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전자상가의 지속 가능성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고민할 때다.

by 임요세프

지하철을 타고 용산역에서 내리면, 용산 아이파크몰에 들어서게 된다. 눈요기(아이쇼핑)하기에도 좋고, 가족 나들이나 모임 장소로도 제격이다. 주말에 자가용을 타고 아이파크몰에 가는 게 고역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용산을 찾는다.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일뿐더러, 이제는 정치의 중심지로도 거듭나고 있는 용산의 위세는 날로 커지고 있다.




그러나, 용산역을 나와 내리막길에서 접하게 되는 주변 풍경은, 다소 당황스럽다. 동네에 활기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호기롭게 찾아간 용산 전자상가는 내가 생각했던 그림과 너무 달랐다. 오늘 내가 방문한 곳은, 예전(舊) 용산 전자상가의 핵심 메카라 불리던 선인 상가 21동이다.


이곳은 컴퓨터, 노트북, 컴퓨터 주변기기인 마우스, 키보드, CPU, GPU, 그래픽카드 등을 일반 소비자들에게 판매하거나, 전국 소매업체들에게 납품하는 곳이다. 즉, 컴퓨터 및 주변기기 유통업체들 클러스터다(밀집 지역).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과거의 클러스터라고 하는 게 맞겠다.


사실, 선인 상가 21동, 22동은 부동산 등기부등본을 발급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예전에는 OO동 OO번지만 알면 길을 찾는 것도, (인터넷) 등기소에서 등기부등본 떼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동과 지번이 일제식 표현이라는 이유로, ~로 ~길로 주소 명이 바뀌자, 곳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오랜 시간 행정적 노력을 기울이고, 비용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소는 여전히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고, 새로운 주소 명으로 재정비되지 않은 곳도 많다. 용산 전자상가(선인 상가)도 그중 하나다. 현재의 주소 명 기준 용산구 청파로20길 34에 소재한 선인 상가는, 옛 기준으로는 한강로2가 15-14, 15-47, 48, 49 등등으로 뒤섞여 있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쉽사리 발급되지 않는 부동산 등기부등본... 오늘의 CEO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유독 무겁다. 부디, 극적인 반전이 있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대한민국의 중심부, 용산은 전자상가가 밀집한 첨단(尖端)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아직 과거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전통의 유물(遺物)이기도 하다. 건물이 지어진 지 40년은 족히 넘은 용산 전자상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선인 상가 2개 동을 보고 있노라면, 오늘날 전자상가가 처한 현실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해진다.


데스크-탑 컴퓨터가 필수재이던 시절,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용산 전자상가에 들려 컴퓨터와 노트북, 주변부품을 사거나, 고장 난 제품을 수리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던 시기는 용산 전자상가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제아무리 센 권력가의 권세도 십 년을 넘길 수는 없고(權不十年), 한 산업의 전성기도 계속될 순 없다.


불과 십여 년 사이, 컴퓨터에서 노트북으로, 노트북에서 태블릿과 핸드폰으로... 전자제품의 크기는 갈수록 작아졌고, 성능과 편의성은 기하급수적으로 진화했다. 컴맹과 디지털 문맹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어느새 전자기기 관련 온라인 쇼핑몰 시장은 일상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더 이상 컴퓨터, 노트북, 핸드폰을 눈으로(!) 보고 사기 위해 용산을 방문할 필요가 없다.


과거엔 삼성, LG, MS 같은 전자제품 대기업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용산 전자상가에 터 잡아 연간 수백억 원의 매출액은 쉽게 달성하던 기업들이 부지기수였다. 전자기기 유통업의 메카로서 기능을 하다 보니, 전자상가 내에 많은 기업이 모여 있어도, 제 살 갉아먹기식 출혈경쟁을 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구조였다. 내가 갖지 못한 상품이나 소프트웨어는 옆 가게에서 빌려 팔 수 있고, 옆집에서 원하는 물건은 내가 빌려주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선인 상가 21동 2층 1호 기업 A는, 2층 2호 기업 B에게 신상 컴퓨터와 그래픽카드를 빌려주고, 세금계산서를 발행한다. B의 고객이었던 손님이 방문하기로 했는데, B가 해당 제품을 보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B의 사업장에서 전자제품을 사 가기로 한 고객이, 2층 2호를 찾다가 헷갈려 2층 3호 기업 C의 매장을 방문했다.


C도 고객이 찾는 상품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지만, 전혀 당황할 필요가 없다. B로부터 물건을 넘겨받아 무사히 제품을 팔 수 있고, 심지어 A/S도 제공 가능하기 때문이다. 손님이 가고 난 후에 할 일은 하나다. B가 C에게 세금계산서를 발행해 주는 일이다. 최종 소비자가 가격에 불만을 표시하지 않고, 제품과 서비스에 만족했다면, 이 과정에서 손해를 본 이는 아무도 없다.


용산 전자상가에서 흔하게 일어나던 업무흐름이다.


개인 간에는 특별한 근거를 남기지 않고, 물물 교환을 하기도 하고, 일방적으로 선물을 하기도 한다. 그게 인간 내음 나는 아름다운 세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업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 기업은, 모름지기 세금계산서로 상호 의사를 표현한다.


물론, 이 과정이 진정한 기업 간 매입-매출 거래라고 볼 수 있느냐의 문제는 남는다. 매출액 과대계상의 문제, 진성 거래 여부에 대한 고민, 세금계산서 발행 기업 간 통장 입출금 거래내용 검증 등은 (기업) 금융기관 종사자라면, 종종 경험하게 되는 어려움이다.




