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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의학신문 Nov 01. 2017

<채식주의자>에 등장하는 정신과 의사를 위한 변명

왜 정신과 의사는 주인공에게 고통을 줄 수밖에 없었는가


[정신의학신문 :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참고: <채식주의자>의 중요한 줄거리가 등장합니다.



한 마리의 종달새를 가둘 수는 있지만
노래까지 멈추게 할 수는 없다.


1981년 IRA(아일랜드 공화국군)의 일원으로 영국 감옥에서 66일 간 단식투쟁(hunger strike) 후 사망한 보비 샌즈의 자작시 일부이다. 그의 실화를 다룬 영화 <헝거>는 <노예12년>을 연출한 스티브 맥퀸의 2008년 데뷔작이며, 올해 초 우리나라에서 뒤늦게 개봉했다.


‘단식 투쟁을 하는 자에게 인위적으로 음식물을 주입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라는 오래된 윤리적 질문이 있다. 이에 대해 세계의사회는 '단식 투쟁자에 대한 몰타선언'(WMA Declaration of Malta on Hunger Strikers)에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율성에 대한 존중이며, 따라서 단식 투쟁자에 대한 강제 급식은 비윤리적인 행위라고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 보비 샌즈에게도 단식으로 인한 합병증에 대한 치료들은 이뤄지나 강제 급식은 행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헝거>와는 달리, 식사를 거부하는 자의 저항을 무릅쓰고 의사가 음식 공급을 위해 콧줄(Levin tube)을 강제로 삽입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작품이 있다. 노벨문학상,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불리는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이다. <채식주의자>는 어느 날 갑자기 고기를 버리는 것을 시작으로 결국 모든 음식을 거부하는 영혜라는 여자를 가족들의 시선에서 그리고 있다. 일상의 얼굴을 하고 있는 폭력들-육식, 가부장의 학대, 가족 유지를 위한 희생양(scapegoat) 만들기, 결혼 생활에서의 착취 등-을 받아내던 영혜가 ‘일탈’적으로 식사 거부를 함으로써 그녀를 향하던 억압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겉으로는 문제없어 보이던 가족들의 삶에도 지각변동이 생기기 시작한다. 정신병원 입원 후 결국 의사의 판단으로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 팔다리를 붙잡고 콧줄을 넣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영혜에 대한 세상의 억압들을 효과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장치의 일종으로 강제급식에 대한 묘사가 사용된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신의학이 예술 작품 속에서 억압과 규범을 상징하는 클리셰로 활용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만약 현실의 정신과 의사가 <채식주의자>와 <헝거>의 주인공을 각각 대면한다면 어떨까? 아마도 작품에서처럼 영혜에게는 강제 급식을 시도할 것이고 보비 샌즈에게는 시도하지 않을 텐데, 이렇게 자신의 의지로 똑같이 ‘굶어 죽어가는’ 두 인물에게 다른 결정이 내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비 샌즈의 행위는 정신 질환으로 인한 게 아니지만 영혜의 그것은 정신질환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고 맞는 답이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두 상황의 차이를 비교함으로써 들여다보자. 다시 말해, 둘을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근거인 '온전한 판단력'(intact judgement)의 유무라는 추상적인 특성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으면 한다.


사진_픽사베이


해당 인물이 온전한 판단을 하고 있는 지의 여부는, 자신이 식사를 거부하는 이유와 식사 거부로 인한 결과를 (무의식의 반대 의미로서의) `의식 수준'(consciousness level)에서 인지하고 있는지, 식사 거부가 주인공에게 수단인지 아니면 목표인지, 또한 이들이 원하는 것이 그들의 삶에서 실제로 발생가능한 일인지를 따져보면 알 수 있다.


보비 샌즈는 IRA 대원들의 정치범 지위에 대한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식사를 거부했을 뿐 식사 거부 그 자체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는 식사 거부가 지속될 경우 자신이 어떤 의학적 경과를 거치게 될지에 대해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매우 강경한 입장이었고 실제로도 보비 샌즈가 죽을 때까지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으나, 정치범 지위의 인정이라는 것은 소금이 설탕으로 바뀌는 류의 불가능한 사건은 아니므로, 그의 바람은 실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 주장이 관철되면 그는 식사를 다시 시작할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영혜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영혜는 자신이 식물이라 믿고 있으며 한층 더 식물을 닮고자 음식을 거부하고 자신에게 물을 뿌려달라고 한다. 그녀는 식사 거부를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를 지향하고 있다. 즉 식물이 가진 특징 중 하나인, `음식을 먹지 않는다'라는 (결과로서의) 현상을 모방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행위를 지속한다고 해도 소금이 설탕으로 변할 수 없듯 그녀가 식물로 변할 확률 역시 없다. 그러므로 그녀의 믿음이 지속되는 한 식사를 재개할 가능성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영혜의 식사거부 `덕분에' 그녀를 둘러싼 폭력의 기제들에 균열이 발생하는 효과가 생기기는 한 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강이라는 신이 창조한 세계에서의 목적일 뿐, 영혜라는 인물이 의식(consciousness) 차원에서 의도한 목적은 아니다. 즉, 영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가 식사거부를 통해 구현하게 되는 것- 폭력 기제에 균열을 내는-은 행위의 무의식적(unconscious) 동기의 부산물일 수는 있으나 의식적으로 의도한 것 (intention)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녀의 메타포적 망상(delusion)으로 인한 행위를 지켜보는 정신과 의사는 그 무의식의 동기를 짐작하고 안타까워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를 저지할 수밖에 없다. 어떤 신념이 신념이기 위해서는, 한 개인 `내부'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화해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깨어있는 동안의 삶은 곧 의식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정신과의사가 소설 속으로 들어간다 해도 역시 소설에서처럼, 한강이라는 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한강의 의도에 걸맞는 역할들, 즉 의사로서의 의무, 그리고 상징적 억압의 일부로서 복무하는 역할 모두를 충실히 수행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리고 나서 그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소설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세계-폭력과 억압으로 가득한-를 다시 온전한 판단력으로 살아낼 수 있도록 돕고,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 생명을 이어나가며 저항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약 더 나아갈 수 있다면, 영혜가 자기 행위의 동기를 의식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거나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영혜에게 억지로 콧줄을 끼워 넣은 의사가 영혜를 존중하는 방식이며, 억압과 구속의 상징적 존재로서 할 수 있는 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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