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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의 일기장 Jan 20. 2018

[에세이] 세상의 모든 긍정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내게 남겨주신 유일한 자산

 수능의 첫맛은 썼다.

 이십여 년 전 봄. 고등학교 3학년이 돼 첫 수능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아 들고 집에 가기 위해 탄 버스에는 평소와 달리 웃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서로 손을 잡고 도란도란 얘기 나누는 여학생들부터, 창 밖을 내다보며 알듯 모를 듯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아저씨까지.

 '저 사람들은 뭐가 저리도 행복할까.'

 수직으로 낙하한 전국 등수를 보고 있자니, 내 인생도 어찌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부모님 사인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그날 저녁 퇴근한 아버지께 성적표를 보여드렸다. 성적표에는 담임 선생님이 부모님께 보내는 글이 적혀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나쁜 성적을 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살펴봐 주십시오.'

 아버지는 성적표를 한번, 그리고 내 눈을 한번 쳐다보셨다. 

 "네 방에 가 있어라."

 1분도 안 되는 시간이 1시간이 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 부르셔서 안방에 가니 아버지는 반으로 접은 성적표를 돌려주셨다. 내 방으로 돌아와 떨리는 마음에 열어본 성적표에는 아버지가 붓펜으로 쓰신 멋진 한자 필체가 쓰여 있었다.

 '一喜一悲 輕率之事(일희일비 경솔지사, 일희일비하는 것은 경솔한 일이다).'

 1년 뒤, 대학에 들어간 나는 아버지께 그때 일을 다시 물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쁜 일이 있으면, 그걸 계기로 좋은 일이 오도록 노력하면 되니 걱정할 게 뭐가 있겠냐."


 대학 입학은,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효도가 됐다. 

 대학 1학년 겨울방학,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한 달 있다가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처음으로 비디오를 빌려 본 영화가 '포레스트 검프'였다.

 검프(톰 행크스 분)가 벤치에 앉아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며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Life was like a box of chocolates. You never know what you're gonna get(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서 열어보기 전까지 무엇을 집을지 알 수 없어요)."라고 말하던 바로 그 유명한 장면. 내 머릿속에 갑자기 '일희일비 경솔지사'란 여덟 글자가 떠올랐다. 다소 지능이 떨어지는 검프가 그냥 자신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늘 긍정의 자세로 이겨냈다는 점.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주신 삶의 교훈이 바로 이게 아니었을까.

 재작년에 영화 '마션'을 봤을 때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화성에 홀로 남겨진 식물학자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는 자기 똥을 양분 삼아 감자를 길러내는 등 가진 지식을 총동원해 화성에서 고군분투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살아 돌아갈 확률이 거의 제로인 상황. 하지만 그는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나는 화성에서 제일가는 식물학자." "나는 매일 화성의 멋진 지평선을 감상한다." "내가 지금부터 화성에서 하는 모든 행동은 사상 최초."라는 거의 미친놈 같은 긍정의 주문을 왼다. 그리고 그는 결국 살아서 집으로 돌아간다. 절대 긍정이 그의 목숨을 살린 셈이다.


 프로야구 한화이글스 팬을 볼 때마다 존경심이 든다.

 변화무쌍 다혈질인 내 친구 J는 한화이글스 경기가 있을 때마다 찾아가는 광팬이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그는 야구장에서 체험한 야릇한(?) 감정을 얘기해줬다. 

 2011년 한화의 대표 응원가 "나는 행복합니다. '이글스'라서 행복합니다."가 처음 나왔을 당시. 이글스의 패색이 짙을 때 이 노래를 들으면 그는 무척 화가 났다고 한다.

 '쌍욕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뭐가 그리 행복하단 말이냐.'

 옆에서 노래를 불러도 팔짱을 낀 채 가만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기장에 갈 때마다 듣다 보니 어느 날 자기도 모르게 따라 부르게 됐고, 자주 부르다 보니 스스로 '보살'이 되는 느낌이 들었단다(야구 문외한을 위해 설명하자면, 한화이글스가 너무나 자주 패배함에도 불구하고 한화 팬들이 한결같이 응원한다 해서 다른 팀 팬들이 한화 팬들을 보살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실제 이 노래가 울려 퍼지면 다른 한화 팬들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팬심을 종교로까지 승화시킨(?) 초긍정의 마인드라 할까.

 사실 J의 경험은 의학적으로도 어느 정도 입증이 됐다.

 즐거운 감정을 웃음이나 노래 등으로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감정을 조절하는 뇌 전두엽을 자극한다. 이때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이 많이 분비돼 행복한 감정이 더 커진다. '행복하다'라고 말할수록 행복 감정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이 많이 나온다는 말이다. 행복하다고 말하면 실제 행복해질 수 있는 셈이다. 세계적인 명상 수행가 팃낙한 스님이 "즐거워서 웃는 때가 있지만, 웃기 때문에 즐거워지는 때도 있다"라고 말한 것의 과학 실사판이다.

 하루하루 비슷한 삶을 사는 게 지겹다고 느껴질 때마다, 무조건 한바탕 웃음부터 지어보고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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