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갑내기 부부의 jam 콘서트
Manner makes Man
출근하면, 하루에 평균 스무 통의 전화를 받는다. 그런데, 2월과 3월에는 유독 전화상담이 폭증한다. 전년도 성적표, 즉, 결산 재무제표가 나오기 때문이다. 기업이 새로운 한 해의 사업계획을 수립하는데, 자금 계획은 필수적이기 마련이다. 전년도 매출액과 영업이익률, 총자산 규모와 부채비율 등을 확인한 후, 추가적인 자금조달이 가능한지를 알아보는 문의 전화가 몰리는 건 당연하다.
2월 초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그날도 수많은 전화를 받고, 상담을 진행했다. 가끔, 진이 빠질 때가 있는데, 그날 내가 그랬던 것 같다. 지친 목소리로, 조금은 퉁명스럽게 수화기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요세프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사실, 하나도 감사하지 않은 목소리였을 테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인 감정노동자인지라, 감사하다는 전화 멘트는 자연스럽다)
“OOO 팀장님 연결해 주세요” (젊은 남성 목소리인데, 기세등등하다)
“그분은 인사이동으로 다른 곳으로 전근 가셨는데요”(기세에 밀리고 싶지 않아, 말끝을 ~요로 끝냈다)
“이상하네요, 얼마 전에도 통화했는데, 2월 초에 전화하라고 해서 한 건데요”(같이 ~요로 끝내는 걸 보니, 그도 기분이 상했나 보다. 지금 곱씹어 보면, 이 상황이 좀 황당했을 거 같기도 하다. 그날 전화 끊을 때까지 서로 간에 ‘~입니다’는 존대는 없었다)
“안 계시다니까요. 어떤 업무로 전화 주신 건지, 저에게 말씀하세요”
“OOO 팀장님께 다 설명했는데, 다시 처음부터 말해야 되나요?”
“네, 일단 회사명과 사업자번호부터 말씀해 주세요”
“OOO 주식회사요. 사업자번호는 123-45-67890이에요”
“어, 잠시만요. 그 회사 대표님은 여자분이신데, 지금 전화 주신 분은 남자분이시네요. 대표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죠?”
“남편인데요”
“추가 자금 관련 문의시라면, 가급적 대표님과 직접 통화하는 게 맞을 거 같아요. 기존 서류들을 우선 찾아보고, 제가 다시 연락할게요. 아 참, 대표님께요”
“분위기가 참 다르네요. 전임자분은 참 친절했고, 어느 정도 이야기도 되었는데”
“......” “네? 분위기요? 사람이 달라졌으니, 목소리도 분위기도 당연히 다르겠지요”
“뭐라고요? 그쪽 하고는 더 얘기하고 싶지 않네요”
뭐 이런 내용이었다. 기세에는 밀리지 않았다고 자부(?)했었는데, 전화를 끊고 나니, 바로 후회감이 밀려왔다. 마흔이 넘어도 평정심 유지는 참 힘들다. 새로운 지점에 아직 적응도 하지 못했는데, 오자마자 바로 민원이 발생하다니. 길게 심호흡하면서, 수습할 방법을 고민했다.
조금의 시차를 두고, 먼저 사과를 하기로 했다. 일견, 자존심 상하는 것 같아도, 그게 실은 자존감을 높이는 묘수다.
“오전에 전화받았던 요세프입니다. 잠시 통화 가능할까요?”
“이미 전임 팀장님과 통화했습니다”
“......” “벌써요? 전임 팀장님과 통화했다고 해서, 그분 하고 업무를 진행할 수는 없는 거고, 해결도 저랑 하셔야지요” “우선, 전화로만 대화를 나누다 보니, 감정이 다소 격했던 것 같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만나서 이야기 나누면 좋겠습니다. 혹시, 대표님과 함께 방문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나의 사과에 그도 언짢았던 기분이 좀 풀린 것 같았다. 이제, 부부가 운영하는 회사에 대해 살펴보며, 진정된 마음으로 그들을 맞이할 준비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외부 출장까지 일찍 마치고, 서둘러 사무실에 복귀했는데, 그들이 오지 않았다. 심지어, 가타부타 연력도 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다른 업무가 있어서 깜빡했단다. 황당하고 화도 좀 났지만, 참았다. 그렇게, 다시 미팅날짜를 잡고, 우여곡절 끝에 그들을 만났다.
아니나 다를까, 직접 만나서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니, 분위기가 한결 좋아졌다. 괜한 자존심 대결을 할 일이 아니었다. 다행이었다. 내가 그날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처럼, K 부부 역시, 그날따라 갑자기 직원 몇 명이 출근하지 않아서 아침부터 생난리였다고 한다. 그렇게,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보듬고, 용서했다.
