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odam Dec 05. 2022

쇼팽은 왜 죽을 때 자신의 심장만 폴란드로 보냈을까?

꿈을 보듯, 울음을 듣듯, 쇼팽의 음악


날씨가 쌀쌀해지면 생각나는 피아니스트가 있다. 

바로 폴란드의 음악가 '프레데리크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1849)이다.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는 쇼팽은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의 음악가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는 폴란드 사람이다. 오늘은 폴란드가 품기에는 그 능력과 재능이 너무도 컸던 쇼팽의 음악세계와 인생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쇼팽의 초상화 (Portrait de Chopin, 1838년), 외젠 들라크루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쇼팽의 절친으로 알려진 들라크루아가 그린 쇼팽의 초상화이다.

폴란드 어머니와 프랑스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쇼팽은 자신의 조국 폴란드를 너무도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태어나서 활동했을 당시의 폴란드는 정치적으로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침략으로 늘 불안한 시절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나중에는 가난해진 집안 사정으로 좀 더 큰 나라인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게 된 쇼팽은  아버지의 나라 프랑스에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돈도 벌게 된다. 





당시 프랑스에는 상류층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진 '살롱문화'가 인기였는데 

170cm, 45kg의 왜소한 체격의 쇼팽에게는 대형 연주회장에서 연주하는 것보다 

이런 작은 소규모 살롱에서 피아노곡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의 피아노 기법은 베토벤처럼 꾹꾹 눌러 힘차게 연주하는 기법이 아니라 가볍게 연주하는 것이 특징인 루바토 기법(rubato)을 사용하여 연주하곤 했는데 루바토 기법은 표현적인 목적을 위해서 반주의 리듬은 엄격하게 지키는 반면 선율의 리듬에서 약간의 융통성을 허용하는 미묘한 기법을 말한다. 쉽게 말해 정박자로 딱딱 맞혀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게 아니라 엇박자로 검은건반과 흰건반을 서로 밀당하듯 밀고 땅기며 가볍게 연주하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에서 쇼팽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아무래도 '조성진'일 것이다.

그는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사람으로서 이젠 세계적으로 너무 유명해진 피아니스트이다.

그의 연주를 들어보면 루바토 기법을 사용해서 밀당하듯 아름답게, 마치 시를 읊조리듯 음률에 맞혀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쇼팽의 곡을 들으면 마치 우리나라의 판소리(?)를 듣듯 뭔가 밀고 당기는 맛이 있고 한이 표현된 듯해서 판소리처럼 구성지진 않지만 폴란드 사람들의 한 (실제로 그들은 이런 한(恨)을 '잘(zal)'이라 불렀다고 한다)을 잘 표현한 것 같다.

폴란드도 우리나라처럼 외세에 침략에 힘입어 결국은 나라가 없어지는 비극을 겪고 만다.

전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작고 건강하지 못한 몸이지만 나라를 위해 싸우길 원하지만 국가와 가족이 이를 막는다. 결국 프랑스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귀족층들을 대상으로 레슨을 하면서 죽는 순간까지 사랑하는 조국으로 가지 못하지만 가슴 한편에는 늘 자신의 조국 폴란드를 향한 그리움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잊지 못하고 살게 된다.


쇼팽의 연인 '조르주 상드'의 초상화



이렇게 외롭고 힘든 쇼팽에게도 사랑이 찾아온다.

당시 여류 소설가로서 쇼팽보다 상당히 유명했던 '조르주 상드' 였는데 그녀는 이미 남편과 두 아이가 있던 유부녀였으며 쇼팽보다 6살이나 연상이었다. 소심하고 조용했던 쇼팽은 그녀의 적극적인 성격과는 반대였지만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되고 거의 10년을 함께 살게 된다.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살던 쇼팽은 상드와의 생활을 통해 심신의 안정을 찾게 되고 

그 시절 명곡들이 많이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10년 이상을 가지 못하게 되는데 ㅠㅠ

워낙 건강이 좋지 못했던 쇼팽은 늘 예민한 편이었고 조르주 상드의 딸 문제로 인해 둘은 결국 파경을 맞게 된다. 심지어  조르주 상드는 훗날 쇼팽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들의 10년간의 사랑이 야속한 따름이다.

쇼팽은 자신의 일생 동안 바흐와 모차르트를 가장 존경하며 추종했다. 

세계 음악 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인 바흐와 모차르트가 작곡한 곡의 치밀함과 완성도처럼 

쇼팽의 곡도 구조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한 음이라도 틀릴 시 틀렸다는 티가 바로 난다. 

