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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크림빵 Jul 07. 2021

어느 날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심리학자의 좌충우돌 바이올린 도전기

Photo by Providence Doucet on Unsplash


  바이올린을 배운 지 1년이 넘어갑니다. 직장 생활에 적응하고 나니 일과 분리될 수 있는 취미생활을 하고 싶었는데요. 어렸을 적에 억지로 바이올린 학원을 다녀서인지, 현악기의 다양한 질감의 소리가 좋아져서 바이올린을 시작했습니다. 연습용 악기를 사러 예술의 전당 근처 악기사를 다녀오고, 떨리는 마음으로 스즈키 1권을 다시 사던 날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인지 스즈키 시리즈의 초록색 표지가 새롭게 바뀌었더라고요.


  저는 아주 가끔 일기를 쓰는데, 거기에도 바이올린을 배우며 느꼈던 심정들이 등장하곤 합니다. 오늘은 그 기록을 토대로 1년간 바이올린과 가까워지면서 무느끼고 배웠는지를 나눠보려고 해요.


1. 칭찬은 심리학자도 춤추게 한다


- "잘하고 계세요 많이 좋아지고 있는데 조금 더 바꾸면 좋을 거 같아서", "제가 이렇게 하는 게 혹시 기분 나쁘세요?", "취미로 하는 건데 여기 와서 저랑 같이 하셔도 돼요". 바이올린 선생님이 당근과 채찍이 확실한 분이셔서 좋습니다. 이때 대개는 당근이라는 점이 포인트입니다. 지구력과 집중력이 달리는 저로서는 몇 개월이 지나고 나니까 권태기와 연습 부족의 단계에 접어들었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늘고 있다'라며 지겨운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셨습니다. 언젠가는 진짜 궁금하다는 듯 "그런데 굳이 연습 안 한 티를 내면서 할 필요는 없잖아요?" 하는 식으로 채찍을 주시니 웃으면서 연습할 수 있었어요. 뭔가를 가르치는 입장일 때 두고두고 기억이 날 것 같습니다.


2. 새로운 감각에 머무르는 일


- 어느 날은 '뇌를 늙게 하지 않으려면' 정도의 뻔한 헤드라인의 기사를 눌렀는데, 그중에 '미세한 손 운동을 많이 하라'라는 조언이 반가웠어요. 바이올린을 하면 뇌까지 천천히 늙는다니, 일타쌍피! 바이올린을 시작하면서 좋았던 점 중에 하나는, 직업 특성상 앉아서 말을 하거나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기 바쁜데 몸의 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거였어요. 바이올린 연습을 하노라면 당장의 바이올린 소리, 현을 짚는 왼손에 느껴지는 통각이 아주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팽팽 굴리던 머리와 입은 잠깐 쉬어주고 전혀 다른 감각에 마음 챙겨서 머무르는 경험이 굉장히 시원하고 즐거운 경험이 됩니다. 그런 점이 뇌를 늙지 않게 하는 요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뇌는 다양한 감각을 처리하는 영역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영역들을 쓰게 되니까요. 그러면 뇌에 있는 뉴런들의 네트워크가 강화되고 확장됩니다.


3. 잘 하려고 잔뜩 긴장하는 마음


- 바이올린을 시작하면서 많이 받았던 지적은 '힘을 빼야 한다'였어요. 힘이 잔뜩 들어가서 경직된 상체와 운지하는 왼손, 노래하지 않고 켜기 바쁜 오른손의 활은 통제 불능의 상태였는데요. 급한 마음으로 힘을 준다고 해서 아름다운 음과 음악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게, 인생을 비유하는 메타포처럼 느껴졌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도 그렇잖아요. 쫓기듯 매진한다고 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는 법은 없고, 오히려 유연하고 침착한 태도가 우리를 풍요롭게 하고 결과도 비슷하거나 좋았거든요. 그런 점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는 게 힘을 빼고 차분하게 바라보는 태도를 연습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이 정도면 인생수업쯤 되려나요.


