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와 나는 동년배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료 중 또래가 없어서인지 몰라도, 만나자마자 그에게 묘한 친밀감을 느꼈다. 하지만, 일 이야기를 하면서, 이내 그와 나 사이의 경제력(!) 차이를 알게 되었고, 동질감은 순식간에 이질감으로 변해버렸다.
대기업과 연예인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세간의 말은, 참이었다. 하지만, 부러우면 지는 거다. 이내, 마음을 다잡고, 우린 각기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라, 각자의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뿐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해 본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 남 잘되는 꼴 못 보고, 성공한 사람은 일단 까고 보는, 저잣거리의 못된 심보는 그저 남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J와 면담하는 과정에서, 그에 대한 부러움, 시기, 질투 같은 복잡한 심경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인간은 본래 악한 것인가. 내 그릇이 작은 거겠지?
이대로 그를 보내면, J와 나 사이의 차이는 더 메우기 힘들 것 같았다. 더 늦기 전에, 그의 성공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나의 기회로 활용하는 편이 백배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활동하는 분야, 살아온 환경은 많이 달라도, 그와 나는 모두, 대한민국, 그중에서도 서울이라는 같은 하늘 아래서 살아가는, 동년배 아니던가. 현재의 결과치만 보고 체념할 일이 아니다. 그간의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J를 만나 부러우면서도 친근감을 느낀 건, J가 나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스타, 닿을 수 없는 별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었다. 또래라 하더라도, TV 모니터 속 원빈, 소지섭, 송승헌을 보고 시기와 질투를 느끼지는 않는다. 그저, 다른 세상을 사는 스타라는 생각에서 그칠 뿐이다.
솔직히 J는, 내 친구 아무개보다 특별히 잘생긴 것 같지도 않고(ㅎㅎ), 키와 몸매, 나이, 심지어 아들 중 한 명이 축구를 했다는 점까지 나와 닮았다. 좀 미안하지만, J는 일반인의 향기가 강하다.
J는 늦깎이 스타다. 글쓰기와 그림을 좋아하는 평범한 미대생이었던 그는, 뒤늦게 연기자의 꿈을 꾸었다. 무사히 서울예대에 진학했고, 20대 초반에 공중파 TV 시트콤 출연의 기회도 잡았다. 여기까지 보면, 여느 스타 탄생의 시작과도 같다.
하지만, 인생이 이렇게만 흘러갔다면, 그가 계속 승승장구했다면, 내가 이 시간에 그와 면담한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행(幸)과 불행(不幸)은 교차되기 마련이다.
뜻하진 않았겠으나, J는 거의 15년 이상을 무명으로 보냈다. 그사이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생겼다. 가장으로서 경제적 책임감은 커졌지만, 소득은 그에 비례하지 않았다. 주변의 숱한 만류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버티고 또 버텼다. 타고난 재능, 최고의 달란트는 아닐지언정, 자신이 꿈꾸던 분야에서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단역, 조역, 코미디 쇼 등 가릴 것 없이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자연스레 실력(연기력, 가창력)은 늘었고, (대중은 모르더라도) 업계 내 인지도는 올라갔다. 물론, 자기 자신은 이런 변화를 감지하기 힘들다. 끝이 잘 보이지 않는 터널 안에 갇힌 느낌이었으리라.
그러는 사이, 방송계는 공중파 3사에서 케이블, 종편, 유튜브를 비롯한, 다채널 시대로 변했다. 그는 아날로그에 익숙한 세대였지만, 플랫폼 시대는 오히려 그에게 기회였다. 판이 커지고, 무대가 늘어나자,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과 일상 연기, 코믹 연기, 노래까지 소화가 가능한 그를 찾는 플랫폼이 많아졌다. 어느 파트너를 만나도 잘 융화하고,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질 줄 아는, 삶의 경륜으로 체득한 그의 눈치는 덤이었다.
