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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의학신문 Mar 08. 2018

안희정 성폭행 스캔들, 모순을 가두다 - 가려진 욕망


[정신의학신문 : 김환기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100년도 전에 간행된 소설이지만 이제는 뮤지컬로 더욱 유명해진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는 극단적으로 분리된 자아의 선악이 공존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인공 헨리 지킬 박사는 유능하고 자비로운 의사로 명망이 높은 훌륭한 인품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밤이 되면 자신이 만든 약물을 마시고, 내면의 '악'을 분리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자아 '하이드'로 변해 폭행과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낮에는 선망의 대상인 자애로운 의사로, 밤에는 끔찍한 악마로. 지킬과 하이드는 그렇게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진채 한몸 안에서 역설적인 동거를 어색하게 이어나간다.


KBS 방송화면


얼마 전 촉망받던 정치인 안희정 전(前)충남도지사의 성폭행 스캔들이 세간을 뒤흔들었다. 안 전지사의 정무비서로 근무했던 김지은씨는 안 전(前)지사가 8개월여 걸쳐 자신에게 성폭행, 성추행을 가했다고 지난 3월 5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폭로했다. 굵직한 정치인들 가운데서도 유독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의 이미지로 명망이 높아,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 중 하나로 꼽히고 있던 안희정 전지사였기에 그 충격은 더욱 강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더욱 국민들의 배신감을 불러온 것은 그의 경악스러울 정도로 이율배반적인 모습이었다. 안 전지사는 누구보다 권력형 성폭행을 타도하자는 입장을 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당 스캔들이 발표되기 불과 몇시간전, 뉴스원을 통해 "최근 확산되고 있는 미투운동은 남성 중심적 성차별의 문화를 극복하는 과정"이라며 "우리 사회를 보다 평화롭고 공정하게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정의와 여성인권을 부르짖음과 동시에 자신의 수행비서를 향한 악마적인 추행을 일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안 전지사의 성추행을 이야기한 김지은씨가 목소리를 내기로 결정한 이유 역시도, 미투 운동을 직접 자신에게 이야기하면서까지 성폭행을 멈추지 않았던 그의 이중적인 모습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비서에게 침묵을 강요하며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내던 그는 분명 하이드에 다름 없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는 한 사람이, 두 개의 완전히 서로 다른 인격으로 분리되어 한몸에 존재하는 '다중인격장애'의 모습을 차용하여 보여준다. 실제로 다중인격장애는 보다 정확히는 '해리성 정체성 장애'라 불리는 질환이다. 견디기 힘든 갈등으로 인해 자신의 인격이 여러개로 쪼개지게되는-‘해리’되는 질환이다. 이러한 환자들 같은 경우는 정말 지킬박사와 하이드와 똑같이 한 사람의 몸 안에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이 여러명 들어 앉아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때로는 각각의 인격에 따라 목소리와 말투, 자신의 이름이나 언어가 달라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뇌파 파형마저 변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날카롭고 모범적인 이미지의 존경 받는 젊은 정치인에서 성폭행 가해자로 양극단의 모습을 수없이 오간 안희정 전 지사 역시도, 두개의 서로 다른 인격이 공존한 다중인격장애를 앓고 있었던 것일까? 자신도 모르는 또다른 안희정B가 가끔씩 튀어나와 평소의 자신과는 다르게 비서를 건드리는 악행을 저질렀던 것일까? 하지만 아무래도 그의 모습을 다중인격장애의 그것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그는 어떻게 지킬과 하이드를 한 몸에 지닐 수 있었던 것일까.


위키미디어 공용


미국 최고의 호황기를 대표하는 대통령인 클린턴은 그 외교행정적 능력에 있어 현재까지도 꽤나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는 유능한 정치인이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의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다름 아닌 르윈스키 스캔들이다. 자신의 인턴이었던 르윈스키와의 불륜관계가 폭로되었던 그 스캔들은 그의 문란한 사생활을 여과 없이 만천하에 드러냈다.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된 그의 스캔들은 속칭 '지퍼게이트'라고 불릴만큼 외설적인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 게다가, 당시에는 단순한 불륜관계로 넘어갔었지만, 그 사건에 대해 당사자인 르윈스키는 현재, 그것이 분명 부적절한 권력 남용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러나 클린턴은 수많은 조롱과 비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대통령직을 이어나갔었고, 비교적 큰 탈 없이 연임한 2기 행정부를 마쳤다. 전세계를 이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최고의 권좌 미국 대통령. 그리고 집무실에서도 지퍼를 내렸다는 음란한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 이 어색한 두가지 역할 사이에서 클린턴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게 1인 2역을 잘 연기해냈다.