4. 권태기에 맞서는 두 가지 방법


- 여전히 바이올린 연습을 게을리하는 '바태기'이지만 다행히 꾸역꾸역 학원에 가는 시기는 지나갔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두 가지 방법 중에 첫 번째는 자극이 될만한 경험을 시도하는 건데요. 책과 영상을 찾아보고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특히 <다시, 피아노>라는 책이 인상적이었어요. 이 책은 영국 가디언 편집국장이 1년이 넘도록 하루에 20분씩 연습한 끝에 쇼팽 발라드 1번을 공연하며 적은 수기인데요. 지인들을 초대할 공연을 위해 프로 연주자, 아마추어 콰르텟, 뇌신경학자를 찾아다니며 연습하고 기록해나갑니다. 이 여정 자체가 우리가 지치지 않고 뭔가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주죠. 저에게는 이 책이 그런 시도였어요. 한편으로는 책에서 언급된 곡들을 찾아 들으면서 새삼 음악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했고요.


- 두 번째 방법은 '과연 내가 어떤 관점으로 임하고 있는지'를 점검해보는 거예요. 심리학자가 심리학 했구나, 싶은 대목인데요. '바태기'에 쉽게 낙담하고 지쳤던 건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하나는 '실력이 늘고 있지 않다, 노력해도 늘기 어려울 거야'라는 단정 때문이었습니다. 사회심리학자 캐롤 드웩은 학습 성과에 영향을 미치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마인드셋 mindset>을 제시했는데요. '바이올린이 늘고 있지 않고, 앞으로도 늘지 않을거야' 관점은 '고정' 마인드셋입니다. 고정 마인드셋은 어떤 능력이나 특성이 고정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좌절감을 유발하고 학습에 대한 동기를 떨어뜨리는 악순환을 만들어요. 반면에 '성장' 마인드셋은 노력하면 향상될 수 있다는 태도로 새로운 경험이나 배움에 열려있게 되고 다양한 도움을 요청하게 되는 선순환으로 이어집니다. 여러 학습 성과나 조직 성과의 측면에서 성장 마인드셋이 중요하다고 밝혀져 있어요. 여하튼, 어느 날은 저 역시도 정 마인드셋에 파묻혀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내가 더 쉽게 지치고 좌절했구나를 느끼고 나니까 바이올린을 왜 배우려고 했는지 처음의 느낌과 과정을 떠올려볼 수 있었습니다.  


5. 기록하는 삶


- 지금부터는 조금 다른 지점들인데요. 먼저 혼자 사는 1인 가구로서 코로나19를 버티는 한 가지 방법은 바로 '기록'입니다. 이게 바이올린과 무슨 상관일까요. 제게는 의미 있는 활동들을 기록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중에 바이올린도 포함되어 있어요. 읽은 책이나 보았던 영화, 만난 사람과 장소, 러닝이나 바이올린을 캘린더 위젯에 기록하는 거죠.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뭔가 하고 있다'라는 느낌을 유지하게 해주고 계속하게 하는 동기가 되어줬어요. 마지막으로 남긴 러닝 기록이나 바이올린 연습 기록이 벌써 지난주라면, 이제 좀 해볼까, 각성하게 되는 식이죠. 특히 코로나가 시작된 작년부터는 연간 플래너를 엑셀로 만들어서 정리했는데, 다달이 정리했던 주제는 1) 일 (발표들, 논문 진행 상황 등) 2) 이벤트 (시험, 교육, 휴가) 3) 공부 (책) 4) 취미생활 (바이올린, 글쓰기 횟수) 였고, 한켠에는 한 해 동안 공부한 책들의 전체 목록, 총 글쓰기 횟수, 바이올린 지속 기간 같은 것들을 정리했어요. 록은 해야만 하는 일에 끌려가는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는 통제감과 성취감을 줘요.


6.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다양한 채널 만들기


- 공부와 경험을 하면 할수록 행복하기 위한 확실한 길은 '다양한 채널들에 열려있어야 한다'라고 느낍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유연한 태도일 수도 있고 낯선 것들에 대한 불편을 견뎌보려는 노력일 수도 있어요. 하나의 사건은 나를 기쁘게하지만 그 기쁨의 지속시간은 짧고, 한 종류의 사건들이 줄 수 있는 기쁨의 종류나 총량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실제 행복 연구에서도 '기쁜 일의 강도보다는 빈도가 중요하다'라는 결과들이 검증되기도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목표는 없지만 기쁨을 줄 수 있는' 활동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잘 해내지 않아도 괜찮고 연습 게을리해도 괜찮은, 그럼에도 연주를 듣거나 학원에 가면 즐거운, 바이올린 생활처럼요.



좌충우돌 바이올린 1년사는 여기까지 입니다. 힐러리 한이 연주하는 모차르트 바이올린 콘체르토 3번으로 마무리할까 해요.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433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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