짧은 시간은 화면 안에서, 대부분 시간은 화면 밖에서, 십수 년을 살아온, J는 사실, 나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이다. 아니, 비범한 이웃이라 하는 편이 맞겠다. 그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를 잡기 위해, 늘 노심초사하면서도, 기꺼이 비정규직의 삶을 살아냈다. 다행히, 그를 끝까지 믿고 격려해 준 배우자가 있었고, 그를 최고라고 생각하는 자녀들도 생겼다. 누가 뭐라 해도, 행복한 가정은 성공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짧은 몇 번의 만남으로, 내가 그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보긴 어렵다. 엄연히, 우리는 일로 만난 사이기 때문이다.
격식과 매너, 존중과 웃음 속에서도, 날카로운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갔다.
다행히, 그의 행보가 여기서 멈출 것 같지는 않다. 뒤늦게 찾아온 전성기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차기 출연작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고, 그가 출연한 콘텐츠는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해외로까지 뻗어나가는 중이다. 그를 광고 모델로 쓴 회사들의 매출액도 쑥쑥 늘어난다고 한다. TV, 영화, 드라마, 뮤지컬 출연 섭외도 계속되고 있고, 최근에는 공익광고의 모델로도 발탁되었다. 바야흐로 J의 전성기다.
굳이 (주식시장에) 비교하자면, 그는 저평가 가치 성장주다. 20년 동안, 연예인이라면 응당 있을 법한 스캔들이나 사건 사고도 특별히 부각되지 않는 걸 보니, 자기 관리도 철저하다. 롱런(Long-run), 꾸준한 주가 상승이 기대된다.
K-Contents의 경제적 부가가치가 엄청나다고 하더니, J도 한몫 단단히 담당하는 모양새다. 최근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면, 그는 신인 연기자와 음악인들도 발굴하고, 그들을 위해 쾌적한 연습 공간도 제공할 예정이라 하니, 추가적 고용 창출도 확실시된다.
덕이 많으면, 주변에 사람이 모인다(德不孤必有隣).
얼마의 시간 동안 내가 만난 J의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은행 지점장님도, 세무사님도, 사무실 매니저님도, 우연히 대화를 나눈 그의 로드 매니저까지도 그의 인성과 배려심을 추켜세웠다. 역시, 사람 보는 눈은 비슷하다. 첫 만남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던 나도, 언제부턴가 그를 도울 최선의 방법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와 처음 대면하는 자리에서, 난 나의 실패 연대기를 설명하는데, 긴 시간을 할애했다. 그가 어려운 시간을 잘 이겨내고, 지금의 위치에까지 올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좋은 기운을 이어받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그도 기다렸다는 듯이,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다는 자신의 무명기를 내게 설명해 줬다.
아픔, 실패담을 공유하고 나니,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우리 사이의 거리도 한결 가까워진 것 같았다. 비극을 나누면, 공감은 배가된다.
둘 사이 공통분모를 고민하던 끝에, J와 절친한 것으로 유명한 스타 K가, 전속 모델로 활약 중인 회사의 담당자가 나였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나이가 마흔을 넘었어도, 나의 유아기적 인정욕구는 여전했다. TMI(Too Much Information)는 낯부끄러운 일이다.
그는 여러모로 나보다 한 수 위였다. 광고주에게 연락해서, 자기도 그 광고에 함께 출연시켜 주면 안 되겠느냐는 이야기로, 어색해질 뻔한 분위기도 살리고, 나의 체면도 살려줬다.
여러 이해관계자가 얽힌 업무였기에,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기까지 2주일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동년배의 유명 연예인과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나의 착각으로, 업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행여라도, 업무상 과실로 인해 내 밥줄이라도 끊기는 날엔, 우린 친구가 아닌 적으로 만날 수도 있는 일이다. 업무는 결코, 친소 관계를 허용하지 않고, 고의 중과실을 용납하지 않는다.
