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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의학신문 Nov 27. 2017

대한민국의 트라우마, 적폐의 청산

[정신의학신문 : 김환기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선생님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요. 어차피 지나간 일이고 더 생각해보려 해도 힘들어지기만 하는 것 같아요."


환자들과 면담을 진행 하다보면, 환자가 응어리처럼 가지고 있던 결정적인 갈등의 매듭 앞에서 면담자들은 이런 대답을 종종 만나게 되곤 한다. 사실 환자에게 처음 이런 대답을 듣게 될 때에는 면담자로서 누구나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진_픽셀


A라는 한 남성이 직장의 많은 동료들 앞에서 상사에게 심한 인격 모독을 당하고 생긴 스트레스로 진료실에 찾아왔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누구나 그런 상황에서는 강렬한 분노나 수치심을 느끼게 마련일 것이다. 그렇지만 친구와 소주 한잔에 하소연하며 털어내기도 하고, 운동이나 취미 같은 다른 활동으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한다. 때에 따라서는 그 상사에게 똑바르게 사과를 요구하거나 회사를 바꾸기도 한다. 어쨌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풀어간다.


그러나 A씨는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다. A씨는 극심한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심지어 휴일에도 그 사건을 생각할 때면, 그 상사를 생각할 때면 A씨는 압도적인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곤 했다. 불안감이 심해질 때면 호흡곤란과 가슴 통증을 느끼기도 했고, 매사 의욕도 없어졌다. 급기야 A씨는 회사에 출근하지 못하게 될 지경에 다다랐다. 면담자는 적극적으로 A씨의 어려움을 들으며 공감해주고 격려해주었다. 그렇지만 A씨는 좀처럼 사건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몇 차례 면담을 더 진행해 나가며, 면담자는 A씨가 수치스러운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중학생 때에 따돌림과 괴롭힘을 심하게 받았다는 말을 몇 차례 흘리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면담자는 ‘비교적 건실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A씨가 이번 회사에서의 사건이 급격하게 무너진 이유는, 그 때 과거의 상처가 되살아났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물지 못했던 그 때의 상처가 되살아나 무의식 속에서 A씨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면담자는 그 당시의 상처를 A씨가 다시 매듭지지 않고서는 이런 상황이 반복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눈치를 보던 어느 날 면담자는 A씨에게 그 때 당시의 기억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는 것이 지금의 문제를 다시 바라 보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넌지시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자 A씨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그 때 일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네요. 그건 이미 다 지나간 일이고 이제 상관 없어요.”


사진_위키미디어 공용


지난 11월 23일 자유한국당의 ‘정치보복대책특별위원회’의 소속 의원들은 서초구 대검찰청에 검찰의 과잉 수사에 대한 항의 방문을 했다. 현 정부의 적폐 청산은 민생을 도외시한 과도한 정치 보복이다라는 이야기가 자유한국당과 보수진영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앞선 11월 4일에는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 역시 독일 방문 중에 백범훈 총영사와의 만찬 자리에서 “지금 서로 전 정부, 전전 정부, 전전전 정부 때려잡느라 완전히 정신이 없다.” “복수하려고 서로 정권을 잡느냐. 나라를 잘되게 해야지 무슨 복수를 하려고 (정권을 잡나)”라고 말하며 적폐청산 수사를 비판했다.


실제로 최근 뉴스 메인을 장식하는 기사들에는 적폐청산 수사에 관련한 기사들이 끊이질 않고 있다. 고구마줄기처럼 줄줄이 이어지는 기사들의 충격 수위가 연일 최고조를 달하다보니 웬만한 정치 경제란의 범죄 소식들에 대해서는 다소 무감각해지기도 하는 듯 하다. 이러한 수사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입장들도 매우 다양하게 갈라지고 있다. 발본색원을 해야한다는 입장에서부터, 비열한 정치적 보복이라는 입장까지 사이에서, ‘청산은 해야 하지만 너무 과도하다’는 입장이나, ‘그러는 지금 정부는 잘하고 있냐’ ‘예전에도 계속 해오던 것이다’ ‘아니다, 지금도 너무 관대하게 수사하고 있다. 죄다 구속시켜야 한다’는 입장까지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적폐 청산 수사에 대한 입장은 다양하지만 우리나라가 불과 60년전 세계 최빈의 전후국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거듭나는 과정에, 수없이 많은 상처와 부끄러운 트라우마들을 품어왔다는 사실만은 누구도 부정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쌓여가던 고름은 1년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과 함께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말이다. 이제 슬쩍 엿보인 끔찍한 트라우마의 실마리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다가가야만 할까.


사진_픽셀


환자를 다루는 정신과 의사의 입장은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지금 여기 (Here and Now)에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는 입장과 방법이다. 당장 환자가 힘들어하는 것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앞서 예를 들었던 A씨와 같은 경우에는 약물을 처방할 수도 있고, 회사에서 불안해질 때에 그 감정과 생각에 대처할 수 있도록 교정적 개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심한 고통에 휩싸일 때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명상이나 이완 등을 도와줄 수도 있다.


