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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요세프 Oct 03. 2024

나의 고백 (1996)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20대 초반 입대를 위해 휴학계를 내고 고향에 내려갔을 때의 일이다. 때마침 고3 때 담임선생님께서 과외 자리를 소개해주셨다. 선생님이 재직 중이던 고등학교의 여고생들이었다.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가뭄에 단비 같은 소중한 기회였다. 일주일에 3회,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거였는데, 수험공부에서 손을 놓은 지 꽤 시간이 흘러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나의 주머니 사정을 알고 특별히 추천해 주신 자리였던지라, 짧은 망설임을 뒤로한 채 난 다시 성문 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을 펼쳐 들었다.

     

그렇게 경옥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예습과 복습에 철저하고, 궁금한 내용이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과감하게 물어볼 줄도 아는, 성실하고 평범한 여고생의 모습이었다. 사범대에 진학해 교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시간이 흘러 여느 과외선생과 제자들처럼 우리도 자연스레 이별했고, 각자의 삶에 충실했다.     


다시 경옥의 소식을 접한 건, 2002년 월드컵의 열기가 온 나라를 뒤 감을 무렵이었다. 월드컵 4강 신화의 기쁨은 찰나였다. 현실 세계로 돌아온 나는 대학 졸업과 취업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평균 학점을 올리기 위한 재수강, 계절학기 수업, 토익학원 수강, 논술과 상식 시험 대비를 위한 공부 모임까지. 갈 길은 딱 하나인 듯,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대응하는, 약자의 벼랑 끝 전술이었다. 당시는 이른바 간판 좋은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 취업하는 것만이 세상의 위너(승자)로 인정받던 때였다. 취업만이 정답이고, 창업이나 도전은 오답이었던 시절, 경옥의 <유재하 가요제> 참가 소식은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유재하는 한국형 발라드의 시초라고 불린다. 정통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그가 대중가요계에 입문한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상식을 깬 행보였으리라. 어쩌면 그는, 레드오션에서 블루오션을 발견한, 수십 년 앞을 내다본 경영학적 발상의 전환을 한 선구자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에 유재하는 넝쿨 째 굴러온 복이었다. 서정적인 가사와 멜로디, 메이저 장조가 닌 마이너 단조로 곡을 끌어가는 집중력. 유재하의 대학 후배인 당대의 작곡가 김형석은, 유재하가 도입한 브리지(Bridge) 형식으로 우리나라 대중음악계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2002년,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싱어송라이터의 산실 <유재하 가요제>에 도전한 경옥은 대상을 받았다. 참가곡은 자작곡인 <혼자 걷는 길>이다. 이별 후의 쓸쓸한 감정을 독백하듯 노래하는, 마이너 발라드풍의 피아노 소품곡이다.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그녀가 유재하 표 발라드의 계보를 잇고 있음이 자연스레 전달된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감성과 문화는 전이된다.  

    

유희열, 조규찬, 방시혁, 루시드 폴, 정지찬, 박 원, 스윗소로우, 나원주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유명 대중음악인들이 <유재하 가요제> 출신이다. 이렇게 쟁쟁한 실력자들 사이에서 1등을 하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지난 수년간 경옥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당시엔 서로의 인생을 질문할 겨를 따위는 없었기에, 오롯이 축하의 말만 건넸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20대 초반 너무 이른 나이에 재능을 꽃피운 건 아닐지 걱정도 됐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 그리고 운(運)이라는 3박자가 모두 맞아야 1등이라는 결과가 나올 수 있기에, 너무 이른 성공은 복(福)이 아닌 독(毒) 임을 잘 알기에 말이다.   

  



1996년, 이승철은 <나의 고백>을 발표했다. 파괴적 혁신의 곡 <오늘도 난>이 수록된 5집 곡 중 하나다. 3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아니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도, 내 젊은 날의 초상에는 <나의 고백>이 배경음악일 것이다. 노래가 너무 유명해서는 나의 주제곡이 될 수 없다. 수많은 이승철의 명곡이 히트하지 않아 속상하지만, 이 곡만큼은 예외다. 정말 소중한 것은 나 홀로 간직하고픈 욕심이 든다. 

    

사실, <나의 고백>은 리메이크곡이다. 한 해 전인 1995년, 그룹 자화상의 리더이자 싱어송라이터인 나원주가 <유재하 가요제>에 참가해서 발표한 자작곡이다. 당연히(!) 대상은 그의 몫이었다. ‘소리 없이 내리는 빗물은 너를 향한 나의 눈물이고, 너의 미소는 영원히 내게 남아 있기에 다시 볼 수 없어도 다행’이라는 슬픈 고백의 노랫말과 서정적 멜로디, 그리고 유려한 피아노 연주가 일품인 곡이다.