클린턴의 전기를 썼던 David Maraniss는 워싱턴포스트지에서 클린턴의 이러한 1인 2역이 그의 구획화(compartmentalization)하는 성격적 특징이라고 이야기했다. 아칸소 주의 작은 마을의 어려운 가정환경을 견뎌내며 힘겨운 현실을 극복해내기 위해 그는 자신의 여러 모순적인 모습들을 때때로 서로 다른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여기며 지내왔다는 것이다.


구획화(compartmentalization)라고 하는 방어기제는 자신의 내면에 공존하기 어려운 모순되는 특징들 사이에 구획, 벽을 세워 그들을 함께 유지시키는 행태이다. 앞서 이야기한 다중인격의 방어기제인 '해리'가 자기 내면의 서로 모순되는 마음들로 결국 스스로를 둘로 쪼개버리는 양상이라면, '구획화'는 격벽으로 나뉘어진 사무실처럼 억지로 그 둘을 한 공간에 묶어두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여성인권을 보호하고 권력에 의한 폭력을 막아야 한다는 가치관을 고수하는 강직한 마음을 가진 어떤 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정직하고 강건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는 때로는 자기 밑에서 일하는 여자 비서를 보며 성적으로 유혹하거나 범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이성과 본능적 충동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는 그 둘이 얼마든지 함께 발생할 수 있다. 누구나 조금씩은 선하고 조금씩은 악하다. 이런 경우 대부분 사람들은 이성이 충동을 억압하여 욕망을 자제할 것이고, 몇몇 일부 범죄자들은 충동이 이성을 압도하여 범죄를 저지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해리'를 하는 다중인격장애 환자라면 이런 경우 한없이 꼿꼿하고 청렴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자신도 조절할 수 없이 또 다른 사람이 튀어나와 흉포하게 비서를 겁탈하고 다시 곧 그 기억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일지 모른다. 반면, 이와 비슷한 듯 하지만 조금 다르게, '구획화'를 잘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인권운동을 하는 것은 '정치하는 나' 이고 비서와의 일은 '사생활의 나'라며 서로 다른 영역의 일이기 때문에 공존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할 것이다.


즉 '구획화'는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여러 모습들이 서로 해리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조금 더 발달한 형태의 방어기제, 어떻게 보면 또다른 형태의 '합리화'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긍정적으로 작동할 경우 구획화는 '공과 사가 분명한 사람'처럼 모범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구획화를 통해 공적인 일에서 냉혹하고 칼 같은 모습을 드러내다가도, 사적인 영역에서는 또 한없이 따뜻하고 공감적인 모습을 보이며 적절하게 상반된 두 가지 모습을 오갈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선악을 구획화하듯 약물로 분리하고자 했던 지킬박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자신도 모르게 강력해지는 하이드의 모습에 점차 압도되어 간다. 그리고 하이드의 악행도 점차 심해져 연쇄살인을 저지르기까지에 이르게 된다. 결국 지킬박사, 아니 하이드는 점차 괴기스러운 파멸로 치닫고만다.


픽사베이


어쩌면 우리 사회는 예전부터 권위와 위계에 의한 성적 착취나 희롱이라는 부끄러운 면면들을 알면서도 모른체, 구획화해왔는지 모른다. 여성인권 신장과 권위주의 사회로부터의 탈피를 계속 부르짖으면서도, 한편으로 개개인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권위적 압력들을 묵인해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들은 그 두 모순을 버젓이 등에 업고서도, ‘이건 이거고 저건 어쩔 수 없는 저거다’라는 구획 속에 스스로 합리화해왔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합리화된 치부는 점차 곪아갈 따름이다. 하이드의 악행이 걷잡을 수 없이 심해져 결국 지킬을 집어삼켰듯, 언제까지나 부정하고 싶은 스스로의 부끄러운 얼굴을 못 본체 할 수는 없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지만 모른체하고 있던 우리 사회의 하이드가, 이제 문화예술계를 넘어 정치계에서까지 구획화된 격벽을 넘어 그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그 충격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지금의 미투 물결이 그 구획과 합리화를 허물어내길 기대해볼 따름이다. 애써 외면해온 우리 스스로의 곪은 상처를 이제는 겸허히 직면하고, 기꺼이 도려낼 수 있는 성숙한 발걸음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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