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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원 Mar 26. 2021

마들창조학교가
걸어온 길과 머무른 길

청소년과 공동체, 학교와 빈곤, 지역과 주체성을 잇기

이 글은 <오늘의 교육 59호>에 게재되었습니다.



학교와 빈곤한 청소년


출근길 버스에서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마들창조학교에 다니는 중학생 B의 담임 교사였다. 듣자 하니 B가 스마트폰을 교사에게 압수당한 뒤 돌려달라며 교무실 앞에 주저앉았다고 한다. 혹시 B와 직접 통화해 줄 수는 없는지를 몇 차례 물어본다. 일어서게끔 얘기해 달라는 부탁이다. 강압적인 학칙이 문제라고 생각해 욱하는 마음이 앞서 소지품 압수는 학생인권조례 위반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터져 나온 당황스러운 한숨. 교사 개인이 학교 안에서 해결책을 강구하기 얼마나 어려웠으면, 오죽하면 전화했을까 싶어지면서 그 한숨이 머리에 박혔다. 마들창조학교 청소년들은 이러한 해결책 없는 상황에 자주 처하게 된다.


학교가 끝나고 공부방에 막 도착한 청소년들의 첫 마디는 학교 욕일 때가 많다. ‘X 같은 교실’, ‘교사의 부당한 처벌’, ‘짜증 나는 같은 반 애들’과 같은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청소년의 일상 중 장시간을 차지하는 학교는 이들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공간이다. 화장하지 말 것, 담배 피우지 말 것, 말을 잘 들을 것, 수업에 열심히 집중할 것, 학생다울 것 등 학교는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와 욕망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정상’적인 것을 상정하여 강요한다. 정상의 범주가 일방적으로 정해진 상태에서 교육은 번번이 억압적인 형태로 표출된다. 원치 않는 배움, 강압적인 공간, 소통 없는 행정. 일반화하는 것일까 봐 조심스럽지만, 내가 이곳에서 만난 청소년들은 유독 자주 경험한 학교의 풍경이다.


빈곤 계층이 주 이용자인 마들창조학교의 청소년들은 자주 학교에서 비행 청소년 혹은 위기 청소년으로 규정된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학내 폭력 사건들의 당사자가 되기도 한다. 이들 다수의 가정은 ‘정상 가족’의 이미지를 구현하기 어렵다. 조손 가정, 한부모 가정 등 그 형태가 ‘정상’에서 벗어난 경우도 많지만, 무엇보다 이상적인 양육자의 역할을 수행할 여유와 자원이 부족하다. 이러한 계급적 상황에 대한 고려보다는 일탈을 교정할 대상으로만 보는 학교교육이 유지되는 한, 문제는 덮어질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마련되기는 어렵다.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


마들창조학교는 시민단체 마들주민회(마들같이) 부설 청소년기관이다. 1998년 서울의 대표적인 빈민 지역인 노원구 상계동 지역에서 가난한 청소년들의 공부방으로 시작했고, 2011년 청소년·주민들과 일상에서 함께하는 교육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중계동 임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취지에 부합하듯, 마들창조학교에 오는 청소년들은 대부분 인근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 처음에는 친구에게 소개받거나, 자매·형제를 따라오거나, 참여하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어 공부방을 찾아온다. 경제적 이유로 배움에서 배제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수업 프로그램은 모두 무상으로 진행하며 메이크업, 손공예, 보컬, 영화 감상 등 당사자의 욕구에 맞는 내용으로 갖춰진다. 커리큘럼 계획 단계부터 청소년들과 함께 주제를 정하고 내용을 협의하여 사업을 집행한다.


공부방(운동)은 도시 빈민과 함께하는 주민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IMF 외환 위기 이후 소외된 어린이·청소년들에게 지역 차원의 돌봄이 필요하다는 공부방의 문제의식은 사회적인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러다 공부방 법제화가 시작되면서 전국의 상당수 공부방이 지역아동센터로 전환한다. 재정과 운영의 독립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어린이·청소년 중에서도 가장 사각지대로 몰린 이들과 함께하지 못하리라 생각한 일부 공부방들은 여전히 민간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마들창조학교도 얼마 남지 않은 민간 공부방 중 하나다.


