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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나 May 09. 2019

ASMR, 자극을 큐레이션 하다

귀 파는 소리의 영상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에 관하여

책 넘기는 소리,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 심지어 귀 파는 소리의 영상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특이한 사람들이라고 치부하기 그 숫자가 너무나도 많다. 당신도 막상 이 영상을 보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우리는 왜 일상 속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이러한 소리 들을 유튜브에서 일부러 찾아보며 그때의 느낌을 느끼려 하는 것일까?




백팀 선수들이 서로 농구공을 몇 번 패스했는지 세어보자



고릴라요?

백팀 3명과 청팀 3명이 서로 같은 편에게 농구공을 패스하는 영상이 나온다. 실험 참가자는 백팀 선수들이 서로 농구공을 몇 번 패스했는지 세면 된다. 참가자는 열심히 백팀 선수들의 패스 횟수를 세기 시작한다. 

1분이 조금 지났을 때, 갑자기 영상에 고릴라가 등장했다! 고릴라는 카메라 정면을 쳐다보고 우가우가 가슴을 두드린 뒤 다시 퇴장했다. 누가 봐도 어색한 고릴라의 등장에도 백팀과 청팀 선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농구공을 계속 패스한다. 몇 번 더 농구공을 패스하더니 이내 영상이 종료되었다. 

 실험 진행자가 참가자에게 백팀의 농구공 패스 횟수를 묻는다. 참가자 대부분이 정답을 외쳤다. 한 가지 질문 더. 혹시 중간에 고릴라를 보았냐고 물어본다. 

충격적인 사실. 실험 참가자의 50%가 고릴라의 등장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우리의 뇌는 모든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어떻게 고릴라를 못 볼 수가 있냐고? 직접 실험을 해보고 싶은 독자라면 인터넷에 ‘보이지 않는 고릴라’를 검색해 영상을 보기 바란다. 다만, 여기까지 읽어내려 온 이상 이미 영상 중간에 고릴라가 등장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 아쉽지만 지인에게 시도해 보기 바란다.

참가자의 50%가 고릴라를 인식하지 못한 이유. 우리의 뇌가 모든 자극을 인식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자극만 골라내 인식하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를 심리학 용어로 ‘선택적 주의(Selective attention)’라 한다. 필요한 자극에만 주의를 기울여 인지 처리의 효율을 높이겠다는 뇌의 전략이다. 참가자가 고릴라를 보지 못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참가자들의 뇌가 농구공 패스에 집중한 나머지 고릴라를 무시해버린 것이다. 시각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청각도 중요한 자극만 골라 주의를 기울인다. 사람이 많아 시끄러운 파티장에서도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면 뒤돌아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실험 상황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선택적 주의 현상은 흔히 일어난다. 운전 중 내비게이션 목소리에 집중하느라 보조석에 앉은 친구가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들리지 않고, 심지어 옆 차를 신경 쓰느라 따라오던 자전거를 보지 못해 사고가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보고있는 것만 본다.



감각 과잉의 시대

이 감각적인 시대는 또 얼마나 많은 자극을 내뿜는가.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밤의 어두움을 물리칠 정도로 현란한 네온사인과 매장마다 크게 틀어놓은 음악 소리가 머릿속으로 강제 진입하고, 샘플이라며 뿌려주는 진한 향수 냄새가 코를 아찔하게 한다. 집에 가도 자극은 쉴새 없이 몰려든다. TV 속 예능은 일부러 웃음소리를 넣어 웃기지도 않은 소리를 듣게 하고, 자극적인 영상과 자막으로 우리의 눈을 현혹한다. 그 와중에 윗집은 꼭 밤에 세탁기를 돌려 내 귓가에 방망이질을 해댄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양한 자극이 대량 생산되어 눈, 코, 입, 귀, 피부로 떠밀려온다. 