바흐의 아주 완벽한 음악 체계를 자신의 음악으로 끌고 와서 새로운 피아노 테크닉을 만들어냈는데 오죽하면 자신의 제자들에게 “손가락 연습을 하려면 바흐의 곡을 통해 테크닉을 기르라”라고 말했을 정도다. 

모차르트의 영향력도 이에 못지않은데,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에 나오는 아리아 '내게 손을 주렴(La ci darem la mano)'이라는 곡을 자신이 피아노 변주곡(Variations)으로 새롭게 작곡했다. 모차르트의 완벽하고 천재적인 음악성은 쇼팽의 피아노 창작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유명한 쇼팽의 어록 중 하나가 “모차르트는 음악 창작에 있어 전 영역을 아우르지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내 부족한 머리로 이 (피아노) 건반에 손을 대는 것일 뿐이다.”이다. 

또한, 자신의 장례식에 반드시 단 하나의 곡만을 꼭 연주해달라고 지인들에게 사실상 유언인 부탁을 했는데 그 곡이 바로 모차르트의 '레퀴엠'이다. 쇼팽이 죽고 나서 약 3,000여 명이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그 가운데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되었다. 그만큼 쇼팽은 음악 창작과 자신의 일생에 있어 바흐와 모차르트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

쇼팽은 조르주 상드와 헤어진 후 홀로 생활하면서 급격히 건강이 나빠져 침대에서 화장실까지 가는 것도 힘들어졌다고 한다. 누군가 업어주지 않으면 2층으로 올라가지도 못했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면도와 옷매무새만큼은 단정히 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그는 죽기 직전에 자신의 첼로 소나타 도입부를 연주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를 채 다 듣기도 전에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연주를 중단시켰다. 이후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두려워하던 것과 똑같이 살아 있는 채로 묻히는 것을 막아달라는 메모를 남겼으며 자정 즈음 몸이 어떠냐는 의사의 질문에 "이제는 안 아파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어머니... 나의 어머니..."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예술가들의 마지막을 읽다 보면 나도 한 번쯤 나의 언젠가가 될지 모르는 그 '마지막 순간'이 상상되곤 한다. 나의 마지막 순간은 과연 어떨까? 다른 건 내 의지대로 내 희망대로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내가 사랑했던 음악을 들으며 편안하게 눈 감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다. 왜냐면 사람이 죽을 때 유일하게 '청각'은 사후 1시간 반까지는 남아 있다고 하니 말이다. 

쇼팽의 소망대로 지인들은 쇼팽의 장례식 때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연주하려 했지만 쇼팽의 장례식이 치러질 예정이었던 성 마들렌 성당에서 여자 가수가 성당 안에서 연주할 수 없다고 반대하는 바람에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되었다. 

다행히 쇼팽의 간절한 마지막 소원이라는 지인들의 적극적인 설득 끝에 2주 만에 성당 측이 이를 양보하였고  그렇게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되는 가운데 쇼팽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쇼팽의 묘에는 그가 폴란드를 떠나기 전 은잔에 담아온 폴란드의 흙이 뿌려졌고 이후에 쇼팽의 심장은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누이에게 인도되어 나중에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었다.

얼마나 고향이 그립고 얼마나 가족들이 보고 싶었으면 자신의 심장을 폴란드로 보냈을까?

그의 가슴 절절한 마지막 순간과 조국에 대한 사랑, 그리고 끝까지 듣고 싶었던 그의 위대한 멘토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쇼팽의 곡들을 들을 때마다  하나하나 느껴져서 전율이 느껴질 때가 있다.


사실 이런 감정들은 비단 쇼팽만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우리도 일본의 통치하에 나라를 뺏겨 본 경험이 있던 민족이고 멀리 갈 것도 없이 폴란드와 똑같이 몇십 년이 지난 현재 우크라이나도 러시아에게 폴란드와 같은 상황이 발생되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에 뉴스에서 본 한 영상 속 여성은 러시아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집안에서 쇼팽의 피아노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폭격으로 쇼팽의 조국 폴란드가 없어졌듯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러시아의 폭격으로 우크라이나가 피해를 보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도  쇼팽의 연주를 통해 쇼팽의 마음을 느끼고 음악의 힘으로 포성이 잦아들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음악의 힘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폭력과 저항, 강제와 탄압 속에서 한 줄기 빛처럼 사람의 마음으로 녹일 수 있는 

보이지 않는 포성과 같은 강력한 존재로서 말이다.

쇼팽의 심장도 그런 의미에서 조국 폴란드로 향하지 않았을까 싶다.

죽어서 비록 육체는 제2의 고향인 프랑스 파리에 묻히지만 조국을 향한 

그의 마음만은 , 그의 영혼만은 폴란드에 있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작가의 이전글 예술가들의 아지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