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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의학신문 Oct 30. 2017

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 - 가면성 우울증


[정신의학신문 :  신승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tvN '응답하라 1988' 방송화면


많은 이들이 사랑했던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시청자들의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던 장면이 있었다. 모친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장례를 치르던 동일(성동일 분)은 내내 웃으면서, 차분하게 손님을 맞이하여 가족들을 의아하게 만든다. 하지만, 미국에서 급하게 귀국한 형을 마주하자마자, 눈물을 터뜨리며 오열한다. “무엇이 급해서 이리 빨리 떠났느냐. 이제 엄마 없으면 어떻게 사느냐”라고. 그 뒤로 덕선(혜리 분)의 나지막한 나레이션이 깔린다.

 

어른들은 그저 견디고 있을 뿐이다.
나이의 무게감을 강한 척으로 버텨냈을 뿐이다.
어른들도 아프다.


늘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을 것만 같은 아버지도 아프다.

그저 아픈 기색을 가벼이 내비치기에는 어깨에 얹은 짐이 너무 무거워, 애써 감추는 것일 뿐.



아버지도 아프다


“큰 애 대학 등록금 낼 시기는 다가오고, 아까는 돈 빌린 친구한테 계속 전화가 오는데, 받을 면목이 있어야지. 풀 데가 없어서 집에서 술 한 잔 하려고 해도, 막내 공부해야 한다고, 밖에 나가서 먹으라네요. 막상 누구한테 연락하려니 신세도 초라하고. 혼자 공원에 앉아만 있다가 왔지 뭡니까. 제가, 죽지 못해 삽니다.”


최근 잠이 잘 오지 않아 진료실을 찾은, 우울감과 공허함을 토로하던 40대 남성분의 푸념이다. 그야말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우울한 중년의 모습이다.


에릭슨이라는 심리학자는, 인생의 단계에 따라 달성해야 할 과업을 이야기했는데, 우리가 흔히 중년이라 일컫는 40-50대에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의 생산성(productivity)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봤다. 대부분의 이 시기의 남성들은 커리어의 황금기를 보내면서, 직장에서는 관리직의 역할을, 집에서는 아이들과 아내를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하며 충실하게 이 과업을 이루어나간다. 하지만, 생산성이라는 과실의 이면에는, 건강하게 분출되지 못한 억눌린 감정들이 도사리고 있다.


많이 바뀌고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유교 문화를 따른다. 이 문화권 안에서의 아버지의 역할은 늘 엄격하고, 체통을 지키며, 가족들에게 모범이 되는 아버지의 상이다. 가족들에게 시시콜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 ‘위엄있는 아버지’를 은연 중에 강요하는 것이다. 중년의 남성들은 대개 이러한 문화의 영향 아래에서 성장하였으며,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일이 익숙지 않다. 그저 생산성을 내면, 내 가족이 행복해질 것이고, 그러고 나면 자신이 행복해질 것이라는 식의 어설픈 논리에 기대며 어깨에 짊어진 짐들의 무게에 눌려, 코앞만 바라보고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사진_픽셀


가면성 우울증 (masked depression)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2009년부터 2013년까지 5년간의 건강보험과 의료급여 자료를 분석한 결과, 50대 이상 남성 우울증 환자가 4년 만에 4만6,302명으로 1만 명 이상 급증했다고 밝혔다. 그야말로 요즈음이 ‘중년의 위기’라고 불릴만 하다.


중년 남성의 우울증은 가면성 우울증(masked depression)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가면성 우울증은 정식적인 진단명은 아니지만, 우울증에서 특이적으로 나타나는 우울감이나 무력감과 같은 내면적 변화가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반면, 내적 고통이 속 쓰림, 어깨 결림, 과도한 피로감과 같은 신체의 증상들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가면성 우울증은 중년 이상의 나이에서 더 잘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네 아버지들의 우울증 성향이 이에 가까울 것이다. 내면의 우울감, 좌절감, 무기력감을 애써 감추며,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그리고 자신이 여태껏 쌓아왔던 것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 무리해서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가려 한다. 그리고 이처럼 감정을 감추고 억압하려는 행동은, 결국 증기가 가득 찬 밥솥이 폭발하듯이 자살 충동이나, 분노의 폭발과 같은 행동화 (acting-out)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겪는다.


실제로, 서울대 의학연구원 인구 의학연구소 박상화 박사팀의 자살률 변화 분석에 따르면, 자살률(10만 명당 자살자 수)은 1980년대 후반 8.2명에서 2010년대 초반 29.6명으로 3.6배나 증가했는데, 2010-2014년엔 전체 자살에서 20, 30대의 비율은 줄고 40-60대의 비율이 늘었다고 한다. 이 기간에 특히 남성의 자살률은 3.4배로 가파르게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사진_픽셀


‘행복의 조건’은 남 이야기?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는 ‘행복의 조건’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찾아낼 수 있을까? 하버드 대학의 정신과 의사, 조지 베일런트는 하버드 대학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60여 년 동안의 전 생애에 가까운 기간의 연구를 통해 인간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찾아내려 했다.