함정은 이처럼 강렬한 자극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다 보면 점점 더 자극적인 감각을 찾게 된다는 점이다. 인간의 뇌는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자극에 무뎌져 좀 더 자극적인 감각에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많은 자극 속에 우리의 뇌는 ‘팝콘 브레인’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의 뇌에 강렬한 자극이 지속적으로 가해져 결국 단순하고 평범한 일상 생활에 흥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더이상 잔잔하고 미묘한 자극들은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수많은 강렬한 자극 속에 우리의 뇌 또한 점점 지쳐가고 있다.



뇌가 무심코 놓친 자극을 다시 골라드려요, ASMR

우리의 뇌는 모든 자극을 보고 듣는 것이 아닌, 골라 보고 듣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감각 과잉의 시대 속 우리의 뇌는 강제로 주입되는 자극을 골라 보고 듣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이에 피로감을 느낀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자극을 모아놓은 콘텐츠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러한 콘텐츠를 ‘ASMR’라 한다. ASMR은 A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의 약어로 ‘자율 감각 쾌락 반응’이라 풀이할 수 있는데, 감각적 자극을 보고 심리적 안정감이나 쾌감을 얻는 것을 말한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등 다양한 감각을 ASMR 영상 콘텐츠로 제작하지만, 그중에서도 청각 콘텐츠가 제일 많다. 

ASMR에는 평상시에 지나치기 쉽지만, 들으면 그때의 느낌이 생각나 기분 좋아지거나, 편안해지는 자극을 주로 담겨있다. 책 넘기는 소리,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 소곤대는 소리 등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인기 ASMR은 바로 ‘귀 청소’ 영상이다(?!). 이 영상에는 1시간 동안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귀를 정성스레 파는 소리만 담겨있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여겨지지만, 가만히 듣고 있으면 어머니가 귀를 파주실 때 간질간질한 느낌이 나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얼마나 기분이 좋아지는가 하면 ‘귀르가즘(귀+오르가즘)’란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이다. 

ASMR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유튜브에 개설된 ASMR 전문 채널은 30만 개 이상이고, ASMR 콘텐츠는 1000만 개를 넘어섰다. ASMR 전문 유튜버 '젠틀 위스퍼링(Gentle Whispering) ASMR'의 구독자는 139만 명, '뽀모'는 138만 명으로 이미 슈퍼스타급이다. 이들은 더 생생한 소리를 담아내기 위해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천만원대 장비를 구비한다. 귀 모양이 양쪽으로 달려 있는 3D 마이크나 사람 머리 모양을 구현한 더미헤드 마이크로 귀를 팔 때 나는 소리나 마사지 할 때 나는 소리를 재현해낸다. 더 생생한 소리를 위해 피부관리숍 등에서 실제 상황을 촬영하는 경우도 있다.

유튜브 마니아의 문화쯤으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광고와 마케팅에도 ASMR은 흔히 쓰인다. 풀무원은 최근 ‘라면 ASMR’을 제작해 라면을 ‘후루룩’ 들이키는 소리뿐 아니라 요리하는 모든 과정의 소리를 담아냈고, 화장품 브랜드 이니스프리 광고는 크림이 피부에 밀착되는 소리를 담아 집중도를 높이기도 했다. 톱스타를 앞세운 화려한 영상으로 소비자를 자극하던 기존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광고뿐만 아니라 심지어 뉴스 프로그램에서도 ASMR을 활용한다. 한 지상파 뉴스 프로그램에서 빙수기로 얼음을 가는 소리, 얼음끼리 달그락 부딪치는 소리 등의 콘텐츠를 1분여 가량이나 내보냈다(거의 방송사고 급이다).