감정적 동요는 걷어냈으니, 이제, 남은 건, K 부부가 운영하는 회사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 그들이 요청하는 자금지원의 타당성을 검토해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K 부부는 성수동 아파트형 공장에서 잼(jam)을 만든다. 그리고, 자신들이 생산하는 잼을 주요 원재료로 하는, 브런치 카페도 운영 중이다. 성수동, 천연 유기농 잼, 그리고 브런치 카페까지, 왠지 낭만적이다. 물론, 사업의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까지만 그렇다는 이야기다. 세상에 낭만적인 사업이 어디 있으랴.
K 대표는 대학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한 후,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식품 제조 대기업에서 10년 정도 근무했다. 제품 개발, 마케팅, 영업 관리 등 다양한 업무를 경험하고 나니, 자기 사업에 대한 꿈이 생겼다.
그렇다고, 무작정 퇴사부터 할 수는 없었다. 자신처럼 대기업 잘 다니고 있는 남편부터 설득해야 했다. 그러려면, 어떤 업종을 선택해서, 어떻게 사업을 키워나갈 것인지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대개의 경우, 배우자를 설득하지 못하면, 그 사업은 안 하는 게 낫다.
그들의 선택은 [콩포트(Comfort)]였다. 솔직히, 난 처음 들어보는 단어(불어)였다. 쉽게 말하면, 빵이나 과자, 각종 디저트 식품에 첨가해 먹는 프리미엄 잼(jam) 종류다. 특히, 주력 제품인 콩포트는 간편하고 고급스러운 미식을 즐기는 2,30대 여성들을 주요 고객층으로 하는 제품이었다.
K 대표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들이 만드는 제품은 Premium Serve Food Market에 속한다.
내가 고리타분한 사람인 걸까, 처음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잼을 만들어서 판다는데, 좀 비싼 거 아닌가? 그리고, 이걸 국내에서 대량 생산한다면, 인건비랑 시설비는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남편까지 잘 나가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K에게 힘을 실어준 걸 보면, 분명 내가 모르는 무언가 있을 터였다. 그렇게, 부부는 의기투합했고, 10년간의 모든 경험, 기술력, 그리고 퇴직금 전액을 쏟아부어 성수동에 법인을 설립했다.
중요한 건, 제품의 품질이었다. 가성비 좋은 시중의 잼을 대신해, 과연 사람들이 K가 만든 콩포트를 선택할 것인가. 맛있고 건강한 제품을 만들 자신은 있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들의 취향, 무엇보다 치열한 시장의 경쟁을 이겨내고,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더 특별한 jam을 만들어 내야 했다.
첫 창업을 한 2017년부터, 5년간은 담금질의 시간이었다. 우선, 푸드 프로세서(농축기), 살균기 등 제조설비를 마련했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진공 가열장치를 이용한 콩포트 제조 방법을 계속 업그레이드한 결과 특허권 등록에도 성공했다.
균등한 품질, 건강한 맛, 예쁜 색깔, 자체 브랜딩, 고정 납품처까지 확보하는 데, 무려 5년이 걸렸다. 고난의 시간이었다.
이제 제품군은 20개 이상으로 늘어났고, 여러 제품의 주문량이 증가하고 있다. 요즘은 날마다 기분 좋은 jam concert가 열리는 느낌이다.
문제는, 좁은 성수동 공장에서는 주문량을 다 소화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초기 자본금이 부족하다 보니, 품목은 많이 개발했음에도, 애당초 소량 생산만 가능한 규모였다. 게다가, 작업의 상당 부분을 수작업으로 진행하다 보니, 인건비 부담감도 크다.
베테랑 직원분들이 고령이라 그런지, 몸이 좋지 않다거나 집에 일이 생겼다는 이유로 결근하는 날들도 잦다. 정신없이 수습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매일 다이내믹한 날들의 연속이다.
K 부부가 나에게 SOS를 친 것은 이 즈음이었다. 제품 생산량을 대폭 늘리고, 회사 시스템도 안정적으로 구축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투자가 필요했다. 자가 공장 매입과 기계설비 추가 도입을 결정한 후에 시설자금을 요청했다.
근거 있는 자신감이다. 홈페이지(자사 몰)와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를 통한 주문량이 크게 늘었다. 기존 거래처들 외에도 풀무원, 스타벅스, 백화점 등 유명 오프라인 판매처들로부터 판매 제휴, 협업 요청도 계속 들어왔다.
처음에 난, 현재의 월 매출액과 수익률로는,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경기도 남부지역에 아파트형 공장이 매물로 나왔는데, 5억 원이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생산라인인 콩포트 잼 가공설비, 포장 설비, 공기압축기, 농축기, 부대설비를 새롭게 도입하는데 들어가는 공사비는 무려, 10억 원 이상이었다. 범용성 있는 장비가 아니기 때문에, 몇 년간 감가상각이 되면, 잔존가치가 많이 떨어질 게 불 보듯 뻔했다.
