 한다. 신체적, 정서적, 성적으로 자신을 학대하던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똑부러지게 상대에 맞서 싸우지 못하고, 제대로 고소를 해서 법적으로 상대를 벌하지도 못하고 단지 도망치기만 했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혐오하기도 한다. 스스로를 한없이 원망하며 자해, 자살로 치닫기도 한다.
이른바 ‘자기비난’(turning agsinst self)은 상대에 대한 자신의 분노와 비난을 감당하지 못해 그것을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는 방어기제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인 것이다.
영화 ‘굿윌헌팅’에서는 숀 교수(로빈 윌리엄스)가 윌(맷 데이먼)에게 반복적으로 “It’s not your fault(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읊조리자 괴로워하던 윌이 결국 오열하고마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자기비난에 허우적대는 상처받은 환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위로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가해자를 치료자가 대신 비난해 주는 게 아니라, 그들이 여전히 가치있고 충분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말이다. 그 악몽을 견뎌내야만 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함을 마음 깊이 공감해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덩케르크에서 필사의 도망을 쳐온 뒤 수치심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병사에게 담요를 나눠주던 어느 노인이 건네던 말처럼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방미 일정 중 장진호전투 기념비에 방문해서, 흥남철수작전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인도주의 작전이라며 스스로도 흥남철수의 수혜자라고 연설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퇴로를 차단당해 해상으로 퇴각해야만 했던 그 당시, 문 대통령의 부모 또한 북한주민의 한 사람으로 철수작전 중에 상선 메리디스 빅토리호 편에 거제도로 피난했고, 2년 뒤 그 거제도에서 문 대통령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숨 가쁘게 포위로를 좁혀오는 적군을 피해 한시라도 바삐 군인들을 퇴각 시켜야하는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얼굴색도 눈동자 색도 다른 지구 저편의 사람들임에도 그 모든 목숨들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내야할 가치가 있는 불씨들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덩케르크에 고립된 채 전쟁에서 패퇴하는 젊은이들을 구출해내는 민간인들과, 중공군의 역습에 흥남항으로 퇴각하면서 10만명의 민간인을 구출해내는 군인들.
전쟁에는 승패가 있다. 인생에도 때로는 승패가 있을 수 있다. 싸워야하고 이겨내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덩케르크가 드러내는 전쟁이라는 트라우마의 생생한 영화적 체험이 다시 한번 우리에게 그 모든 것보다 근본적인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있는지 모른다. 살아남는 것. 존재하는 것.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는 것 말이다.
싸우거나(Fight) 도망치거나(Flight) 우리는 모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벅차게 감동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