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통의 존재
Standard is Error
올해 큰아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가끔이지만(!) 밤늦게 책상에 앉아, 졸린 눈을 비비며 적성에 안 맞는 공부하는 걸 지켜보면, 안쓰러울 때가 있다.
학생의 본분이 공부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좋은 대학에 진학해서, 좋은 회사에 취업하는 게, 썩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언제부턴가, 보편성보다는 특수성, 개성에 높은 점수를 부여하고 산다. 특별할 게 없는 중년의 소시민이지만, 평범한 삶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내가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반영된 듯하다.
무엇보다, 인생은 한 번뿐이다.
아들이 실제 생활에서는 크게 써먹을 일도 없고, 삶의 지혜와도 별 상관없는, 내신용 암기과목을 붙들고 있는 걸 보면, 지금이라도 당장 교과서 내려놓고, 본인이 즐거운 일,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라고 얘기해 주고 싶을 때가 많다.
물론, 그렇다고,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대충 살아가도 좋다는 식의 시그널을 주어서는 안 된다. 성실성과 책임감은 인생의 밑바탕이기 때문이다. 사실 3년 개근만 다해도, 학교 성적보다는, 적성에 맞는 일을 찾으려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큰아들은 아직, 특별히 전공하고 싶은 학업 분야나 장래 희망(직업)을 정하진 못한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곧 성인이 될 아들을 보고 있자니, 고민이 깊어진다. 나는 어떤 길라잡이가 되어주어야 할까.
생각이 많아지던 시기, 운명처럼 패션디자이너 S 대표를 만났다. 첫 대면부터 예사롭지 않다. 보통 첫 미팅 초반 십여 분은 업무 이야기보다는 일상적인 주제로 분위기를 풀어가기 마련이다. S 대표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는 걸 알기까지 십 분이면 충분했다.
일단, 그는 남성인데, 장발이고, 화장은 짙다. 귀걸이와 문신(타투)도 금방 눈에 들어온다. 동거인은 있으나, 혼인은 하지 않았다. 결혼제도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피력하는데도 거침이 없다. 인스타, 페이스북, 유튜브 활동에 적극적이고, 본인의 신청으로 네이버 프로필 등록도 마쳤다.
영문으로 표기된 상호를 우리말로 해석하자면 [표준오차] 다. 평범한 삶을 거부하겠다는 의지를 대외적으로 공표한 것이다. 이즈음 되니, 그의 인생, 철학이 점점 더 궁금해진다.
그렇다고, 꼰대처럼 내 생각을 전달할 필요는 없다. 선입견을 버리고, 그와 토론하는 대신, 최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그가 진행하는 사업브리핑을 통해 경영자로서의 역량, 시장에 대한 이해도, 핵심 고객군 마케팅 방안, 제품 기획력, 미래 비전 등을 귀담아듣고, 회사의 성장방안을 함께 고민해 보는 게 최선이다.
평범함(Standard)을 실수(Error)로 간주하는 그의 행보는 고등학교 시절부터다.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S의 관심사는 패션의류 분야였다. 대학교 진학 대신에, 그는 동대문 의류상가에 취업했다. 봉제 공장에서 바느질(미싱), 마름질(재단), 의류생산(재봉) 업무를 경험했다. 수년간 경험을 쌓다 보니, 캐주얼 남성복 디자인 업무에 흥미가 생겼다.
그는 지체 없이, 20대 중반에 개인기업을 창업했다. 그동안 총 3개의 개인기업을 운영했는데, 모두 남성의류 소매업이었다. 어떤 옷들이 잘 팔리고, 유행하는지, 의류 원단은 주로 어디에서 구매하고, 어떻게 편직을 하는지, 새롭게 디자인한 의류는 어떻게 제품화되는지를 몸소 체험했다.
아무래도 자본력이 부족하다 보니, 시작은 조촐했다. 상품 보관 창고와 촬영 스튜디오만 갖추고, 온라인 판매(전자상거래)에 주력하며 5년여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시작은 사업 실패 부담감도 낮추고, 초기 투자 비용도 줄일 수 있는 좋은 선택지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1인 기업가, 영세 소상공인에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본인이 직접 브랜딩 하고, 디자인한 제품을 생산하겠다는 결심이 서자, 과감한 투자를 결정했다.