신속하게 결정을 내릴 일이 아니었다. 조금 시간을 두고, 고민해 보자며, 부부를 설득했다. 일단, 성수동 공장에서 생산할 수 있는 최대량이 어느 정도 되는지, 인근 임차 사업장을 추가로 내는 게 비용 절감 측면에서 더 나은 건 아닌지, 경기도 남부지역으로 이전하면 인력 턴-오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다른 업체로부터 설비 견적을 추가로 받아볼 필요는 없는지 등 여러 질문을 던져주며, 신중한 접근을 요청했다.
공격적인 투자가 능사는 아니니, 차입금 상환능력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했다. 부채비율, 이자보상배율, 영업이익률 같은 수치분석으로는, 반송(지원 불가)이 정답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창업 초기 법인기업에 대해 재무비율 잣대를 기준으로 의사결정을 내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3개월을 지켜보았다.
몇 번의 회의를 거쳐, 집단의사 결정 시스템에 부의(올리기로) 하기로 했다. 부각되는 재무적 리스크를 드러냄과 동시에, 경영진 경력, 영업 현황, 기술성, 성장성, 사업 실현 가능성 등을 추가로 검토했다. 해당 산업에 대한 시장분석 보고서도 참고했다.
사실, 그동안 K 대표 모르게, 사업장에도 몇 번 가보고, 관계사인 브런치 카페에도 다녀왔다. SNS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제품 사용 후기도 찾아보았다. 3개월 간 고심한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경쟁력 있음이었다.
다행히 나의 의사대로, 자금지원이 결정되었다. 물론, 정확한 회사의 미래는 알 수 없다. 그동안 내 예상을 벗어난 경우도 숱하다.
하지만, K의 회사는 개인기업으로 창업한 후, 지금까지 5년간 매년 매출액이 계속 상승세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부가 공동으로 운영 중이다. 인생을 건 부부의 승부수를 내가 믿어주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 우리 회사도 집단지성의 힘을 빌어 회사의 앞날을 지지했고, K 대표의 역량을 전폭 지지하는 10여 명 생산직 직원분들도 과감히 경기도 출퇴근 행을 결심했다.
막상 정책자금 지원 결정을 통지하고 나니, K 대표는 감사를 표하면서, 한편으론 10억 원에 달하는 차입금을 어떻게 갚느냐는 볼멘소리를 내비쳤다. 그만큼, 사업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 나까지 K의 심적 동요에 동조할 수는 없다. 무차입 경영하는 기업이 어디 있냐며,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영업이익이 이자비용보다 더 높기만 하면 문제없을 거라 했다. 이번 투자로, 회사의 규모와 가치는 계속 성장할 거라며, 응원해 주었다. 실제로도, 생산성과 효율성의 상승은 확실시된다.
업무 특성상, 내가 직접 투자는 하지 못할지언정(실은 돈도 없지만), 우리 집 잼은 당신 회사 제품만 사용하고, 성수동에 나들이 갈 때면, 브런치 카페에 방문해 플렉스(Flex) 하겠다고도 공언했다.
부부는 확신이 있었다. 오랜 시간, 차분히 그리고 계획적으로 준비해 왔기에, 이번 시설 확장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했다. 맞다. 지금과 같은 주문 증가세라면, 좁은 임차 공장을 벗어나, 과감한 투자로 자가 사업장을 매입하고 설비를 도입하는 게 계속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최선책이다.
내심, K 부부의 고민은 다른 데 있었다. 바로, 나와의 악연(?)으로 인해 이번 프로젝트가 중단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일사천리로 업무가 진행되고, 자신들의 기대치보다 더 빠르고, 과감하게 자금결정이 돼,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감정조절, 시간약속에 미숙했던 게 후회된다는 뒤늦은 고백이었다. 나만 반성했던 게 아니었다.
톤(Tone)과 매너(Manner)는 중요하다.
의사결정은 시스템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 당연한 상식이, 정말 당연하게 행해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번 일만 보아도, 나의 감정적 대응이 일을 그르칠뻔했다. 솔직히, 상담 과정에서의 말실수 하나, 첫인상, 말투, 심리상태 등이 업무에 영향을 미쳐, 엉뚱한 결론이 나는 경우도 있으리라.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 치 앞도 예측하기 힘든 게 비즈니스 세계다. 경기침체, 수급불균형, 치열한 경쟁, 매출채권 회수불능, 금리, 환율과 같은 외부 변수는, 사실 기업 스스로 통제하거나 예측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어떻게 보면, 운의 영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용, 신뢰, 믿음과 같은 관계의 미숙함에서 파생되는 운영 리스크만큼은 최소화해야 한다. 평판 관리 실패로 사업을 그르친다면, 얼마나 억울할 일인가.
잊지 말아야겠다. 킹스맨의 명언처럼,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 makes Man). Jam에 진심인 부부에게 Jam 나는 일들이 가득하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