무사히, 업무를 마무리한 후, 회사 Web 발신 서비스로, 그에게 의례적인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와 만난 후 시간도 꽤 흘렀고, 더구나 공적인 업무로 만난 사이였기에, 사적으로 연락을 하는 건, 괜한 민폐가 될 수 있어 참았다. 물론, 업무 특성상 인적 네트워크를 장려하는 회사 문화도 아니다. 오죽하면, 명함에 핸드폰 번호도 안 새길까.
개인 연락처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기관의 청렴함을 보여주는 표현방식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굳이, 나만 혼자 튈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다. 한 직장을 20년 다니다 보니, 원래의 내 생각, 가치관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종종 헷갈린다.
물론, 신중한 행보가 나쁠 건 없다. 인연이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보게 되겠지 하고 마음을 다잡는 순간,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J였다. 그의 사무실을 방문하던 날, 문 좀 열어달라고 전화를 걸었었는데, 그때 번호를 저장해 두었던 모양이다.
“요세프 님, 고마웠어요. 조만간, 불쑥 전화하고 찾아갈게요. 소주 한 잔 해요”
불쑥이라는 단어가 참 맘에 들었다. 친근감과 진정성이 느껴졌다. 후배들에게도 자랑하듯 메시지를 보여줬다. 다들, 그 술자리에 자기도 끼워달란다. 나도 꼭 그러자고 답신했다. 실로 오랜만의 설렘이었다. 남자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우리의 애매한 약속은 성사되지 않았다. 못내 아쉬웠다. 날씨를 정했어야 했는데...
굳이, 합리화하자면, 나도 연일 계속되는 야근과 개인(가정) 생활, 그리고, 돌우물 응원하기와 브런치 글쓰기 등으로 바빴다. 이런 핑계로(실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나는 J에게 먼저 연락하지 못했다.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한, 삶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긴 힘들다.
연휴 기간에, 모처럼 넷플릭스 몰아보기를 했다. 손 안의 영화관 넷플릭스는 모든 시름과 상처를 잊게 해주는 소중한 나의 안식처다. 한국 영화는 잘 안 보는 편인데, 그날따라 <OOO>이라는 영화에 눈길이 갔다. 편안한 맘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 재생 버튼을 눌렀다. 김래원, 이종석, 이민기 등 출연자 면면도 맘에 들었다.
아, 그런데 이게 웬걸, 갑자기 J가 나온다. 사실상의 주인공 역할이었다. 영화 초반에 생뚱맞게 등장해,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극을 이끌어 간다.
영화는 나의 예상과 달리, 어둡고 심각한 장면들로 가득했다. J는 그 안에서 웃음기 있는 연기로, 자칫 무겁게만 흐를 수 있는 작품의 분위기를 변주(變奏)하고 있었다. 그의 밝은 존재감이 빛을 발한다. 이런 경우를 약방의 감초라고 하던가. 어느새, 난 영화에 집중하기보다 J에게 안부를 묻고 있었다. (물론, 다소 개연성 없는 전개와 과장하는 듯한 인물 연기가 영화 몰입을 방해하기도 했다.)
“OO 씨, 잘 지냈어요? 조만간, 불쑥 전화하고 찾아갈게요. (영화 얘기하면서) 소주 한 잔 해요”
영화 <OOO>은 트리거(Trigger), 촉매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먼저 연락을 해야 한다. 더 머뭇거리다가는, 그와 나는 서로에게 이방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살아온 여정, 살아갈 인생의 이질감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번 생에서는 내가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벌어진 재력 차이(!)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용기를 낸다. 우리에게는 글쓰기, 영화, 음악이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다.
이제, 서로 이해관계가 없으니 맘도 가볍다. 주머니 사정도 내가 한결 가벼우니, 겨우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산다고 해도, 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다.
과연,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방금, 그가 나의 문자를 확인했다. 이질감이 동질감으로 변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서두르면 안 된다. 과연, 그는 나의 부름에 화답할 것인가. 이제, 우리 사이의 데시벨을 확인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