서른에 이른 S는, 드디어 법인을 설립했다. 납입자본금은 5천만 원 수준이다. 그의 계획을 모두 실행에 옮기기에는 부족한 규모로도 보이지만, 사실, 그 나이대의 일반적인 청년들과 비교해서는, 꽤 큰돈을 모은 것이기도 하다.
청년창업은 도전할 가치가 있다.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성비 좋은 원단을 구매하는 일이었다. 중국 에이전시를 통해 의류 원단을 수입하면서, 편직 제조에 특화된 파트너사와 협업하여 품질 좋은 섬유 원단 개발을 병행하기로 했다. 그와 동시에, 생산설비가 잘 갖추어진 봉제 공장을 섭외하여 그가 디자인한 제품을 전량 위탁생산하기로 했다. 모두 협업해야 가능한 일들이다.
혼자서 모든 일을 잘 해낼 수는 없는 법이다. 경영학 교과서에 나오는 분업화, 전문화, 시너지, 비교우위, 거래비용 같은 용어(이론)들을, 그는 따로 공부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체득했다. 사실, 초기자본금이 부족했기에, 다른 선택지도 마땅치 않았다.
궁하면 통하는 법이다. 준비가 부족하더라도, 일단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사업장을 방문한 날, S와 직원들은 의류 화보 스튜디오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자사 로고가 새겨진, 캐주얼하고 심플한 디자인의 남성용 티셔츠, 반바지, 이너웨어 촬영을 마친 후, 편집과정을 거쳐, 온라인 플랫폼(무신사)에 업-로드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긴말은 필요 없었다. 역시,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다.
다행히, S의 법인은 어느 정도 안정 궤도에 올라선 것으로 보인다. 매월 2억 이상의 매출이 꾸준하게 나오고 있고, 소비자들의 반응도 호의적이다. 패션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옷이 예쁘고, 입고 싶어 진다.
때때로 웃음꽃이 피어나는 일터가 되기까지, 무려 5년이 걸렸다. 그래도, 방심할 틈은 없다. 워낙 경쟁이 치열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후속 아이템을 만들어 내고, 히트작도 꾸준히 내어야 한다.
사실, 자본금 5천만 원은, 초기 원료 구매비, 창고와 사업장 임차료, 촬영 장비 도입비, 디자이너 등 인력 채용비, SNS 마케팅비를 모두 충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액수다. 첫 몇 개월간 돈 들어갈 일은 계속인데, 매출이 발생하지 않으니, 갑갑할 노릇이었다. 정작 자금이 필요한 시기였지만, 외부 투자를 받거나, 은행에서 대출받는 건 불가능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금지는 '채권자 헌법' 1조 1항이다.
그러다 보니, 결국 기댈 곳은 가족뿐이다. 부득이 어머니에게 SOS를 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어머니는 자신의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하고, 은행에서 빌린 돈을 아들에게 내어주셨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
S는 성공이 절실했다. 나이 든 불량 아들로 남을 순 없는 노릇이다.
물론, 부모와 같은 특수관계인에게서 빌린 자금(가수금)은 급하게 상환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금융기관의 입장에서, 기업이 개인 차입금을 활용한다는 건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다. 오히려 신용평가 등급 하락의 요인이다. 기업의 신용도나 차입금 상환능력이 인정되면, 은행이나 투자자가 먼저 나서서, 돈을 빌려주려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상황은 달라졌다. 브랜드 인지도가 많이 올라갔고, 매출액도 가파르게 상승 중이다. S 대표의 자유분방함과 튀는 행보는 오히려 높이 평가받는다. 업계 특성을 고려한 경영전략의 일환이라는 세간의 색다른 해석도 들린다. 사람은 그대로인데, 외부의 평가는 극과 극을 넘나든다.
기업이 성장하니, 시중은행과 정책금융기관 여러 곳에서도 더 낮은 금리를 제시하며, 그에게 접근한다.
세상사 표준오차가 참 크다. 잘 되고 볼 일이다.