실제로 다른 지역아동센터에 다니다가 적응하지 못해서 찾아오는 청소년도 있다. 지역아동센터에서는 참가해야 하는 의무 프로그램과 따라야 할 규율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기관에서는 어렵지만 마들창조학교에는 갈 수 있으니 다행이다.” 지역의 어느 청소년 기관 실무자가 했던 말에서 공부방으로 남은 마들창조학교의 의의를 찾는다. 내가 마들창조학교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유기도 하다. 당사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스마트폰 사용을 함부로 금지하거나, 술·담배 하는 것을 비난하지 않기. 청소년 간에 발생한 싸움을 억지로 화해시키지 않고 각자의 입장을 먼저 듣기. 동정심을 일으키며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고정하는 ’애들’, ‘우리 아이들’ 같은 언어 사용하지 않기. 당사자가 중심이 되는 교육을 위해 우리가 지켜온 지향이다.



‘노력’을 넘어 ‘저항’하는 자립을 꿈꾸다


작년 한 해 마들창조학교에서는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개인의 노력을 넘어 빈곤에 저항하는 확장된 실천으로서 ‘자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금 노동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 안에서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경제’, ‘정서’, ‘정치’ 세 분야에서 주체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둔 지역 청소년운동의 비전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주체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미래에 대한 준비와 더불어 현재의 자기다운 삶을 위한 실천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메이크업 부스, 증명사진 촬영 등 청소년이 스스로 기획하고 수익을 내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자기 명의의 통장도 만들지 못하고, 저축한 돈을 부모가 사용해 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현재의 삶도 불안할뿐더러 미래를 대비하기는 더 어렵다. 당장 손에 쥔 것들을 빨리 써 버리는 것이 오히려 이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청소년의 경제적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문화와 제도를 바꿔 나가는 것도 숙제 중 하나다.


마들창조학교를 다니는 청소년의 상당수는 같은 임대 아파트와 같은 유치원, 같은 학교에서 지내 왔다. 오랜 시간 축적된 관계망 속엔 고질적인 권력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작은 사회 안에서 내쳐질까 하는 두려움으로 인해, 힘의 논리에 따르는 것은 하나의 생존의 방식이 되었다. 독점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양맺기’(양동생, 양언니, 양누나 등)도 안정적인 권력과 관계에 대한 욕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주도적으로 관계를 맺거나 끊을 힘이 중요했다. 외부에 좌지우지되지 않을 힘은 어떤 정서를 경험했는지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정서는 여러 감정과 그 감정을 둘러싼 문화까지 포함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부터 옳고 그름에 관한 생각까지도 결국 정서에 영향을 받는다. 대안적인 정서 형성을 위해 공부방은 대화에 주력했다. 고민을 들으며 존중을 주고받는 경험을, 인문학 수업을 하며 관계와 문화를 돌아보는 시간을 꾸준히 가졌다.


공부방에서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청소년들도, 집이나 학교에서는 결정권을 행사하기 어렵다. 요리, 청소, 양육 등 가사 노동을 분담하거나, 부모 혹은 언니오빠의 매질하는 손을 당당히 붙잡거나, 가정폭력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를 집 밖으로 내보내 피해자가 쫓겨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정치다. 또한 스마트폰과 화장품을 빼앗거나 벌점으로 협박하지 않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학생들이 의견을 모으고 공론장을 형성하여 모두를 위한 학칙을 만드는 것도 필요한 정치다. 그동안 마들창조학교 수업을 준비하고 실행하면서, 서로의 욕망을 분명히 표현하고 조정하며 교섭하는 과정을 중요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빈곤은 청소년이 겪는 억압과 맞물려 더욱 배제적인 상황으로 ‘빈곤 청소년’을 몰아세운다. 이들이 지역에서 주체로 설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공동체, 마들창조학교가 꿔 보았던 꿈이다. 그러나 제대로 한번 계획해 볼 기회도 가지지 못한 채, 곧이어 닥친 위기들 앞에 꿈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위기로부터 다시 깨닫게 된 존재 의미