그래서 찾아낸 요소들이

1. 고난에 대처하는 성숙한 대처와 방어기제,

2. 평생에 걸친 교육,

3. 안정적인 결혼 생활,

4. 45세 이전의  금연,

5. 알코올 중독 경험없는 적당한 음주,

6. 규칙적인 운동,

7. 적당한 체중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중년의 삶은 여기에 부합하는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삶은 어떠한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을 하며, 가벼운 운동이나 휴식을 위한 여유도 없이 삶의 시간을 희생하고 있지는 않은가? 과도한 업무와 막중한 책임감을 담배와 술로 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산성의 덫에 갇혀, 바쁜 직장생활에 치여, 가족들을 위해 여유를 누리지 못하는 우리네 아버지들에게 이러한 행복의 조건은 요원할 뿐이다.


사진_픽셀


건강한 중년의 삶을 준비하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변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1) 커뮤니티를 만들기

학창시절의 동창 모임이든, 취미를 공유하는 동호회든 좋다. 피상적이고 격식만 차리는 딱딱한 모임이 아닌, 진짜 내 마음속에 있는 ‘작은 아이’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말할 수 있는, 또 그런 말을 하면서 타인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커뮤니티를 가지도록 하자. 연결감과 소속감,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기표현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평생의 취미를 찾아보기

평생의 취미를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 굳이 가족이나 타인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어도 좋다. 요즈음은 자신이 배우고자 한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배움의 장이 열려있다. 연주해보고 싶었던 악기, 운동, 공예 같은 예술 활동들에 열중하는 행위는, 쳇바퀴 돌듯 돌아가는 수동적인 삶에 성취감과 더불어 내면의 깊이를 더해준다. 최근 정신의학에서 치료적 형태로 대두되고 있는  ‘마음챙김(mindfulness)’ 의 관점에서 본다면, 과거나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here and now) 존재함을 느끼며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는 습관이 정신건강에 굉장히 중요한데, 취미 활동에의 몰입은 이러한 느낌을 고양시킬 수 있다.


3) 부부 생활을 재편하기-자녀들을 위한 삶은 지양하기

자신의 가정이 자녀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성장기의 아이에게 사랑과 관심을 듬뿍 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성장이 지난 이후에도 ‘자녀들을 위한 삶’은 곤란하다. 자녀들이 독립하기 시작하는 중년기에는, 자녀 중심의 삶에서 부부 중심의 삶으로 가정의 형태가 재편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부부간에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정서와 생각을 공유하며, 관계를 탄탄하게 다져나가야 한다. 함께 공통된 모임을 가지거나, 취미 생활을 하는 것도 좋다. 이 과정이 중년을 맞이하기 전부터 미리 습관화된다면, 부부 중심의 공동체는 중년의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삶의 버팀목이 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이미 독립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자녀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4) 감정을 표현하는 연습하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슬픔이든, 초조함이든, 분노든 화를 제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우리네 중년의 남성들은 이 부분이 가장 취약하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어색할 뿐더러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 같은 두려움을 자아내고, 인간에게는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순간 쌓아 왔던 것들이 무너질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내면의 공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압력이 가득 차 있는 밥솥의 증기를 적절하게 빼 주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굉음을 내며 폭발해버릴 것이다.  감정을 표현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가장 어려운 것이 ‘수위조절’ 이다. 상자 안에서 눌려있던 스프링이 뚜껑을 여는 순간 튀어 오르게 되듯이, 감정 표현이 엇나가거나 과도해질 수 있다. 하지만, 튀어 오른 스프링은 언젠가는 제자리를 찾게 되기 마련이며, 반복적인 연습만이 적절한 수준의 감정 표현을 할 수 있게 한다.


스마트폰의 메모장을 이용하여 간단한 ‘감정일기’를 써 보도록 하자. 오늘, 격렬한 감정의 변화를 경험했던 사건과, 그에 따른 감정, 당시의 생각과 신체 반응을 적어 보도록 하자. 그리고 그 순간에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온건하고도 적절한 감정표현을 고민해보는 기법이다. 이를 부부간에, 혹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지인들 사이에서 피드백(feedback)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첫 시도가 어색하고 부끄럽겠지만, 반복되는 시도는 뇌세포들간의 신경전달 트랙을 만들고, 결국 습관화(habituation)로 이어지게 된다.


사진_픽셀


글을 맺으며


스스로 할 수 있는 노력을 기술했지만, 혼자서 하기 힘들다면 응당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같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등잔 밑의 그늘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의 중년과 지금의 중년은 어감부터가 다르다. 예전에는, 삶의 황혼기 직전에 가장 밝게 빛나는 황금기로 중년을 표현했지만, 지금은 삶의 후반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인생을 건강하고 탄탄하게 견인하는 징검다리의 역할로 여겨진다. 전통적인 아버지의 상 또한 바뀌어야 할 시점이다. 자신을 좀 더 드러내고, 억눌렸던 감정의 압력을 조금씩 빼내는 것이, 그러면서 익숙하지는 않겠지만 가족과 주변의 위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이 시기를 어떻게 현명하고 건강하게 누릴 것인지에 대한 해답이 되지 않을까.




글쓴이_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계명대학교 의과대학 및 동 대학원 졸업

(前) 국립부곡병원 진료과장

(前) 국립공주병원 진료과장 / 아동청소년 정신건강센터 진료과장

(現) 순영병원 진료과장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평생회원

대한불안의학회 불안장애 심층치료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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