무엇보다 어머니에게 받은 것을 되돌려드릴 수 있게 된 게 가장 큰 수확이다. 얼마 전에는 여성용 의류 브랜드도 새로 론칭했다. 반응이 뜨겁다. 최근 합류한 디자이너의 공이 크다. 아이디어가 뛰어난 직원의 제안을 시작으로, 일본의 무신사로 불리는 의류 플랫폼에 입점도 했다. 에이전트의 추천으로, 코트라(Kotra)에서 주관하는 수출희망기업 프로그램 신청도 완료했다. 일대일 멘토링 서비스가 제공된다 하니, 이젠, 수출기업으로 거듭날 일만 남았다.
10년 이상 대표자로서 패션의류 업계에 종사하다 보니, S의 경력은 기업의 핵심경쟁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원료 수입, 제품 개발, 디자인, 생산, 홍보, 판매 전 과정에 걸쳐, 조력자, 파트너들이 나타났다. 정부(정책) 기관과 은행도 더 이상 [갑]이 아니다. 나와 같은 자발적 응원 세력도 생겨났으니, 바야흐로 감격시대다.
낮은 금리의 정책자금 지원이 결정되었으니, 본격적인 외형 성장이 기대된다. 기존 주력 제품의 판매량은 늘고 있고, 오프라인 매장들도 판매 제휴를 요청하고 있다. 자금 사정이 좋아지니, 원단 선구매와 디자이너 채용도 가능하다. 더 좋은 품질의 옷을 만들어,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릴 적 말썽꾸러기는, 또 이렇게, 특별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공부 외의 적성을 일찍 발견하고, [체험 삶의 현장 속으로] 과감히 뛰어든 반항아는, 우여곡절 끝에 유망 중소기업의 대표이사로 거듭났다.
이론보다는 실무 위주로 경력을 쌓다 보니, 뒤늦게 지적 호기심도 살아났다. 야간 대학에 진학해 디자인 공부를 병행할 계획임을 내비친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고, 장학생이 된 S의 모습이 그려진다.
청년 기업가는, 이른 나이에 자신이 종사하는 업계 전반에 대해 통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용주로서 인력 운영, 인재 개발, 더 나아가서는 인간관계 전반에 대한 노하우도 획득할 가능성이 크다.
청년 창업가가 박수받을 이유는 많다.
S는 모든 일을 직접 해결하려는 만기친람(萬機親覽)형 경영자가 되는 대신, 권한의 하부 위임과 자율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형태로 시스템을 구축 중이다. 그러다 보니, 직원들도 신규 아이디어를 과감히 실행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는, 예상보다 빨리 후속 히트작도 낼 수 있었다. 제품 포트폴리오가 계속 생겨나는 건 덤이다. 스타트-업 경영전략 연구에 좋은 사례가 될만하다.
S가 그려 나가는 삶의 궤적은,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과연 모범답안일까 하는 질문에 대한 반대증거다.
물론, 이 사례 하나만을 가지고, 확대해석하거나 일반화할 수는 없다. 또한, 30대는 아직 성공 여부를 논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다. 그렇지만, S 대표의 창업 도전기는 (공부로 성공하기 힘든) 대다수의 학생과 학부모들이 곰곰이 곱씹어 볼 만한 케이스다.
이 세상에 평범한 인생, 삶의 표본, 가장 보통의 존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든, 이 세상 가장 비범한 존재다. 네모난 교실, 똑같은 교복 속에도 각자의 방은 있다.
한 사람의 개성은 의견(Opinion)이 되고, 몇몇의 의견이 합해지면 관점(View)이 되며, 관점이 쌓이면 이론 (Theory)/법칙(Rule)이 된다.
우리는 심지어, 증명이 불가능한 끌어당김의 법칙(Rule of Attraction)마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을 살고 있지 않은가.
칸트의 정언명령에 따르면, 개인의 주관적 행동(준칙)은 보편적 법칙(도덕)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평균을 거부하라'(Standard is Error)는 준칙은, 다행히 2023년 현재의 상식에서도 벗어나지 않는다. 칸트의 메시지는 유효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명확해졌다. 자녀 적성 발굴 길라잡이다. 시작은 마음 비우기다. 공부는 아들의 적성이 아닌 게 확실하다. 구태의연한 편견은 벗어 던지고, 아이가 어떤 이야기를 꺼내더라도, 응원해 주기로 결심해 본다.
개성이 보편성에 부합하는 시대, 저마다의 개성이 넘치는 아이들이 각자의 방에서 색다른 꿈을 찾아 나서길 기대해 본다.