첫 시작은 입주해 있던 구립 컨테이너 건물의 철거가 예정되면서다.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공간을 잃게 되었다며 분노하고, 공간을 지켜 달라는 서명을 함께 받으러 다녔다. 그 결과 구청의 중재로 단지 내 공간으로 이전할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아파트 임차인 대표회의 퇴거 요구였다. 청소년들이 단지 내에서 담배를 피워서라는 황당한 이유였다. 대표회는 퇴거하지 않을 거라면 상근 교사를 해고하라고 요구했고, 결국 교사들의 역할을 조정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청소년들이 거리에 모여만 있어도 신고가 들어가던 지역인지라 혐오 시설이라는 낙인을 지우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코로나19가 찾아왔다. 가장 최근의 위기이자, 가장 큰 위기였다. 행정 조치에 따라 청소년 기관은 모두 문을 닫아야만 했다. “창조는 언제 다시 문을 여냐”, “코로나가 끝나기는 하는 거냐” 답하기 어려운 청소년들의 질문이 전화와 카톡으로 이어졌다. 이제 청소년과 직접 만나기도,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 교육청으로부터 온라인 사업 진행을 제안받았다. 청소년들도 온라인 소통에 익숙할 것이란 생각에 별 무리가 없으리라 판단했다. 그렇게 온라인 수업을 시작했다.


막상 진행한 온라인 수업은 오프라인 때보다 참여율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평소 열 명이 넘게 참여하던 보컬 수업도 인원수가 저조했다. 온라인이라면 막연하게 괜찮으리라 생각했지만, 정작 청소년들이 익숙한 ‘온라인 세계’와 ‘온라인 수업’은 거리가 있었다. 이들이 일상적으로 온라인에 접속해 온 수단은 스마트폰이고, 주로 소셜미디어나 플랫폼을 통해 먹방, 예능, 게임 등의 관심사를 즉각적으로 충족하거나 친구 혹은 지인과 소통하기 위해 이용한다. 본인들이 온라인에서 수용하던 주제와 방식이 아니었기에, 줌이나 카톡으로 이뤄진 마들창조학교의 수업은 참여자에게 충분한 효용성을 주지 못한 것이다.


집에서 바로 놀러 갈 수 있는 곳, 학교를 마치고 편하게 놀러 가 함께 밥을 먹는 곳, 원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그냥 누워서 와이파이를 사용하며 잘 수 있는 곳. 이는 청소년들에게 받아들여진 마들창조학교의 의미이자, 일상에서 청소년과 살을 부대끼며 자연스럽게 해 온 역할이었다. 그러니 청소년들에게 온라인으로 만난 마들창조학교는 코로나 이전과 동일한 의미로 다가갈 리 없었다.


올해 마들창조학교는 새롭게 다시 시작하거나 마무리를 지어야 할 기로에 서 있다. 위에 나열한 위기가 아니었더라도 지속가능하지 못한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에게 인정받지 못함, 외부 지원에 의존해 온 재정과 지원금 축소, 교사 1인 체제로의 전환, 청소년·주민을 운영 주체로 세우지 못하는 등……. 뚜렷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보이지 않던 위기들이 있었다. 할 얘기가 많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대안적인 삶이 가능하려면 참고할 서사가 필요하다


한편 나이가 바뀌어도 마들창조학교를 계속 찾아오는 청년들이 있었다. 교사와 술잔을 기울이며 힘듦을 토로한다. 이들이 계속 찾아오는 이유는 뭘까. 청소년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12월 31일의 삶과 1월 1일의 삶이 갑자기 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대학에 갔고, 누군가는 10대 때와 마찬가지로 배달과 같은 알바 노동을 계속한다. 동네를 떠났다가 많이들 원가족이 있는 동네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온전히 자신을 존중하고 받아 줄 수 있는 공간은 청년 시기에도 여전히 필요하다. 변화는 있으면서도 없다.


졸업생 모임인 ‘후레자식 모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마들창조학교에서 그랬듯이 사회가 규정지은 길이 아닌 나다운 길을 고민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마음들이 모여, 지금의 모임명이 지어졌다. 영화나 연극을 보거나 한강에 나들이 가기, 서울퀴어문화축제 참가 등을 함께 했다. 그러면서 점차 교사와 학생 사이를 탈피하여 서로 공감하며 위로하는 관계로 바뀌었다.