영상 콘텐츠뿐만이 아니다. 전통 있는 세계적인 명품 도자기 ‘베르나르도(Bernardo)’ 에서는 아예 샴페인 소리를 증폭시켜주는 ‘크루그 셸’을 한정판으로 내놓기도 했다. 음악 소리에 묻혀있던 기포 터지는 소리가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 



디지털 명상을 즐기다

ASMR 콘텐츠는 요즘 사람들에게 ‘멍’ 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사각사각, 스르륵 등 의미 없이 반복되는 소리에 잠깐이나마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 상태가 된다. 자칫 시간 낭비라 여겨질 수 있지만 멍 때림은 뇌의 휴식 방법이다. 멍 때림은 의학 용어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라 불리는데, 이 시간 동안 뇌는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함으로써 피로가 쌓이기 전의 초기 상태로 회복한다. 쉴새 없이 돌아가는 요즘 사람들은 ASMR을 통해 일종의 ‘디지털 명상’을 즐기는 것이다. 

게다가 ASMR에는 아무 내용도 담겨있지 않다. 그저 의미 없는 소리만 반복될 뿐이다. 하지만 이 의미 없음에 요즘 사람들은 오히려 열광한다. 그동안 더 예뻐지고, 더 유명해지고, 더 많은 돈을 벌라고 은연 중 압박하는 것에 지친 탓이다. 오죽하면 요즘 20, 30대를 가리켜 ‘무민세대’라 일컫기도 한다. ‘없다’는 뜻의 한자 무無와 ‘의미하다’는 뜻의 단어 ‘mean’을 합친 말로, 맥락도 의미도 없는 것을 추구한다는 신조어다. 어쩌면 ASMR처럼 ‘의미없는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이 극심한 경쟁과 피로에 지쳐 그저 쉬고 싶은 요즘 사람들에게 더 큰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른다. 



큐레이션 된 감각을 소비하는 요즘 사람들

요즘 사람들은 자극의 홍수 속에 어떠한 자극을 받아들이고, 어떠한 자극을 무시할지 고민에 빠져있다. 사실 이러한 고민을 하기도 전에 억지로 주입되는 수많은 자극을 처리하느라 우리가 좋아하던 사소한 자극들이 잊혀진다. 그리고 점점 더 강렬해지는 세상의 자극에 우리의 뇌는 점점 지쳐가고 있다. 이 때문에 요즘 사람들은 우리의 뇌 대신 감각을 큐레이션 해줄 대상을 필요로 하고 있다.

ASMR은 지극히 일상적이라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소소한 자극만 골라낸다. 그리고 그 자극을 극히 단순하게 정제하고, 걸러내어 그때의 그 기분을 실컷 느끼게 해준다. 원치 않는 감각에 허덕이던 요즘 사람들은 이 소소하고, 단순한 자극에 열광한다.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지만, 그리웠던 그 감정을 다시금 느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리라. 



<참고문헌>

1. Simons, D. J., & Chabris, C. F. (1999). Gorillas in our midst: Sustained inattentional blindness for dynamic events. perception28(9), 1059-1074.

2. 두산백과, 선택적 주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94203&cid=41991&categoryId=41991

3. 두산백과, 칵테일 파티 효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48472&cid=40942&categoryId=31531

4. 머니투데이, 10분이 멀다 하고 휴대폰 본다면… 설마 나도 ‘팝콘 브레인’?. 2014. 06. 01

5. 위키백과, 자율 감각 쾌락 반응, https://ko.wikipedia.org/wiki/%EC%9E%90%EC%9C%A8_%EA%B0%90%EA%B0%81_%EC%BE%8C%EB%9D%BD_%EB%B0%98%EC%9D%91

6. 동아일보, 냠냠, 쩝쩝 ‘귀르가즘’…문화콘텐츠에서 ASMR이 인기 끄는 이유는? 2018. 05. 27

7. 한국콘텐츠진흥원 상상발전소 KOCCA, ‘바스락거리고 소곤대는 소리에 위로받다, ASMR – 유튜브, 광고, 뉴스로 확산되는 ASMR의 세계’. 2018. 10. 17

8. 동아일보, 무민세대의 힐링, ASMR. 2018. 10. 31



우체국 사보 '우체국과 사람들 2월호'에 실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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