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의 '그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사람을 뜻하는 말은 많다. 많다는 건, 그만큼 ‘사람’이 한 가지로 정의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먼저 ‘사람’. 순우리말로 ‘살다’의 어간에서 출발한 말이라 한다. 살아 있는 존재, 사는 것 자체를 뜻한다. 사전적 정의로는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이다.
한자어로는 ‘인간(人間)’. 사람 ‘인(人)’에 사이 ‘간(間)’을 쓴다. 그러니까 인간은 태생부터 ‘사이’에 사는 존재,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서양에서는 human. 그 어원은 라틴어 humanus 이며, humus(흙)에서 왔다고 한다.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유래로 종교적 의미도 지니면서 꽤나 철학적이다. 어쩌면 기계나 AI의 반대측면의 인간을 지칭할때 human을 쓰는 것은 유한한 개념의 인간을 뜻할때 쓰인다는 것이 납득이 간다. 또 어떤 때는 '호모 사피엔스' 처럼 영장류의 하나로 생물학적 맥락으로 사람을 표현하기도 한다.
결국, 사람을 기술하는 언어는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심리학도 마찬가지다. 심리학에서는 개인(person)을 주로 쓰는데, 이는 어떤 고유한 사고, 감정, 경험을 지닌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사람을 뜻한다. 흥미로운 건, 이론이 가진 인간관에 따라 사람을 부르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정신역동 문헌에서는 인간을 ‘대상(object)’으로 칭한다. 연구 대상, 권위 대상, 애착 대상 등. 관찰 가능한 ‘객관적 대상’으로서 인간이다. 이 관점에서는 “왜 저 대상이 저런 어려움을 겪는가, 어떤 경험이 있었는가”가 주요 관심사가 된다. 반대로 인본주의에서는 인간을 ‘being(존재)’이라는 용어를 쓴다.
Be-ing, ‘되어 가는 존재'. 그 말 자체가 따뜻하고 다정하다. 코칭이 특히 이 관점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피코치를 ‘대상’이 아니라 성장 가능성과 주체성을 지닌 존재 로 대하는 것—코칭의 철학은 여기서 출발하고, 대다수의 코치들이 여기서 매력을 느끼는 지점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를 들고 싶다. 메리 셀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최근 기예르모 델토르 감독이 영화로 제작한 것이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되었다. 소설을 읽었을 때의 전율과, 심오한 메시지가 영상화되니 더 강렬하고, 몰입되었다. (아 잠시만, 많은 사람들이 “프랑켄슈타인”이라고 하면 얼굴에 큰 상처, 머리의 대못(?)이 박힌 괴물을 떠올리지만—놀랍게도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 아니라 창조자,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이름이다. 괴물은 이름이 없다. 작품 속에서 그는 ‘it(그것)’ 또는 ‘monster(괴물)’로 불린다. 이름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대상화’가 시작된 셈이다.)
빅터는 시체의 뼈와 장기와 피부를 기워내고, 피를 부어 ‘그것’을 만든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전형이다. '그것'을 창조해낸 빅터에게 동생이 물었다.
그것의 뼈와 장기를 모아 만들 때, 영혼은 어디에 있는 거야?
빅터는 대답하지 못한다. 하지만 정말 ‘그것’에게 영혼이 없었을까. 태어나자마자 빅터를 따랐고, 버림받으며 분노와 좌절을 느꼈다. 감정이 있다는 건, 최소한 ‘무엇’이 아니라 ‘누군가’라는 증거가 아니었을까?
작품에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은 (적어도 뚜렷하게) 두 명이다. 놀라워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연민을 보인 엘리자베스, 그리고 눈먼 노인. 노인은 말한다.
“네가 뭔지는 내가 알지. 넌 좋은 사람이야.”
프랑켄슈타인은 애초 인간의 영혼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생물학적 유기체로서의 인간의 틀을 향한 집착, 그래서 자신의 오만한 생각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뿐이었다. 괴물로부터 도망치는 꼴이 무책임한 부모의 모습 같아서 '니가 괴물이지, 누가 괴물이니' 싶기도 하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와 눈먼 노인은 '그것'을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보고자 하는 인물들이다. 사랑과 동정심, 존중과 같은 감정을 지닌 보편적인 가치를 가진 '존재'로 바라본다. 신생아 같던 '그것'이 그 두 사람에게 흔들렸던 이유는 원치도 않은 저주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자신이 처음으로 '받아들여졌던' 순간을 경험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코치로서, 그리고 로저스의 인본주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누구도 ‘대상화’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런데 ‘객관적 관찰’이라는 이름 아래, 나도 모르게 차이를 강조할 때가 있다. 차이가 강조되는 순간 우리는 경계하고, 결국 피하게 된다. 누군가를 대상화하는 일이 이 시대를 잠식하는 ‘혐오’의 씨앗이 될 수 있기에, 나는 being의 관점을 계속 되새기고, 반복하고, 때로는 반성한다. 솔직히 말하면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사람을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 순간도 있었다. 그런데 그 시선의 화살은 결국 나에게 되돌아와, 뜻밖에도 self에 대한 연민을 낳기도 했다.(누가 날 좀 바라봐줘! 내 마음을 알아줘!) 그리고 누군가가 내 이야기와 감정을 진심으로 알아주었던 경험을 통해, ‘being’의 관점이 얼마나 소중한지 여러 번 깨달았다.
“저 사람은 누구지? 왜 저렇게 말하고 행동하지?”
이 질문은 사람을 ‘object’로 보는 렌즈에 가깝다.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코치라면, 여기에서 멈출 순 없다. 그래서 질문을 바꾼다.
“그 사람이 누구든,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지금 어떤 존재로 되어가는 중인가?”
“어떤 가능성을 가진 사람인가?”
‘object’에서 ‘being’으로. 그 이동은 거창한 선언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아주 사소한 전환에서 시작된다.
스스로에게 묻자. 어떤 질문에 내 마음이 열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