음유시인 김동률은 지금도 다른 사람의 콘서트에서, 자신의 콘서트에서, 방송에서 이 곡을 부른다. 이 노래의 대중적 생명력과 확장성은 8할이 그의 몫이다. 물론, 자타공인 최고의 음악인으로 불리는 김동률이 이 곡을 픽(Pick)했다는 것으로도 <나의 고백>의 진가는 확인된 셈이다.  

    

이승철은 5집 앨범의 타이틀로 <오늘도 난>과 <나 이제는> 같은 빠른 비트의 댄스곡을 선택함으로써, 대중가수로서의 승부수를 던졌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의 고백> 같은 트랙으로 음악적 지향성과 균형감각 역시 잃지 않았다. 이승철은 녹음실에서 <나의 고백>을 노래하며, 나원주 그리고 유재하와 교감(交感)했을 것이다.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교류·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노랫말과 멜로디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서로를 연결한다.    

 

텔레파시 완전 거짓말은 아니다. 가끔 <그 사람>의 안부가 궁금할 때,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거나, 카카오톡 메시지가 뜨는 경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1990년대 후반, 과 동기인 정민이가 연결해 준 소개팅녀와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어색함을 달래려 혼자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옆으로 다가온 그녀가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며, 혹시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인 <나의 고백>을 불러줄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내가 흥얼거리던 노래 물론 <나의 고백>이었다. 그날 이같은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분명 텔레파시가 흐른다고 믿게 되었다.  

   



여고생 경옥이 어른이 되어 가요제 수상을 하고도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나의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그녀는 이른 성공에 자만하지도, 그렇다고 음악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느린 걸음으로, 그러나 지금껏 꾸준하게 아름다운 음악을 발표하고 있다. 그녀라고 말하지 못할 삶의 우여곡절이야 없겠느냐만 그래도 그 말도 많고 탈도 많다는 대중가요계에서 뒷말 하나 없이 자기만의 독특한 영역을 구축했다는 점 다. 해외 유학파 재즈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겸 대학 강사 겸 싱어송라이터 겸 엄마의 역할까지 잘 해내고 있니, 이쯤 되면 게으른 내가 부끄러워진다. 무엇보다 그녀는  입버릇처럼 말하던 이문세(멀리 걸어가)와 성시경(Thank you)에게 곡을 주겠다는 오랜 꿈까지 이루었다. 작곡 리스트에는 거장 최백호와 이은미도 있다. 이제는 경옥아!라고 함부로 부를 수도 없는, 이 뮤즈(muse)의 활동명은 <유해인>이다.


얼마 전 대학교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명수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학 시절부터 친했던 친구들과의 모임에 나를 초대한다는 거였다. 억지 인연은 더 이상 맺고 싶지 않아 처음엔 거절했는데, 끌림의 힘인지, 아니면 텔레파시 덕분인지, 나는 천당 아래 있다는 분당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다. 넉살 좋은 명수형의 주선으로 1년 터울 선배들과의 대화가 한창 이어질 무렵, 맙소사! 그중 한 분이 경옥의 남편분이 아니던가. 5천만 명이 사는 대한민국이 이렇게 좁은 구석이라니. 아니 그보다는, 사람과의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하고, 예측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수 형이 종종 언급하던 진국 같은 친구, 경옥이 자랑하던 가정적인 남편을 이렇게 마주할 줄 어찌 알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사업을 하고 있다는 그가 운영 중인 회사도, 듣보니 우리 회사의 오랜 고객이다.  

    

네트워크 이론에 따르면, 4단계만 거치면 이 세상 모든 사람과 연결된다. 단절되어 산다고 자부하는 외톨이도 예외는 아니다. 나 또는 내 주변 누군가는 강력한 네트워크를 보유한 핵심 노드(nod)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은 페이스북(X)도 있고, 인스타그램도 있다. 직접 만나지 않아도 교감이 가능한 시대다. 자국 우선주의, 블록화 된 세상이 다시금 도래했다고도 하지만, 연결 고리로 치자면, 여전히 우리는 지구촌·지구마을에 산다.     

 

<나의 고백>이라는 노래 하나가 故 유재하부터 이승철, 나원주, 김동률, 유해인, 이문세, 성시경, 그리고 나와 그 옛날 <이름 모를 소녀>에 이르기까지, 시공을 초월해 많은 사람을 한 줄로 이어준다. 씨줄 날줄처럼, 사람도 음악도 결국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죄짓고는 두 발 뻗고 못 잔다는 말이 있다. 굳이 좋지 않은 예를 들먹일 것도, 남의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다. 앞으로의 삶,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야 함은 디폴트값이다. 기회가 되는 한, 힘이 닿는 한, 남에게 도움도 주며 살 일이다. 유니세프, 굿네이버스에 매월 몇만 원씩 기부하는 일도 좋지만, 우선은 내가 사랑하는 가족, 부모, 형제, 오랜 벗에게 잘할 일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던 시인 윤동주의 수오지심(羞惡之心)이 떠오르는 부끄러운 밤, <나의 고백> 이어진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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