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노트 34
지난 3년간의 상담 여정을 갈무리하며,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는 내담자들에게 어떤 일관된 지도를 건네왔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상담자의 언어로 기술한 '상담 목표'들을 비식별화하여 데이터화한 뒤, 생성형 AI Gemini를 통해 분석하고 다듬어보았습니다. 상담자 개인의 주관적 기억에만 의존하지 않고, 데이터 속에 흐르는 저만의 임상적 패턴과 정체성을 객관적으로 복기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추출된 저만의 치료적 나침반은 다음의 다섯 가지 선으로 수렴되었습니다.
1. 방대한 이야기 속에서 ‘핵심 에피소드’를 포착합니다
상담실에 오면 우리는 수많은 상황 설명과 타인의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기 쉽습니다. 저는 복잡한 사연들 사이에서 내담자의 마음이 흔들리는 '핵심 에피소드'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탐색해나갑니다. 삶의 맥락을 선명하게 짚어내어, 우리가 진짜 다뤄야 할 감정의 뿌리가 어디인지 명확히 하는 것이 제 작업의 시작입니다.
2. 모호한 고통을 ‘구체적인 정서’로 분화합니다
막연한 고통은 그 자체로 다루기 힘든 덩어리입니다. 저는 추상적인 이야기를 ‘지금 여기’에서의 신체 감각과 정서로 쪼개어 경험하게 돕습니다. 고통이 구체적인 장면과 감정으로 분화될 때, 그것은 비로소 우리가 이해하고 조절할 수 있는 '선명한 데이터'가 됩니다.
3. ‘타인’에게 쏠린 시선을 ‘나의 욕구’로 되돌립니다
"상대방이 문제예요"라는 외부의 목소리를 잠시 멈추게 합니다. 대신 그 상황 앞에서 분노하거나, 위축되거나, 혹은 차갑게 감정을 차단하는 등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내담자 본인의 '생존 방식'에 초점을 맞춥니다. 상황을 비평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그 이면에 숨겨진 자신의 취약한 감정과 진짜 욕구를 직면할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됩니다.
4. 반복되는 패턴의 ‘역동적 기원’을 파악합니다
왜 지금 그런 반응을 하게 될까요? 현재의 반복되는 부적응적 행동 이면에는 과거의 발달적 기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번번이 좌절하게 하거나 반복하게 하는 그 행동이 어떤 한 시절에는 유효했고 필요했던 생존 전략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에는 효과적이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익숙한 그 전략에만 의존하게 됩니다. 과거의 생존을 위한 경직된 전략이 어떻게 지금의 나에게 손해를 끼치기도 하는지 그 역동을 선명하게 연결해 봅니다. 이 과정을 통해 내담자는 자신에 대한 깊은 연민과 함께 과거로부터 분리될 용기를 얻습니다.
5. 통찰을 넘어 ‘이득이 되는 행동’을 선택합니다
이해는 변화의 시작이지만, 삶을 바꾸는 것은 주도적인 선택입니다. "알겠어요, 그런데 어쩌죠?"에서 멈추지 않고, 효과적이지 않은 당위(Should)를 견디면서 새로운 전략을 연습합니다. 조금 더 다양한 전략을 유연하게 쓸 수 있게 됩니다. 지금의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그것에 이르기 위해서 ‘이득’이 되는 새로운 행동은 없는지 알아갑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전략을 세우고 함께 연습하며 실제 삶에서 실험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마주한 현실 위에서 주도성을 회복합니다.
결국 "당신이 당신 삶의 주도성을 회복할 때까지"
저는 내담자가 가져오는 고통스러운 증상을 단순히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닌, 현재의 위치와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라고 생각합니다. 내담자가 상담실 문을 나설 때, 단순히 "위로받았다"는 느낌을 넘어 "이제 내가 나를 위해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지 알겠다"는 실마리를 얻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정리해본 지도를 어떤 이론적 지향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물어보았습니다.
임상적 지향점 요약: 역동적 통찰을 통합한 실용주의적 수용전념치료(ACT)
수용전념치료(ACT)를 메인 프레임으로 삼아 내담자가 마주한 현실 위에서 가치 있는 행동을 선택하도록 돕는 데 집중합니다. 그 과정에서 정서중심치료(EFT)적 기법으로 모호한 감정을 다룰 수 있는 데이터로 분화하고, 역동적 통찰을 통해 과거의 생존 전략이 현재의 삶을 어떻게 제약하는지 연결합니다. 즉, 과거의 상처를 보듬는 따뜻한 연민을 기반으로 하여, 현재 삶의 실질적인 이득을 향해 나아가는 매우 통합적이고 실용적인 치료 모델을 지향하고 계십니다.
대학원 시절에 CBT와 ACT를 이론적으로 배우고, 병원 수련 과정에서 CBT를 기반으로 한 기분장애 치료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2년 전에는 ACT 기반으로 집단상담 1회, 수퍼비전 2회, 수퍼비전 참관 4회를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ACT에 기반해있다고 정체화하지는 못했습니다. 최근 3년 동안, 다른 이론적 지향의 수퍼비전 경험이 더 많았고, 스스로는 대상관계, 애착이론, 대인과정 등을 포괄하는 현대 정신역동에 가깝다고 생각했거든요. 앞으로도 계속 고민하고 정체화해야할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