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866 두 우주의 충돌

꽃밭의 끝, 충돌의 시작

by 정신과의사 감성돔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80년대를 강타한 이 표어 탓인지

우리 집도, 그리고 주위의 친구들 집도 모두 자녀는 두 명이었다. 형제든 남매든 자매든 대부분이 두 명이었다. 그래서인지 결혼하면 4인 가족을 이루는 것이 당연한 수순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마치 교과서인 것처럼.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와 내 남동생, 아들을 둘 낳으신 우리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압박에서도 자유로우셨다. 그리고 임신과 출산도 큰 문제없이 건강하게 이겨내셨다. 어쩌면 우리 가족은 별다른 고난을 겪어본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네 가족이 하하호호 하며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아름다운 이야기처럼.


그렇다.

내 머릿속은 꽃밭이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서로에게 끌렸고 자연스레 그다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혼과 이후의 미래를 계획하며

우리는 부딪히기 시작했다.


나의 세계에서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던 것들이 아내의 세계에서는 당연하지 않았다.

결혼은 각자의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의 만남.

거대하고도 서로 다른 두 우주의 충돌이다.


아내가 살아온 세상은 내가 바라보는 세상과 사뭇 달랐다.

서로 좋아하긴 했지만, 아내는 결혼이라는 환경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아내의 세상에서 ‘시댁’이라는 존재는 끔찍한 고통을 야기하는 곳이었다.

어머니가 겪어온 시집살이의 고통이

자신에게도 반복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 속에 결혼을 주저했다.

그녀의 불안은 결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출산과 육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내의 어머니는 동생들을 출산하는 과정에서 건강문제가 많았다. 태반의 위치가 위험한 ‘전치태반’으로 인해 장기간 입원을 하며 수혈도 받아야 했다. 아내가 겪은 출산이라는 이벤트는 어머니의 부재, 산모가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 그 자체였다. 남아선호사상이 지배적이던 환경, 안타깝게도 그 불안은 남동생이 생길 때까지 반복돼야만 했다.


출산 후에도 그녀는 육아가 두렵다고 했다.

어머니가 되는 것이 싫다고 했다.

아이도 좋아할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걱정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녀의 불안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형성되어 온 것이었다.

당연히 공감되고 이해는 갔다.

하지만 한편으론 숨이 막혔다.

나는 진료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생을 함께할 상대와 결혼을 계획하는 중이었다.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의 갈등은 깊어져 갔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꽤 끈질기게 대화했고 서로 간의 간극을 점점 좁혀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걱정 리스트를 종이에 모두 적어온 아내. 그녀가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는 모든 불안 거리가 빽빽이 적혀있었다. 그 밑부분에 '모두 괜찮고 나만 믿으라'는 말을 적었다. 우리는 각자 이름을 쓰고 서명을 했다. 그리고 웃으며 악수했다. 마치 정상회담에 참여한 대표자들처럼.


파스쿠치 카페에서 이루어진 그 약속을

우리는 농담처럼 '파스쿠치 협약'이라고 불렀다.

그때만 해도 나는 육아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다. 육아, 발달 이론이라면 '책으로 배워' 알고 있었다. 내겐 프로이트, 멜라니 클라인, 마가렛 말러, 위니코트가 있었다. 그리고 내 아이라면 더 귀여울 것 아닌가.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다. 아내에게 ’임신, 출산은 내가 할 수 없지만, 그 뒤에는 내가 다 할게.’라며 호언장담을 했다.


진심이었다.

'그래도 내가 정신과 의사인데, 평균이상은 하지 않을까?'


그때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