사실, 일반 소비자 입장에서는, 온라인 플랫폼이나 전자상거래 쇼핑몰이 활성화된 건 환영할 일이다. 중간 도매업체(유통업체)의 이익이 사라져, 더 낮은 가격에 제품을 구매하고, 서비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채권자(은행)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금계산서 돌려 막기로 인한 기업의 매출액 뻥튀기, 품질 좋은 상품이나 소프트웨어를 갖추지 못한 실체 없는 중간 유통업체의 먹튀도 방지할 수 있다.


2명(생산자와 소비자)의 이익이 1명(유통업자)의 손해를 상쇄하고 남는다. 이로써 사회적 효용은 증가하고, 최종적으로 산출된 경제적 부가가치는 감소하지 않는다.


전자상거래업, 플랫폼의 발전은 투명한 사회를 앞당김과 동시에, 전자상가의 쇠퇴도 앞당기고 있다.




그렇다고, 선인 상가의 미래가 없는 건 아니다. 오늘 만난 청년 기업가 J에게서 그 가능성을 엿보았다. 그는 클러스터로서의 용산 전자상가가, 그 기능을 다했음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하긴, 그곳에 상주하는 모든 기업인, 상인 중에서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선, 앉아서 걱정만 하지 말고, 직접 발로 나서야 한다.


십수 년째 용산에서 사업을 하던 J는, 그야말로 전자상가의 터줏대감이었다. 용산을 찾는 손님이 줄어드는 속도는 빨라졌고, 자의 반 타의 반 용산 상가를 떠나는 업체의 수도 빠르게 증가했다. 그는 처음엔 이러한 현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두 자녀를 키우는 가장으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고, 자칫하다가는 굶어 죽기에 딱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행히, 컴퓨터와 소프트웨어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는 건,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강점이었다. 코로나 팬데믹과 코인 열풍도 그에게는 기회였다. 그래픽카드와 GPU, AI(인공지능) 서버 장치에 대한 납품수요가 증가했다. 그는, 오랜 시간 함께 호흡을 맞춘 직원들과 함께 전국을 돌았다. 전국 각지의 연구소, 대학교, 산학협력단 위주로 영업을 전개했고, 불러주는 곳엔 가정집이라도 직접 방문해서 서버를 설치하고, 시스템이 안정화될 때까지 상주하며 신뢰를 쌓았다. 소프트웨어 설치/개발 관련 공개입찰에도 적극 응했고, 적지 않은 계약을 체결했다.


최근 1~2년 사이에는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명 대학교, 산학협력단, 공공연구기관들과 수의계약도 맺었다. 대학생들의 창업 열풍도 기회였다. J는 이제, 그간의 경험과 경력을 살려, 소프트웨어 개발 전문가 겸 대학생 창업 코디네이터로 맹활약 중이다. 예전보다 연매출액은 줄었어도, 이익률은 더 나아져서, 만족스럽다.



아이러니하게도, 용산 전자상가를 벗어나니, 새로운 길이 열렸다. 이는 비단, J 대표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얼마 전 강서구 마곡동으로 본점을 이전한 C 대표도, 근처 IT 기업체들과 소프트웨어 개발, 납품 계약을 체결하고, 기업 맞춤형 애플리케이션 개발에 여념이 없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공교로운 건, 두 대표 모두, 용산 전자상가를 벗어나 사업을 하다 보니, 주변에서 자신들을 IT 전문가로서 더 인정해 주는 분위기를 느꼈다는 점이다. 언제부턴가, 용산 전자상가에는 부정적 이미지마저 덧칠해지고 있었다. 현실을 떠난 후에야, 내가 처했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누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던가. 뜻이 안 맞으면 모였다가도 흩어지고, 이해관계가 맞으면 헤어졌다가도 다시 만나는 게 세상 이치다. 이게, 이합집산(離合集散)이라는 고사성어의 의미에도 부합한다. 예나 지금이나, 관계와 사고의 유연함이 필요하다.




수도 서울의 중심부, 용산을 그간 지켜 온 전자상가 내 고경력 엔지니어들이, 언제 올지도 모를 임을 기약도 없이 기다리다가 망부석(望夫石)이 되어버리는 건, 시대착오적일뿐더러, 사회적으로도 큰 손실이다. 우리나라가 소프트웨어 강국으로 거듭난 데는 용산 클러스터(전자상가)의 역할이 컸다. 다만, 더 나은 만남을 위해, 지금은 잠시 이별해야 할 시간일 뿐이다.


다른 입주기업들도 저마다의 로드맵이 있을 터이니, 내 역할은 J 대표의 도전과 성공 사례를 공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행히, 이러한 의사 표현에는 별도의 세금계산서 발행도 필요치 않다.


자신을 지켜준 보호막이라고 생각했던 선인 상가가, 알고 보니, J 대표에게는 가림막이었다.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과감하게 선인 상가와의 이별을 택한 J 대표의 도전정신이 [J1➝A➝B➝C➝J2] 순서로 발행되는 세금계산서처럼, 각 단계별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해 내기를 바란다. 그와 동시에, 용산의 기세등등한 위세도 전국 팔도에 널리 퍼져, 소프트웨어 첨단국가로서의 위상도 공고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시니어 창업가 응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