두 번째 방법은, 환자의 지금 문제를 이렇게 악화시키고 지속시키는 과거의 원인을 탐색해보는 것이다. A씨의 경우 어릴 때에 당한 학대와 놀림, 괴롭힘 등의 상황에 대해 다시 떠올려보고, 그 때 충분히 위로받지 못했던 분노나 슬픔을 토로해볼 수도 있다. 당시의 괴로움을 보다 건강한 시각으로 되돌아 볼 수 있도록 도와줄 수도 있다. 또 그 때의 기억으로 A씨가 스스로 낙인 찍은 꼬리표(예를 들면 –나는 부끄러운 사람이다.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도록 권유해볼 수도 있다. 그때 낙인 찍은 자신에 대한 생각이 지금 회사에서의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게 만드는지 돌이켜보게 도와줄 수도 있다. 과거의 기억을 재처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문제는 두 번째 방법이다. 어떤 환자에게 어느 시점에 어떻게 트라우마를 다루어줄 것이느냐 하는 것이다. A씨가 정색하고 대답했던 반응처럼,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트라우마를 꺼내는 것은 오히려 외상을 재경험(Re-traumatized) 시킬 수 있다. 치료자가 과도한 욕심으로 과거의 상처를 꺼내는 것이 오히려 환자에게 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환자 스스로가 지금의 문제를 치료하기 위해 당시의 기억을 다뤄야한다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정신과 의사들이 이 애매한 순간을 판단할 때에 가장 주목하는 것은 환자의 자아 강도(Ego strength)이다. 환자가 현재 어느 정도의 멘탈(?)을 가지고 있는지를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다시 곱씹어 보는 과정의 불편함을 견딜 수 있는지, 그 과정을 통해서 현재의 성장으로 도약할 수 있는지 환자의 상태를 면밀히 파악해야한다. 또 트라우마를 다룰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한다면 현재의 문제를 도와주며 환자가 안정적으로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까지 환자의 자아 강도를 강화 시켜줘야 한다. 좀 더 적응적인 방어기제를 사용하고, 스스로를 잃지 않으면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돌아볼 수 있는 힘이 생길 수 있도록 다독여주며 기회를 노려야한다.


처리되지 못한 트라우마는 결국 스멀스멀 불안의 연기를 피워 올리면서, 작은 스트레스에도 쉽게 큰 불로 옮겨 붙어버리곤 한다. 고름이 살 속에 갇혀 빨갛게 부어오른 상처는 아무리 진통제를 먹고 소독약을 발라준다 해도 완치될 수 없다. 지금 당장 환자가 메스를 견디기 어려워한다면 잠시 환자를 다독여줄 여유가 필요할진 몰라도, 결국 그 고름을 절개해서 배출해내지 않고서는 완치를 기대하기 어려움과 마찬가지이다. 정신적 트라우마를 꺼내는 작업은 당시의 기억을 꺼내 생생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함이 아니다. 견디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트라우마를 끄집어냄은 오히려 그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다.


사진_위키피디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 지휘관이었던 한 퇴역 군인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집단발포 다음 날인 22일 동료 군인들이 사살한 시민군 3명을 교도소 인근 야산에 암매장했다”고 최근 증언했다. 현재 5.18 기념재단은 광주 옛 교도소 공동묘지에서 행방불명자 유해 발굴을 위한 조사에 착수해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수 많은 트라우마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역사는 트라우마를 철저히 야산에 묻고 암매장해왔다. 당장의 먹고 사는 문제, 당장의 대북 위기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며 Here&Now에 집중해 과거의 트라우마를 덮어왔다. 그러나 탄압과 비리의 역사는 결코 묻혀진 채 사라지지 않고 2017년의 현재까지도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우리나라가 과거의 트라우마를 벗어내기 위해 우리의 부끄러운 면면을 직시할만한 국가적 자아 강도가 아직 부족한지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1년 전 광화문광장과 서울시청을 가득 메운 촛불의 평화로운 힘으로 직접 부패 정권을 끌어내렸다. 지난 정권의 막을 내린 것은 헌법재판소의 의사봉이 아니었다. 우리 국민들이 직접 부패의 역사에 막을 내린 것이다. 지난 11월 22일 참여연대와 비영리 공공조사 네트워크 '공공의창', 우리리서치가 발표한 '촛불1년 즈음 국민 여론조사'에서도 최근의 적폐 청산에 대해서 '불법 행위에 대한 당연한 처벌이다'는 응답은 67.5%였고, '과거 정권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다'는 응답은 25.7%였다.


“나는 그 사건으로 인해 배운 것이 있다.”

“나는 그 사건으로 인해 더욱 성장했다.”


트라우마 기억의 재처리를 돕는 치료 중 하나인 EMDR에서는 외상 기억에 대한 긍정적인 인지를 제공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긍정적 인지가 바로 “나는 그 사건으로 인해 성장했다” 와 같은 문구이다. 설령 그 트라우마가 교통사고나 폭행 같은 일방적인 피해일 때에도 말이다. ‘받아들이기 힘든 끔찍한 일이 나에게 일어났었다’ 라는 사실은 분명 폭력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그 고통에 짓눌리기보다는, 그를 딛고 한차례 더 성장할 수 있게 되기를 -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해낼 수 있기를 겨냥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과거의 부끄러움이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음 깊이 애도할 때에야 진정으로 가능할 것이다.




참조 : 중앙일보, 업다운뉴스, 연합뉴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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