청소년의 삶과 청년의 삶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청소년에게 대안적인 삶이 가능하려면, 참고할 서사가 필요하다. 청소년으로 살아가는 짧은 시간 안에 온전히 자신으로 살 수 있으려면, 곧 넘어가게 될 청년 시기의 대안적인 삶의 모델이 다양하게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가령 결혼하지 않는 삶을 원한다면, 단순히 결혼을 하지 않는 것뿐만 아닌 어떤 방식의 비혼이 가능한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 친구와 살 것인지 애인과 살 것인지 혹은 혼자 살 것인지 등……. 이러한 삶의 모델을 논하고 상상하며 실천할 수 있는 공동체. 이는 앞으로 ‘후레자식 모임’이 나아갈 방향이며 한편 마들창조학교에서 못다 이룬 꿈이기도 하다.


주체는 홀로 탄생하지 않는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들과 만나고, 경험과 생각이 쌓여 엮고 다시 묶는 과정을 통해 공동체와 사회의 주체로 성장한다. 아주 작은 일부터 협의하고 운영의 권한을 가지며, 나의 공간이자 우리의 공간으로 인식하기, 자기 삶의 주인이자 사회의 주인으로 살기, 이러한 공동의 인식을 가지는 과정은 시간도 걸리고 어렵다. 나는 소수자들이 정치할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꾸며 지역에 들어왔다. 소수자인 청소년을 대하는 태도와 활동 방식에 반하여 마들창조학교에서 활동했다. 돌이켜 보면, 당사자가 꼭 좋은 사람이어서 함께해 온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만나 온 많은 청소년이 밉기도 했다. 정치는커녕 정치질만 하며 분위기를 좌지우지하거나 누군가를 조리 돌리는 모습에 절망도 했다. 그러나 당장의 변화는 어렵더라도, 내가 불편한 것들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곁에 머물렀다. 당사자의 말이라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목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목소리를 되찾는 과정에 함께하는 것은 분명 옳다.



빈곤을 고려하는 교육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학교에 가지 않아 신이 났던 중학생 청소년들이 슬슬 지루함을 느껴 학교에 가고 싶다고 얘기할 무렵, 코로나의 영향으로 참석자 수를 줄이면서 오프라인 운영을 재개하였다. ‘마들같이’ 사무실에 임시 거처를 차렸고, 이전보다 운영 시간도 줄이게 되었다. 공간이 아파트 단지 안에 있을 때보다 인원은 적지만, 프로그램 참여자 수만큼은 유지되고 있다. 그동안 PC방은 청소년의 출입만 금지되었고, 코인 노래방도 가기 힘들어졌으며, 학교도 예전처럼 드나들 수 없게 되었다. 이 와중에 청소년들이 집에서 게임만 한다는 비청소년(성인)들의 불평도 들린다. 이들이 몸과 마음을 둘 곳은 어디여야 하는가.


체제는 바뀌지 않은 채로 체계의 외연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했다. 청소년이 누려야 할 현재가 미래로 유예되는 것은 여전하며, 특히 빈곤 계층에 속할 경우 그 유예는 더 많은 방면에서 강화된다. 기술과 교육이 결합한 미래 교육에 대한 기대가 넘쳐나지만, 당장 온라인 수업 접속에 필요한 와이파이도 원활하지 않고 집중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도 없는 학생이 여전히 존재한다. 4차 산업 혁명으로 노동이 소멸될 것이라 얘기하는 와중에, 플랫폼 노동을 포함한 불안정 노동은 더 넓고 빠르게 범주화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어떤 내용과 방식으로 가르칠지를 결정하는 것에는 정치적인 판단이 따른다. 그렇기에 모든 교육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성질을 가진다. 빈곤을 고려하는 교육은 결국 빈곤의 근본 원인과 이해관계라는 정치적인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으며 이를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무엇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가 이어지기 위한 기회와 여유를 빼앗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밀려난 자들과 배움을 나누며 주체가 되는 해방의 과정으로서 교육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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